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무대 위의 약속

by 최성환

서울 상암동, 한 방송사 스튜디오. 해가 저물고 조명이 하나둘 켜질 무렵, 경선 토론회를 알리는 건물 외벽의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꼈다.

당내 대선 후보들이 처음으로 정면 승부를 벌이는 날. 언론과 후원자, 당원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 이창명은 속삭이듯 말하며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말이 아니라 철학을 보여줘야지….’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토론이 시작됐다.

“다음은 경제 부문과 관련한 이창명 후보의 모두 발언입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이창명은 준비한 원고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정치는 이상을 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정치는 가능성을 믿음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저는 이 도구를 나라의 미래를 위해 쓰고자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명료하게 이어졌다.

“저는,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시장을 만들겠습니다. 금융은 소수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됩니다. 거품에 올라탄 주식이 아니라, 실적에 뿌리 내린 기업이 빛나는 시장을 만들겠습니다.”

연설은 계획된 시간 안에 정확히 마무리됐다. 방청석 뒤편에선 작은 박수와 함께 당직자들이 속삭이며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교환했고, 정면엔 캠프 인사들이 진지하게 표정을 읽고 있었다.

그 무렵, 유정민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그는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가 빈 회의실로 들어섰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민아. 경선은 어때?” 도진이었다.

“경선이야 뭐. 후보님 지지층이 두터우니까 유지만 잘하면 될 것 같아. 무슨 일이야?”

“정민아 수요일 저녁에 시간 돼? 승민이 형이랑 잠깐 보자.”

“9시 넘어서 가능해. 그날 보자.”


경선 토론회가 있었던 월요일 저녁, 청담동의 한정식집. 외관은 소박했지만, 입장과 동시에 조용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가림막으로 완전히 분리된 룸 안, 나무 테이블 위엔 이미 맑은 육수와 전채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이창명은 문을 열고 들어서며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경선 끝나고 사람들이 안 놔주더군요.”

그를 맞이한 건 장민혁과 오늘 처음 자리한 이태훈.

이태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 말씀 인상 깊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하실 때마다 준비된 분이시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씀,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이창명과 유정민은 자리에 앉으며 이들과 눈을 맞췄다.

잠깐의 침묵 후,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삼겹살 구이에 묵은지, 미역초무침이 잔잔하게 식탁을 채우는 동안 대화는 의례적인 화제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조용히 소주 한 병이 비워지고 나서, 장민혁이 본론을 꺼냈다.

“대표님, 오늘 이태훈 대표를 모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거자금 문제는 늘 민감한 사안이지만, 저희는 투명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태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저희가 운용 중인 투자조합 몇 곳에서 후보님의 정책연구기관과 연계된 법인에 공식 후원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에 등록된 NPO(비영리조직, Non Profit Organization)를 통해 정당 후원 계좌로 입금되도록 정리해뒀습니다. 법적으로 전혀 하자 없고, 세무 처리도 완벽하게 됩니다. 이제 대선도 치르셔야 할 텐데, 후원금 모집만으론 어려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좋은 뜻으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창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술을 조금 따랐다.

“요즘 같은 시기엔 아군이 많을수록 좋지요. 전투도 사람과 돈으로 치르는 것이니까요.”

정민은 별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이태훈은 말을 이었다.

“사실 기업들 입장에서도 후보님처럼 ‘시장 친화적’인 메시지를 내는 분께 힘을 보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당장 규제 완화나 세제 개편 같은 걸 언급하지 않더라도, 후보님의 어조와 방향성만으로도 시장은 반응합니다.”

이창명은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

“저는 시장과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시장이 국민과 함께 가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죠.”

그 말에 최근 캠프에 합류한 장민혁이 거들었다.

“맞습니다. 저희 보좌진들도 그 점을 늘 공감하고 있습니다. 또, 이태훈 대표와 함께 일하는 기업들도 다들 그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선거지만, 그 이후의 국정 운영까지 보고 있다는 뜻이죠.”

그 말에 정민의 손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마치 그 한 문장이, 이 자리를 마련한 목적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는 듯이.

이태훈은 정민을 향해 잔을 들며 말했다.

“유정민 보좌관이 계셔서, 캠프가 안정적으로 돌아간다는 얘길 장민혁 실장에게서 자주 듣습니다. 이런 자리에 오기 전에 캠프 분위기를 살필 수밖에 없는데… 이번엔 따로 물어볼 필요도 없더군요.”

정민은 잔을 들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다.

짧은 침묵 뒤, 이창명 후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거는 단기 승부지만, 정치는 결국 끝없이 연결되는 것이지요. 이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겠습니다.”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식탁 위의 대화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날 밤의 약속은 깊고도 묵직하게 각자의 가슴에 남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수요일 늦은 저녁, 삼청동의 한옥 카페. 작은 방 안에는 도진, 승민, 정민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창가 쪽으로 물방울이 느릿하게 흐르고, 커피의 쓴 향이 잔잔히 퍼졌다.

이승민이 노트북 화면을 정민 쪽으로 돌렸다. 모니터에는 한 인물의 인사이동 이력과 법인 등기부등본 몇 장이 정리돼 있었다.

“우리가 최근에 잡은 흐름이 하나 있어.”

도진이 노트북 화면을 같이 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말했던 시장의 왜곡─ 특정 제도들이 주식시장의 고평가를 조장하고, 거기서 반복적으로 이익을 챙기는 구조. 그 흐름이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조직화된 수익 모델로 굴러가고 있다는 실체를 드디어 하나 포착한 것 같아.”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의 한 이름을 가리켰다.

“이태훈.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인 파인넥스트 파트너스의 대표. 그 중심에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태훈이야. 파인넥스트 파트너스가 이렇게 급속히 성장한 덴 다 이유가 있었어.”

유정민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태훈?”

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거래소 상장심사부에 있었고, 퇴직 후 파인넥스트 파트너스 총괄이사로 부임했어. 지금은 대표로 있고. 이태훈은 법을 어기지 않았어. 그 대신, 법의 틈을 정확히 계산해서 자신한테 유리한 구조를 만들었지. 상장 심사 원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퇴직 후에는 그 경력을 제대로 활용한 것 같아.”

정민은 말없이 도진의 눈을 바라봤다.

“시장의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서 정교하게 이익을 창출해온 구조야. 그 제도를 만들 수도 있었고, 이를 따라 하는 다른 세력들도 존재했겠지.”

정민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이스코리아?”

“맞아. 얼마 전 스페이스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코스닥에 우회상장했어.” 도진이 말을 이었다.

“이 회사는 원래 ‘스페이스엔’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위성부품 업체였어. 대전에서 카이스트 출신들이 모여 만들었고, 거의 실적 없이 존재만 유지하던 법인이었지. 그런데 이 회사가 올해 갑자기 메디센트릭스와 합병을 발표했어.”

정민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상장폐지 위기였던 메디센트릭스?”

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합병이 이상했던 건, 원래 신규 상장회사의 실체를 보여줘야 하는데, 192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해외 공급계약을 체결하면서 거래 상대방을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공시했을뿐더러, 해당 매출이 어떤 제품을 통해 이뤄지는지도 불명확하더라고. 전년도 메디센트릭스 매출의 7배에 달하는 규모인데 말이야.”

정민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상장폐지에 몰린 기업이 다행히 합병할 회사를 찾았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게 아니야.” 도진은 화면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스페이스코리아의 주요 주주 중에 김상묵이라는 이름이 있었어. 카이스트 교수 출신, 우주항공학 논문도 여러 편 썼고, 기술 특허도 보유하고 있지. 겉으론 흠잡을 데 없어. 문제는─그가 한국거래소 기술특례 상장 심사 자문역이었다는 거야.”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

“자문역이었어?”

“응. 기술성 평가 위원단에 참여했더라고. 비상장 기업들이 실적 없이 코스닥에 상장하려면 기술평가를 통과해야 하잖아. 그 자리에 김상묵이 있었어. 그리고 우리가 확보한 내부 문건을 보면, 그 자문단 구성 추천자 중에 이태훈 이름이 있어.”

정민은 아무 말 없이 노트북을 바라봤다. 이젠 놀람보단, 정리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태훈이 김상묵을 거래소 자문단에 앉혔고, 그 김상묵이 나중에 스페이스코리아의 주요 주주가 됐다?”

정민의 말에 도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합병 공시 직후 신주 배정으로 김상묵 포함 3인이 지분 70%를 확보했어. 그리고 자금 흐름은, 윈브릿지인베스트먼트에서 전환사채로 합병 자금을 조달해줬는데, 과거 투자 이력을 살펴보니까 이태훈이 대표로 있는 파인넥스트 파트너스와 공동 투자한 기업들이 꽤 되더라고. 우리가 추적한 지난 3년간의 투자조합 리스트를 보면, 두 운용사 이름이 여러 번 겹치지. 그리고 마지막, M증권. 이 합병 발표 직후에, 이례적으로 상세한 기업분석 리포트를 냈어. 원래 이런 케이스는 애널리스트가 잘 안 건드리는데, 지금 보면… 누군가 압력을 준 게 아닌가 생각돼.”

이승민은 이런 말까지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M증권 강남센터에 근무했던 강민수에 대한 취재 내용까지 설명했다.

정민은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카페의 조용한 음악이 유독 크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내가 월요일 저녁에 만난 그 ‘이태훈’이라는 사람. 그가, 이 모든 구조의 중심이라는 건가.’

하지만 정민은 그 자리에서 도진과 승민에게 이태훈을 만났다는 얘길 꺼낼 수 없었다. 이태훈은 자신이 모시는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기로 약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소개한 지인 장민혁이 캠프 내부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다. 정민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도진이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밝히려고 했던 한국 주식시장의 왜곡, 그걸 가능하게 했던 제도와 사람, 그리고 그 틈을 노린 세력─ 그 실체 중 하나를 지금 처음으로 알아낸 거야.”

그는 정민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이건… 이창명 후보가 말했던 ‘공정한 금융시장’을 정말 만들고 싶다면─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야.”

정민은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얼굴로 커피잔을 바라보다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공정한 시장…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가 모시는 후보는 분명 그렇게 약속했다. 소수만을 위한 금융이 아닌, 모두를 위한 시장.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약속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 안에 이태훈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정민에게 지독한 불협화음으로 들렸다. 그 이름은 그저 외부 인사가 아니었다. 월요일 저녁, 식탁 건너편에서 웃으며 잔을 들었던 남자. 그리고 그를 캠프 안으로 불러들인 인물은 지금도 중요한 전략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내가 이걸 말하면… 캠프가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민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숙인 채, 차를 들어 한 모금 삼켰다. 그는 조용히 눈을 들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그 말만 남기고, 정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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