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by 인유

비가 오려는지 바람에 물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예고 없이 무거워진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때,

나는 비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축축한 몸을 말리지 못한 채였습니다.


평소엔 입에도 대지 못하는 소주 한 병을

편의점 계산대 위에 덜렁 올려두고 나왔습니다.

검은 봉지 속에서 병이 출렁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자꾸만 마음의 가장자리가 툭툭 건드려졌습니다.


한 잔을 비우고 나면 마음은 제 모양을 잊어버립니다.


조금 나아진 것인지, 아니면 더는 나빠질 곳조차 없는 바닥인지 가늠할 수 없어

그저 기억의 언저리를 오래도록 서성였습니다.

슬픔은 씻겨 나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기를 머금고 더 무겁게 가라앉아 나를 이 방 안에 가두는 일입니다.


시간이 깊어지고 빗소리가 멎고 나면,

세상은 타인의 울음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의 뒷모습처럼 고요해지겠지요.


차갑게 식은 공기, 진흙이 묻은 신발, 울음을 다 써버린 거리.

그 사이를 내가 휘청이며 걸어왔다는 사실만이 선명합니다.

이것이 몰려오는 술기운 때문인지

마음에 깊이 밴 슬픔 때문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다만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이 젖은 공기가 아직 내 안으로 들어오는지 가만히 느껴볼 뿐입니다.


비는 아무것도 씻어내지 못했고

어떤 슬픔도 가져가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젖은 것들의 무게를 내 곁에 더 선명하게 남겨두었을 뿐입니다.


다시 제대로 걷게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나는,

무너지는 쪽으로만 쓰러지고 싶지 않아

자꾸만 휘청이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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