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도진은 커피잔을 책상 한쪽에 내려놓고 뉴스 앱을 넘기다 눈을 멈췄다.
“국내 1호 디지털헬스케어 기술특례 상장사도 ‘역사 속으로’”
국내 1호 디지털헬스케어 기술특례 상장사로 이름을 올린 ‘메디센트릭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만성적인 디지털헬스케어 사업 적자 끝에 최대주주가 바뀌었고, 흡수 합병 절차까지 마무리됐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 국내 성장성 특례 1호 바이오 기업이었던 ‘셀리버리’가 상장폐지로 정리매매에 들어간 가운데, 또 하나의 ‘1호’ 기업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는 즉시 전자공시시스템으로 들어가 관련 공시를 확인했다. 핵심은 간단했다. 메디센트릭스가 우주사업을 영위하는 스페이스코리아를 흡수 합병하는 방식. 합병 비율은 무려 1 대 164.6 즉, 스페이스코리아 1주당, 메디센트릭스 주식 164.6주를 교부하는 조건이었다.
도진은 잠시 모니터 앞에서 말을 잃었다.
‘이건 단순 흡수 합병이 아니야… 사실상 스페이스코리아 쪽이 상장 지위를 가져가는 우회상장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아.’
스페이스코리아 주주는 단 세 명. 그들이 합병 후 받는 신주는 무려 1,640만 주─. 이건 기존 발행주식의 75%에 달하는 규모였다. 도진은 합병 구조를 곱씹었다.
‘스페이스코리아 측이 실질 지배력을 단번에 확보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만약 이 구조를 그대로 추진하면, 거래소나 금감원에서 ‘우회상장 심사’에 들어갈 가능성도 배제 못 해. 기술특례 기업이기 때문에 특례 기한을 연장하려는 목적이라 무리하게 구조 짜는 거면 단속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도진의 입술이 떨렸다.
‘아니야. 어디선가 이 합병 위해 이미 하나하나 계산해 놓고 움직였겠지.’
합병 발표 직후 주가는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거래량은 소폭 늘었지만, 눈에 띄게 어디선가 특정 가격대에서 꾸준히 물량을 받아가고 있었다.
곧이어 일련의 공시들이 연속해서 터졌다.
15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 발행. 인수자는 ‘윈브릿지인베스트먼트’.
도진은 이 이름을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었다. 파인넥스트 파트너스의 과거 투자 이력을 추적할 때, 자주 함께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공동 투자자로 여러 차례 등장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며칠 후 이어진 또 다른 공시.
알루미늄 합금 전문제조사인 ‘OO소재’ 인수.
미국 우주항공기업과 192억 원 규모의 수출 계약 체결.
이 수치는 지난해 연매출의 750%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결정타는 M증권이었다. 증권가에서 보기 드물게 중소기업인 스페이스코리아에 대한 단독 기업 분석 보고서를 발간한 것이다. 보고서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차기 정부의 우주개발 공약과 민간 우주 투자 확대 계획으로 인한 수혜 예상”
도진은 눈썹을 찌푸렸다.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엔, 퍼즐 조각들이 너무 또렷하게 맞아떨어졌다. 합병 공시 – 대규모 수주 – 증권사 리포트 – 후보 공약.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프런트 러닝이야. 누군가 정책을 알기 전에 구조를 만들고, 정보를 흘려 주가를 의도적으로 올린 거야.”
그는 이승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기자님, 혹시 박소은 씨 연락 되나요? CFD 계좌 관련해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잠시 후, 이승민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타이밍이 묘하네. 나도 방금 박소은 씨랑 통화했거든.”
“무슨 일 있었나요?”
“며칠 전에 강민수한테 연락이 왔었다고 하더라고.”
“강민수가요? 지금 어디 있다고 하나요?”
“필리핀. 카지노에서 돈 다 잃고, 한국에도 못 들어온대. 파인넥스트랑 약속한 것이 있어서, 연말까지는 해외에 있어야 한다더라고.”
얼마 전 박소은은 낯선 해외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소은아, 나 민수야.”
목소리는 잠긴 듯, 기운이 빠져 있었다.
“오랜만이다. 강남센터로 옮겼다는 이야기 들었어. 잘 지내지?”
“응, 뭐… 그럭저럭. 그런데 너 목소리 왜 그래? 지금 어디야?”
“지금 필리핀이야. 벌써 몇 달 됐어.”
민수는 쓴웃음을 섞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여기 생활도 괜찮았는데,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놀다가 이제 돈도 다 떨어져 가. 약속한 게 있어서 연말까지 한국도 못 들어가는데.”
“무슨 약속?”
“지난번에 술 마시고 경찰서 갔던 거 기억하지? 그때 회사에서 내가 사채 빚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거 알고, 해결해주면서 연말까지 해외에 좀 나가 있으라고 했었거든.”
박소은은 순간 숨을 멈췄다.
“네가 뭘 알고 있길래 그래? 지점장이랑 관련된 일이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민수는 낮게 웃었다.
“결국 내 욕심에 이렇게 된 거지 뭐. CFD 계좌 관리만 안 했더라도….”
“뭐? CFD?”
박소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몰랐어. 지점장이 시키는 대로 계좌 만들고, 매매 입력하고, 가끔 종목 바뀌면 그대로 리밸런싱하고… 그냥 기관 고객 관리인 줄 알았어.”
“근데?”
“그런데 나중엔 이상하더라고. 이태훈이라는 사람이 다녀가면 지점장이 종목들을 교체하는데, 주가가 항상 오르더라고.”
박소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얼마 전 지점장이 개설하라고 지시한 CFD 계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너도 따라서 산 거야?”
“응. 몇 번 따라 들어갔지. 처음엔 진짜 돈이 되더라고. 하루에 몇백씩 버니까 눈이 돌아간 거지.”
민수의 말투는 지쳐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종목들이 급락하기 시작했어. 지점장이 관리하는 CFD 계좌는 종목당 수익률이 50%를 넘기면 기계적으로 분할매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사람 욕심이 끝이 없잖아. 내가 인생 베팅한 계좌는 매도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이렇게 된 거지.”
“그래서 필리핀으로?”
“내가 술 마시고 경찰서에 있을 때 파인넥스트 파트너스에서 어떻게 알고 나를 찾으러 왔어.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묻지도 않았고, 돈 문제 해결해줄 테니까 당분간 나가 있으라고 하더라고. 연말까지만 참으라고 하면서.”
박소은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민수야, 몸조리 잘하고,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게.”
“그래, 고마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한결 낫네.”
박소은은 전화를 끊은 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지난 몇 주간의 일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CFD 계좌와 관계된 인물들, 이태훈 대표, 강남센터 지점장, 그리고 강민수.
도진은 이승민에게 소은과 민수의 통화 내용을 전달받았다.
‘M증권 강남센터와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이들 관계가 의심스럽지만 물증이 없다. 강민수가 어떤 종목에 그렇게 확신을 가졌는지도 아직 밝혀진 바 없고, 안다고 하더라도, 이미 증거가 될 만한 계좌가 남아 있을 리 없을 것이다. 박소은이 새로 개설한 CFD 계좌의 매매정보만 알려준다면, 또는 강민수를 만날 수 있다면, 확실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필리핀 클락의 한 카지노 호텔. 강민수는 카지노 한편에서 흐릿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수신인은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법무팀장이었다.
“저… 저 기억하시죠? M증권 강남센터 강민수입니다.”
상대는 침묵했다.
“팀장님, 제가 CFD 계좌 매매 담당이었던 것 아시죠? 어느 종목, 수량, 시점 다 기억합니다. 이거, 만약 제가 어디 제보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겠죠?”
그 말은 협박이었다. 아니, 공포에 짓눌린 한 사내가 쥔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그는 이미 카지노에서 수천만 원을 날렸고, 현금도, 카드도, 친구도 모두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강민수는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이유는 ‘불법 체류자 신분과 마약 소지 혐의’였다.
그는 수갑을 찬 채로 끌려가며 반복해서 외쳤다.
“나는 마약 같은 거 안 해요. 이거 제 거 아니에요!”
하지만 소용없었다. 필리핀은 마약 범죄에 대해 극도로 엄격한 나라였다. 단순 소지 혐의만으로도 수개월간 구금되는 게 다반사였다. 강민수는 마약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확실히, 자신은 마약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혼란스러웠다.
‘누군가가… 나를 이 상황에 빠뜨린 거야!’
지금 이 일은 단순한 불운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CFD 계좌의 실체를 말하려고 했던 그 시점, 너무도 정교하고 빠르게 벌어진 일. 누군가, 그의 입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회의실. 모니터에는 ‘강민수 – 체포 경위 보고서’라는 제목의 문서가 떠 있었다. 법무팀장이 이태훈에게 해당 내용을 보고했다.
“필리핀 현지 경찰에 의해 체포됐습니다. 혐의는 마약 소지와 체류 신분 위반. 정황상 외부 개입 없이 석방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침묵을 깨고, 이태훈이 물었다.
“누구랑 접촉했는지 확인됐나?”
“예. 체포 전 한 달간의 통화기록을 추적해봤습니다. 경계해야 될 인물로 박소은이 있었습니다. 현재 M증권 강남센터에서 근무하는 강민수의 동기입니다.”
자료화면이 넘겨졌다. 박소은의 인사 정보와 재직 이력이 정리되어 있었다.
“지점장한테 연락했나?”
“현재 상황은 전달했습니다. 필요한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이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은 없어야 해. 박소은은 아무것도 몰라야 되고. 그리고 강민수 건은 여기서 끝이다. 다시 연락 오는 일 없도록.”
M증권 강남센터. 지점장은 박소은을 조용히 불러 사무실로 들였다.
“소은 씨, 이번에 새로 오픈한 CFD 계좌 말인데, 그건 부지점장이 직접 맡기로 했어. 소은 씨는 당분간 일반 관리계좌 위주로 맡아줘.”
박소은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점장은 사무실을 나가는 박소은을 붙잡고 물었다.
“소은 씨, 강민수 과장이랑 요즘도 연락해?”
박소은은 순간 망설였다. 지점장이 민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뇨,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오래됐어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그냥…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혹시 소은 씨랑은 연락하는가 했지.”
박소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날 밤, 그녀는 강민수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민수한테 최근에 전화 안 왔나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이 왔었는데, 이번 주는 조용하네. 원래 자주 연락하는 애는 아니지만….”
“그렇죠… 저도 좀 걱정돼서요. 별일 없겠죠?”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지난주에 민수가 돈을 좀 보내달라고 하길래, 보내줬거든. 해외 송금은 처음이라 잘 받았나 모르겠네. 연락이 없으니 괜히 마음이 쓰여.”
박소은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혹시 민수한테 연락 오면 저한테 전화 좀 달라고 전해주세요. 건강히 잘 지내시고요.”
“그래, 소은아. 너도 건강 조심하고… 고맙다. 이렇게 신경 써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