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멀찍이 국회가 보이는 한 건물의 15층. 선거사무소가 아닌 ‘정책기획실’이라 이름 붙여진 사무공간.
장민혁은 문을 열기 전, 셔츠 단추를 한 번 더 고쳐 잠갔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장민혁입니다.”
그는 올해 마흔아홉. 금융위에서 잔뼈가 굵었고, 증권시장 구조개편, 코스닥 활성화, 공매도 제도 정비 등 굵직한 정책의 배경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5년 전, 그는 돌연 사표를 냈다.
“정책은 이상을 보고 계획되지만, 시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이 말은, 관료로서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 내도 시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체념이자 고백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몇몇 보좌진들이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엔 환영보다는 관망이,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먼저 일어섰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군더더기 없는 외모의 남자. 유정민이었다. 캠프 내 정책기획파트의 실무 책임자이자, 이창명 후보의 핵심 보좌관이었다.
“장 실장님, 드디어 뵙네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유정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저도요.”
장민혁이 짧게 맞받았다.
유정민은 손을 내밀며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민혁에게선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장민혁은 그 불편함을 즐기는 듯 미세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런 식의 환영이 오히려 편했다. 속내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들어왔다는 증거였으니까.
“후보님께 캠프 합류 보고는 드렸습니다. 유세 일정 체크해서 조만간 따로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우선 내부 정책팀과 공유할 금융 정책들부터 같이 만들어 가시죠.”
유정민이 형식적인 안내를 덧붙인 건 예의 차원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누가 프레임을 짜고, 누가 지시를 따를지 미리 선을 그어두려는 주도권 관리 성격이 강했다.
며칠 후, 정책기획실 회의실. 이창명 캠프의 ‘경제정책 비전 2차 초안’을 두고 내부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한 실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법 개정안은 캠프 핵심 메시지로 이미 언론에 언급된 상태입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이자, 재벌개혁의 상징이니까요. 우선, 자산 총액 2조 원 이상 상장회사에 대해서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조항이 포함될 예정이고, 감사위원회 위원 중 최소 2인을 분리 선출하도록 하는 조항이 반영될 것입니다. 또한 다중대표소송제는 기존에 도입되어 있던 제도를 더 확대, 보완하는 형태로 가져가려고 합니다.”
장민혁은 회의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안, 실행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실무진이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그 틈을 타 장민혁이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하는 실행이란, 국회 통과 얘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이 안이 도입됐을 때, 상장기업 중 몇 퍼센트가 기존 지배구조를 유지한 채 R&D나 인력 투자를 확대할 수 있을지를 묻는 겁니다.”
회의실은 일순 조용해졌다.
“지금 이 안은 투자자 보호라는 미명 아래, 지배구조 리스크를 기업에 전가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업들은 방어적 재무 전략을 취할 겁니다.”
장민혁은 앞에 높인 자료를 한 장 넘겼다.
“지난 5년간 대기업들은 이미 지배구조 개편 압력에 대비해 사내 유보율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습니다. 당기순이익의 50% 이상이 배당이나 투자로 가지 않고 ‘현금성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경영권 방어 비용’이에요.”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장민혁은 이어 말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도입되면, 기관투자자 중심으로 연합주주권이 형성될 겁니다. 그 순간, 주요 계열사에서 외부 감사가 통제권을 갖게 되고, 오너는 연결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외 자회사 지분을 직접 사들이거나, 내부거래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이게 R&D 확대나 신규 고용에 긍정적인 환경입니까? 우리가 예상한 방향과 다를 겁니다. 기업들은 수세적 방어 기조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정민은 조용히 장민혁의 말을 끝까지 듣고, 손끝을 깍지 낀 채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기업들은 방어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지배구조 리스크, 투자 위축, 보수적 현금관리 다 예상 가능한 반응이죠.”
그는 한 템포 쉬었다.
“하지만 실장님, 그건 과거형 프레임입니다. 지금 시장이 원하는 건 단순한 ‘안정’이 아닙니다. 구조의 재설계입니다.”
회의실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OECD 주요국 중에서도 한국만 유독 집중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 도입이 늦었습니다. 한국의 이사회는 아직도 내부 경영진에 의해 봉쇄된 구조고, 대다수의 소액 주주는 배당 외에는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구조를 바꾸는 순간, 시장은 단기적으로 움츠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다음은 다릅니다.”
유정민은 화면을 넘겼다. 슬라이드에는 “상법 개정 → 지배구조 개선 → 외국 투자자 유입 → 기업 밸류에이션 상향 → KOSPI 5,000pt 시대”라는 선형 흐름도가 그려져 있었다.
“현재 KOSPI 상장기업의 평균 PBR은 0.9배에 불과합니다. 기업가치가 아니라, 의결권 집중 구조와 오너 리스크 때문에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가 손대는 건 ‘상법’이 아니라, 시장 전체의 밸류에이션 프레임입니다.”
그는 장민혁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미국, 일본, 프랑스, 심지어 대만까지. 이제라도 지배구조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들어올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후보님의 생각도 같습니다.”
유정민은 곧바로 정치적 맥락으로 전환했다.
“경제민주화, 상법 개정, ESG 거버넌스 강화. 이 세 가지는 단순한 제도 변화가 아니라, 한국 시장이 ‘재평가’될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 지금까지 시장은 늘 기업의 입장만 반영했습니다. 이젠 주주의 시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후보께서 말씀하신 ‘5,000pt 시대의 조건’입니다.”
자정 무렵, 강남 청담동의 한 사무실.
이태훈은 창밖을 바라보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왔어?”
장민혁이 말없이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와이셔츠 단추는 두 개쯤 풀어졌고, 넥타이는 이미 뒷주머니에 구겨져 있었다.
“캠프는 좀 어때?”
이태훈이 물었다.
“생각보다 세더라.”
장민혁은 짧게 말했다.
“유정민. 그 놈이 후보 옆에서 오래 버틴 이유가 있더군.”
이태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밀어붙이지 못할 정도면, 단순한 브레인은 아니겠네.”
장민혁은 물 잔을 들고는 한숨을 섞어 삼켰다.
“문제는… 이제 상법 개정이 캠프 전체의 경제 비전이 됐다는 거야. 원래 구호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경기 침체로 다들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니까, 증시를 붐업시켜서 유권자들을 잡아보겠다는 거지.”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야. 기업들은 이미 투자를 멈췄고, 전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어. 그런데 그 위에 제도 리스크를 하나 더 얹어? 이 후보가 정권 잡는 순간, 상반기 안에 주요 그룹들 전부 투자계획 다시 짜야 할 거다. 게다가 캠프 안에선 이걸 ‘시장개혁’이라고 부르고 있어.”
“개혁?”
이태훈이 되물었다.
“삼성, SK, 현대, LG…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걸 개혁이라고 밀어붙이면, 다음 타깃은 어디겠냐. 한화, 포스코, CJ, LS…로 줄줄이 이어지겠지.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을 옥죄어서, 복지 재원은 거기서 짜내겠다는 거지.”
이태훈이 조용히 웃었다.
“어쨌거나 결국 위에서 불붙으면, 밑에선 기대감인지 공포인지 모를 수급이 움직이겠네.”
장민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태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짝이 맞는 거잖아. 너는 질서를 짜고, 나는 그 질서를 잘 활용해서 기회를 만들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장민혁이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진짜 조심해야 해. 캠프 안에서도 예민하게 굴고, 유정민도 정찰망을 넓게 깔고 있어.”
이태훈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방금 나간 장민혁의 뒷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사무실은 고요했고, 탁자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만이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며칠 뒤, 같은 태블릿 화면에 속보가 올라왔다.
「삼성전자, 미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 검토」
「현대차, 미 조지아에 2조 원 추가 투자 계획 발표」
「트럼프 ‘미국 내 제조기업에 세제 혜택’ 검토」
이태훈은 기사 제목을 눈으로 따라가며 피식 웃었다. 기사 하단에는 익명의 재계 고위 관계자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최근 국내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미국 시장은 중요한 대안이 되고 있다.”
그는 컵에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중얼거렸다.
“…봐라. 타이밍이 기가 막히잖아. 캠프 안에 있으면서, 바깥이 먼저 반응하게 만드네.”
국내 정책 불확실성이란 이름으로,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해외 투자로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흐름. 마치 ‘정부가 막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구실을 얻은 듯, 이제 대기업들은 공개적으로 해외 확장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태훈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지… 상황을 그렇게 흘러가게 설계하는 놈이야, 장민혁은.”
태블릿 화면을 덮으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건 ‘도망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준 거야. 이제는 ‘국내 투자 줄이겠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지. 그저─ 미국이 부르니까 간다고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