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 서울. 이승민은 몇 년간의 방황 끝에 결국 중소형 언론사에 자리를 잡았다. 대형 언론사의 화려한 간판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LG에너지솔루션 상장을 계기로 그는 집요하게 물적분할 구조를 추적했다. 그러나 그의 집념은 조직 내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어느 날 편집국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승민아, 너도 이제 부장 달아야지. 그런데 왜 이런 기사만 파고들어? 그거 밝혀서 뭐 하니? 이미 금융당국에서 규제하겠다고 밝혔잖아. 기자도 결국 실적이야. 기업이랑 관계 맺고, 광고 끌어오고, 그런 게 다 성과로 남는 거야.”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이 있었지만, 그는 꾹 삼켰다.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조용히 사표를 내려놓았다. 그 후 승민은 소형 온라인 매체로 옮겼다. 대형 언론사에 비해 보수도, 안정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더 이상 윗선의 전화나 광고주의 압력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로지 그의 판단과 펜만이 있었다.
그는 알았다. 자신이 좇는 길이 권력의 논리에선 무모하고 손해일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분명히, 그 구조 안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기자일 수 없었다.
여의도, 한 조용한 카페. 최도진은 여전히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예전 그대로 날카로웠다. 그는 테이블 위에 두툼한 서류 뭉치를 펼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자님, 단서를 잡은 것 같습니다.”
이승민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넘겨받았다. 표지에는 낯익은 회사명들이 적혀 있었다. 소마젠, 네오이뮨텍….
“코스닥에 상장된 해외 바이오 기업들이군.”
최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시겠지만, 2020년대 초반부터 외국 바이오 기업들이 기술특례를 통해 잇따라 상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수년간 적자를 이어온 회사들, 매출조차 미미한 기업들이 ‘기술성 평가’ 하나로 상장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기업들이 왜 굳이 한국이라는 시장을 택했을까요?”
승민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히 맞장구쳤다.
“그때도 의문이 있었지. 신약 개발 불모지라고 불리는 한국에서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까 말이야.”
도진이 말을 이었다.
“이 기자님, 원래 기술특례 상장은 국내 기업에만 허용됐습니다. 그런데 2019년에 한국거래소가 해외 기업에도 문을 열었죠. 금융위가 규정을 바꾸면서 가능해진 일입니다.”
승민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도진의 시선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기술력 있는 해외 바이오 기업들을 우리나라에 진입시켜 ‘글로벌 바이오 허브’를 구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외 기업을 끌어들여 상장시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수료와 선제적인 투자로 차익을 챙기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도진은 커피잔을 들며 조용히 덧붙였다.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그들이었습니다.”
승민의 눈빛이 흔들렸다.
“LG에너지솔루션 상장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력은 이미 해외 바이오 기업을 앞세워, ‘기술특례 상장’이라는 제도 안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둔 전력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사모펀드 운용사로 이름을 알렸지만, 실제로는 제도권 인사들을 움직여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 왔던 겁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진은 노트북을 열어 건의 자료를 보여줬다.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사모투자 3호 펀드 투자설명서
소마젠 투자계약서 초안
네오이뮨텍 상장심사 보고서
그리고 그 옆에는, 두 기업의 주가 차트가 있었다. 가파른 폭락. 상장가 대비 10분의 1 수준. 소마젠, 네오이뮨텍 모두 상장 이후 계속 적자를 이어갔고, 네오이뮨텍은 상장 후 손실금액만 2,000억 원이 넘는다. 두 회사 모두 사실상 상장폐지 직전의 상태다.
이승민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결국, 피해자는 또 개인 투자자네.”
도진은 짧게 웃었다.
“언제나 그렇죠.”
잠시 후, 승민은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무겁게 말했다.
“해외 바이오 기업 기술특례 상장,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상장… 결국 같은 맥락이었군. 처음부터, 이 구조를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구조였어.”
도진은 조용히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반드시 밝혀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