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코스닥 벤처 시장

by 최성환

2000년 연말, 서울 테헤란로.

당시 테헤란밸리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이름 아래 광기의 광맥처럼 타올랐다. IMF 사태 이후 급속히 위축된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정부 주도의 벤처 육성 드라이브는, 테헤란로를 전무후무한 투기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벤처기업, 사모펀드, IR대행사, 공직에서 막 내려온 관료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자금들이 한데 뒤섞였다. 사무실은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았고, PPT 슬라이드 몇 장이면 수십억 원이 오가는 투자가 순식간에 성사되곤 했다.

그 열기 속에서 한 벤처캐피탈 대표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정치자금이 사과상자에 담겨 움직였다면, 지금은 코스닥이라는 벤처 시장을 통해 지분 거래로 흘러가. 시장논리? 다 거짓말이지. 결국 정권 논리지.”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테헤란밸리의 본질을 꿰뚫는 결정적 문장으로 남았다.


도진의 시선은 과거 기사와 국회 자료, 공시 데이터에 꽂혀 있었다. 지금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흐름은 과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성지개발, 형신I&C, 삼경물산 같은 종목들은 이창명 후보 지지율이 높아지기 전부터 급등을 거듭하며, 동일한 패턴을 보여 왔다.

테마가 정해지고, 특정 세력이 매집을 시작하면 텔레그램 등을 통해 해당 정보가 확산됐고, 마지막엔 언론 보도가 그것을 정당화했다. 실적보다는 기대, 기업가치보다는 스토리, 펀더멘털보다는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시장을 움직였다.

도진은 직감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반복이었다. 유사한 테마, 유사한 수급, 유사한 키워드와 메시지, 그리고 유사한 브로커들의 움직임. 단지 등장인물의 얼굴과 기업의 로고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2000년의 테헤란밸리와 다르지 않았다.

과거 코스닥 시장이 벤처육성의 무대로 포장됐던 것처럼, 지금도 정책 수혜주 혹은 재건, 인프라, 수소 같은 각종 테마주들이 유사한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 당시엔 정보통신부가 주도했지만, 지금은 각 대선후보 캠프의 정치공약이 흐름을 주도하는 점만 다를 뿐 공공 프로젝트나 정치적 슬로건을 앞세운 종목의 등장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성지개발은 우크라이나 재건 관련 뉴스와 함께 급등했고, 형신I&C는 공공정책 수혜 기대감 속에 단기간 급등 랠리를 연출했다. 삼경물산은 국가 차원의 ‘탈플라스틱’ 로드맵을 수립하겠다는 정책공약과 맞물려 텔레그램 단골 종목으로 반복 등장하며 수상한 흐름을 보였다. 이들 주가는 모두 실적이나 자산가치보다는 스토리텔링으로 움직였고, 일정 구간 이후 급락하는 구조까지도 과거 작전주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도진은 2000년 『신동아』에 수록되었던 기사를 곱씹었다.

“형식은 엔젤투자, 내용은 주식상납….”

당시 김대중 정부는 벤처를 통해 실업을 해소하고 신성장동력을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벤처붐을 조장했다. 정부는 2005년까지 벤처기업 4만 개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부처마다 벤처 관련 예산이 대폭 편성됐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벤처기업들은 검증 없이 선정됐고, 벤처 확인서 발급은 곧 정치적 연줄의 상징이 되었다.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중소기업청, 과학기술부뿐 아니라, 문화관광부, 환경부, 농림부까지 벤처지원 정책을 남발했다.

그 결과, 정부는 벤처기업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민간 자금 조달은 정치적 인맥의 유무에 따라 극명히 갈렸고, 벤처 인증은 곧 상장에 이르는 패스포트가 됐다. 누가 인증을 받았는지는 곧 누가 권력을 쥐었는지를 의미했다. 창업 초기부터 관료 출신이 경영진에 합류하는 경우가 늘었고, 이들은 정부 자금과 공공기관 발주를 끌어오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IR대행사와 브로커들은 서울 여의도와 강남 사이를 오가며 벤처 기업들의 성장 스토리를 전파했고, 투자심사역들은 이미 내정된 물량을 포트폴리오에 끼워 넣는 데 급급했다. 상장 전 대량으로 확보된 주식은 공모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특정 인물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엔젤투자’라는 이름으로 무상 혹은 상징적 금액에 주식을 받은 정치권 인사들의 이름은 루머 속에 은밀히 돌았다.

당시 벤처캐피탈 업계에서 투자 판단의 기준은 성장성이 아니라 ‘권력과의 거리’였다. 누가 어떤 정치인의 동문인지, 어떤 정당 행사에 얼굴을 비췄는지가 중요한 지표였다. 한 유력 창투사의 심사역은 이렇게 회상했다.

“벤처기업의 비즈니스 모델보다, 대표이사의 술자리 네트워크가 더 중요했다.”

그 구조는 이미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인들은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관료들은 벤처기업으로 내려갔으며, 창투사는 그들의 이력과 인맥을 분석해 자금을 흘려보냈다. IR대행사는 스토리를 입히고 언론과 교감했으며, 사설 정보지는 이를 정제된 루머 형태로 가공해 시장의 기대를 부풀렸다. 고급 정보는 증권사 PB를 통해 VIP 고객에게 전달됐고, 공모 전 물량은 언제나 같은 손에 집중됐다.


그리고 지금, 도진이 조사하고 있는 시장에서도 유사한 연결고리가 감지되고 있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12조 원 규모의 대규모 추경 편성과 함께, 각 대선 후보들이 AI, 반도체, 인프라 투자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자 관련 종목들이 일제히 급등하기 시작했다. 건설, SOC, 데이터센터, AI, 로봇 등의 키워드를 단 종목에 수급이 집중됐고, 텔레그램을 통해 지라시가 퍼지며 테마는 순식간에 확산됐다.

놀랍게도 그중 상당수는 정치인 또는 고위 관료 출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기업이었고, “이번엔 다르다”는 스토리에 다시 한번 끌려들었다. 하지만 도진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데자뷔였다.

정부 주도의 대규모 예산, 정권 말기의 시장, 반복되는 테마와 브로커들의 설계된 움직임. 얼굴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도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그냥 투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한 거야. 시장 전체가 정권의 돈줄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는 노트북 메모장을 열고 타이핑했다.


·정권 말기 자금 동원

·벤처붐 재점화와 코스닥 띄우기

·IR대행사 – 창투자 – 브로커 – 정치인이 연결된 금융 네트워크

·공모 전 배정 물량 통한 비공식 자금화

·전관 출신 관료의 창업 이력과 상장 브릿지

·고급 정보의 비공식 유통 경로

·최근 급등한 건설, 인프라, AI, 지역화폐 관련 테마주


그는 문서를 저장하며 잠시 멈췄다. 지금 코스닥 시장은 과거보다 더 정교하고, 더 빠르고, 더 혼탁해졌다. 기술특례, 테슬라 상장 등의 이름으로 실적 없는 기업들이 계속 상장되고 있었고, 상장 후 수년이 지나도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종목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천문학적으로 부풀려진 채, 외국인은 매일같이 순매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 남아 있는 건 개미 투자자들과, 테마주를 주도하는 세력들뿐이다.

도진은 이 현실을 폭로하고 싶었다. 이대로 가면, 코스닥은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구조를 만든 자들,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추적할 제대로 된 단서가 필요했다.


그날 밤, 이승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이 섞여 있었다.

“최 대표, 아마 우리가 찾던 꼬리 하나를 잡은 것 같아.”

“어디서 말이죠?”

“예전에 말했던 M증권사 강민수 기억나지? 그 여자친구 박소은이 연락을 해왔어. 그녀가 최근 강남센터로 발령받았는데, 며칠 전 이태훈이 거길 다녀갔대.”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이태훈.”

도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직후, 지점장이 박소은한테 CFD 계좌를 하나 만들라고 지시했대.”

“CFD(차액결제계좌)요?”

“Contract for Difference. 실물 주식은 사지 않고, 가격 차익만 정산하는 파생계좌. 거래는 증권사 명의로 이뤄지고, 실소유주는 노출되지 않잖아. 지분 5% 넘게 사도 공시 의무가 없고, 매도 시점도 추적하기 힘들고.”

도진의 손끝이 떨렸다.

“맞아요. CFD를 이용해서 내부 자금을 우회시키면, 누가 매집했는지 숨기면서 투자가 가능하겠네요.”

“그렇지. 자금 출처는 이태훈이 관리하던 계좌 중 하나에서 이동시킬 거야. 실거래는 강남센터 명의 CFD 계좌를 통해 이뤄질 거고. 겉으로는 증권사 자체 운용처럼 보이겠지.”

도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머릿속엔 최근 급등한 종목들─ 성지개발, 형신I&C, 삼경물산의 거래 데이터가 스쳐 갔다. 이상할 만큼 일정한 거래 시간, 분할 매수 패턴, 그리고 비슷한 매매단가. 너무도 정교하고 익숙한 흔적이었다.

“이거야….”

도진이 중얼거렸다.

“누군가 익명성을 무기로 삼아 시장을 흔들고 있는 거야. CFD 계좌로 조용히 물량을 담고, 야금야금 주가를 올려 브로커들이 관심을 갖게 만들고, 텔레그램을 통해 그럴싸한 지라시를 만들어 돌리고….”

“그리고?” 이승민이 물었다.

“그리고 정부 정책 발표나 후보들의 공약이 언급되면, 바로 시세가 터지잖아요. 그러면 미리 매집했던 CFD 계좌에서 물량을 던지는 거죠. 얼마를 매집하든 공시되지 않고, 흔적도 흐릿하니까요.”

이승민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박소은이… 이상한 얘기를 하나 더 했어.”

“뭔데요?”

“그 CFD 계좌 말이야. 지점장이 그러더래. ‘이번 선거 끝나면 해제할 계좌’라고.”

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임시 계좌…?”

“그래. 브로커들이랑 연결된 자금이 들어와 있고, 선거 전까지 조용히 움직여야 한대. 지분 공시를 안 해도 되고, 레버리지는 최대한 당겨쓰고… 선거 끝나고 계좌 닫으면 기록은 사라지고.”

“CFD 계좌 자체가 원래 그런 걸 이용하는 것이잖아요. 명의는 증권사 이름이고, 실소유주는 안 드러나고요. 그리고 장내 매매가 아니라 파생거래라 공시 의무도 없고, 최대 10배까지 레버리지 당겨쓸 수 있고요.”

“그러니까… 단기간에 특정 종목 가격을 끌어올리고 털기에 최적인 거지.”

“선거용 작전주.” 도진이 낮게 말했다.

“이건 단순한 투기가 아니에요. 지금 이 구조, 과거 벤처 붐 때는 ‘엔젤투자’ 명목으로 주식을 나눠줬고 지금은 CFD로 돈을 숨기는 거죠. 코스닥을 띄워서 정치자금을 만드는 방식. 그때와 똑같아요.”

이승민은 잠시 침묵했다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추적해봐야겠네. CFD 계좌 속 자금 흐름. 그걸 잡으면, 이를 주도하는 사람도 잡을 수 있겠어.”

도진은 이승민의 말에 동의하며 통화를 마쳤다. 그의 눈빛은 이미 결의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이건 누가 만든 시나리오야.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시나리오의 한 장면 위에 서 있는 거고.’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시작이야. 이번엔, 제대로 해 보자.”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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