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말. 여의도.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한 카페. 평일 오전임에도 창밖으로는 검은 정장 차림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 소란스러움과는 동떨어진 자리에서, 세 사람이 모였다.
최도진, 이승민 그리고 유정민. 이 셋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첫 만남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권력과 돈의 흐름을 목격해온 세 사람. 한 명은 제도의 빈틈을 직접 파헤쳐온 분석가였고, 한 명은 그 빈틈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기자였고, 또 한 명은 정치의 심장부에서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실무자였다.
각자 다른 조각을 쥔 채 살아온 세 사람이, 처음으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순간─ 퍼즐은 비로소 그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얘기는 곧장 후보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중요한 사안이니까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손끝은 펜을 움켜쥔 채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승민이 그의 옆에서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띄웠다. 화면에는 도진과 이승민이 며칠 동안 정리한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거래소, 금융위의 연결고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선과 화살표가 얽혀 있는 그 도표는, 마치 미로 같으면서도 단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민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결론부터 말해주세요. 물적분할이란 상장 방식이 우리 주식시장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던 겁니까?”
이승민은 숨을 고르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상장을 통한 자금 인출 구조입니다. 대기업은 신규 상장으로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하고, 거래소는 상장 수수료와 거래대금 증가로 실적을 올립니다. 또, 일부 기관 투자자는 미리 정보를 알고 투자하거나, 특혜성 약정으로 확실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정민은 담담히 물었다.
“그렇다면 개인 투자자들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진이 대신 답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고평가된 상장주를 떠안는 거죠. 결국 피해는 개인에게 집중됐습니다.”
정민은 펜을 움직이며 메모를 남겼다.
대기업 – 자금 확보, 거래소 – 수수료 수익, 기관 – 특혜 실적, 개인 – 피해.
단어 몇 개만 적혔지만, 그것이 후보에게 보고될 때는 정치적 파장이 될 수 있었다.
창밖에는 봄 햇살이 여의도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세 사람 사이 공기는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민은 고개를 들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건 제도의 허점이 아니라, 수많은 투자자들의 분노가 쌓여 있는 문제다. 그들의 목소리를 얻는다면, 후보님에게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며칠 뒤, 늦은 밤이었다. 이승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사회부 후배 기자. 한때 함께 ‘시경팀(신입 기자들이 거치는 경찰서 출입 취재팀)’에서 밤새워 라면을 끓여 먹던 믿을 만한 후배였다.
“선배, 어제 제가 강남경찰서 당직이었는데요.”
후배의 목소리에는 주저가 묻어 있었다.
“증권사 직원 하나가 술에 취해 들어왔는데… 단순한 주취 난동이 아닌 것 같아서요.”
“뭐가 이상한데?”
이승민이 낮게 묻자, 후배가 숨을 고르며 답했다.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법무팀 변호사가 직접 와서 데려갔습니다. 그냥 폭행 사건 같았으면 그럴 리 없잖아요. 선배가 요즘 그쪽 취재하신다고 해서….”
전화가 끊기자, 승민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다.
다음 날 승민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강남경찰서로 향했다. 낡은 청사 특유의 차가운 공기, 형광등 아래 삐걱대는 철제 의자. 사회부 기자 시절 수없이 드나들던 취재 현장이었지만, 오늘은 그때와 전혀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록을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민수 / M증권사 강남센터 소속 PB / 30대 중반 / 경력 5년 차 / 직급 과장 / 미혼
단순한 주폭 사건으로 보였지만, 그가 취재해 오던 파인넥스트 파트너스와의 연결고리가 되기 충분했다.
2025년 4월 30일 수요일 23:30
피해자는 술에 취해 귀가 도중, 사채업자들에게 붙잡혀 도망치다가 경찰서로 오게 됨.
사채업자들에게 지속적인 협박 및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
원인은 5억 원 규모의 개인 채무 발생.
이유는 주식 투자 실패.
술에 만취해 강민수는 경찰서에서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강민수는 진정한 듯, ‘별일 아니었다’며 사건 접수를 취소.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기록 말미에는 낯선 명함이 하나 첨부돼 있었다.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법무팀 변호사 ○○○’
이승민은 직감했다.
‘이건 개인의 사건이 아니다. 뭔가, 더 큰 게 걸려 있다.’
M증권사 강남센터. 이승민은 오랜 인맥을 동원해 강민수 주변을 알아봤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이미 몇 주 전, 그는 사표를 내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집 주소로 찾아가도 흔적이 없었다.
결국, 승민은 강민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통해 단서를 얻고자 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인물이 바로 박소은이었다. 강민수와 같은 입사 동기. 그리고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
카페 한쪽 구석, 박소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 채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승민이 말했다.
“그냥 동기였던 사이가 아니라… 좀 더 가까운 사이였던 거죠?”
박소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때 사귀었어요. 민수와는 근무하는 지점이 달랐지만, 헤어진 후로도 계속 친구 사이로 연락하고 지냈고, 가끔 만나기도 했어요. 이번에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이제 정말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던 참이었는데….”
그녀는 손끝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회사에 사표 내고, 연락도 끊겨서 걱정했었어요. 그런데 기자님 연락을 받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민수가… 사채라니….”
승민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박소은은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민수는 원래 성실했어요. 그런데… 강남센터로 발령이 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강남센터는 특별했거든요. 그곳은 말 그대로 VIP 고객들이 넘쳐났어요. 정, 재계 인사들뿐 아니라, 대기업 총수 일가, 연예인, 스포츠 스타, 인플루언서까지…. 민수가 언젠가 그러더라고요. 매일 수십억, 수백억짜리 계좌들을 관리하면서… 점점 생각이 변해갔다고. 민수가 달라진 건, 그때부터였어요.”
잠시 생각을 떠올리던 박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민수가 강남센터로 옮긴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지점장과 부지점장이 나란히 외부 손님을 직접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대요.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했어요. 부지점장은 민수를 불러 PB들과 회의를 잡으라고 했고, 지점장은 몇몇 종목 리스트를 주면서 애널리스트 보고서 찾아서 인쇄해두고, 없으면 기업편람 요약해서 회의 준비 좀 해놓으라고 했대요. 그렇게 지점 미팅이 있었고, 민수한테 조사 맡긴 종목들을 성장 기대주로 제시하면서 찍어줬다는 거예요. 매매할 것 없으면 이것들 위주로 하라고. 민수는 몇 주간 해당 종목들의 주가를 관심 있게 보다가 깜짝 놀랐대요. 돌아가면서 수십 퍼센트씩 치솟았다는 거예요. 호재성 뉴스들이 연이어 터졌대요. 정부 정책 수혜, 무상증자, 어닝 서프라이즈 같은 것들 말이에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그 외부 손님이 무슨 대형 사모펀드 임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이사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이승민의 메모하던 손이 순간 멈췄다.
“이태훈.”
정적이 흘렀다. 박소은의 눈이 커졌다.
“맞아요.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이태훈 총괄이사. 지금은 대표이사로 승진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승민은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소은 씨, 혹시 민수 씨 부모님 연락처 아세요?”
박소은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예전에 어머님을 뵌 적 있어요. 연락처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보내드릴게요.”
사무실로 돌아온 이승민은 오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열어 타자를 입력했다.
강남센터 이태훈 방문 → 특정 종목 추천 → 지점 PB 회의
강민수는 내부정보를 믿고 몰빵 → 사채 빚 → 파산
‘그런데 왜 경찰서에 있는 강민수를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소속의 변호사가 빼내 간 걸까?’
이승민은 조용히 생각했다.
‘강민수만 찾을 수 있다면. 그의 입에서 그날 회의와 이태훈 이름이 직접 나온다면. 이 연결고리를 확실히 매듭지을 수 있다.’
하지만 강민수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회사는 퇴사 처리됐고, 부모님도 민수는 잘 지내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채업자들조차 빌려준 돈은 이미 받았다고 했다. 그는 마치 흔적을 지운 듯, 자취를 감췄다.
며칠 뒤, 사회부 기자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선배, 강민수 그 친구… 필리핀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승민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의도 밤거리. 텅 빈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 빛은 평온해 보였지만, 승민의 가슴 한편에서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더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