살기 위해 저항했다는 이유

정당방위 앞에서 흔들리는 피해자의 자리

by 아우리

얼마 전 자택에 침입한 강도를 제압했다는 배우 나나 씨의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듣고 난뒤,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사건 자체보다도 그 이후의 전개가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강도가 도리어 피해자를 고소했다는 대목이 특히 그랬습니다.


살기 위한 저항, 돌아온 고소장

사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새벽 시간, 사다리를 타고 침입한 강도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위협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나나 씨와 어머니는 생존을 위해 몸으로 저항했고, 경찰은 이를 정당방위로 판단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제압당한 가해자가 살인 미수 혐의로 피해자를 역고소한 것입니다. 법적으로 고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권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저항한 행위가 다시 범죄의 언어로 호출되는 모순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의 자리

이 뉴스를 보며 방어라는 단어의 무력함을 떠올렸습니다. 위협이 분명한 상황에서 나와 가족을 지키는 선택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제3자의 시선에서 해석됩니다. “과하지 않았는지”, “꼭 그래야 했는지”를 묻는 질문 앞에 서는 쪽은 늘 피해자입니다.

이 지점에서 나나 씨의 유명세는 특권이 아니라 예외 없는 조건처럼 보였습니다. 유명인이든 아니든, 법 앞에서는 결국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더 널리 퍼졌지만, 그 확산은 보호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어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침착함과 절제는 더 엄격해졌고, 피해자는 다시 자신을 정돈해야 했습니다.


법과 감정 사이

법은 절차를 따릅니다. 정당방위의 요건과 상당성의 범위는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기준은 시민의 상식과 자주 충돌합니다. 특히 피해자가 다시 법의 심판대 위에 올라야 할 때, 법은 중립적이지만 개인이 겪는 경험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역고소가 형량을 줄이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가능성 자체가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이 순간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해야 하는 싸움꾼으로 내몰리기 때문입니다. 법의 틈새가 가해자의 전략이 되는 동안, 방어의 부담은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배우의 일이 아닙니다. 위협 앞에서 몸을 지킨 사람이 다시 흔들려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이후에 닥쳐올 질문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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