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누구를 위한 숫자인가?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정적이 이어지다 누군가 손을 든다. 중년 남성, 금융시장국 소속. 명찰엔 남지호라고 적혀 있다.
“발표, 정말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다만… 하나 현실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지금 말씀하신 구조적 문제들─ 저희도 내부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미 제도권에서 수년간 정착돼온 방식들이잖아요. 그걸 바꾼다는 건 결국, 거래소나 금융위가 지금까지 운영하던 기준과 정책이 잘못됐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일인데… 과연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잠시 정적을 두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저도 그 점을 누구보다 많이 고민해왔습니다.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말을 업계 안팎에서 수도 없이 들었거든요.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구조를 바꾼다는 건─ 결국 그 구조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니까요. 누구도 쉽사리 그런 고백을 하진 않겠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문제를 고치기 위해선 먼저 그 문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정책 실패를 감추는 게 익숙한 방식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시장이 더 빨라졌고, 투자자들은 더 냉정해졌습니다. 개인투자자들의 해외증시로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도 한국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거래소나 금융위가 우리 주가지수에 대한 개편에 나선다면, 그건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도진은 눈을 들어 청중을 바라본다.
“진짜 위험한 건 잘못된 기준을 고수하면서도, 모두가 ‘이건 괜찮다’고 고개를 돌리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바꾸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입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세미나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도진은 눈치챘다. 그건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지금까지 그 구조 안에 있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무거움이었다는 것을. 한국은행 또한 제도권의 한 축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이번 사안을 두고 자책이 섞인 침묵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세미나가 정리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빠져나가는 와중, 남지호 팀장이 조용히 도진을 따라 나왔다.
“오늘 발표, 진심으로 잘 들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저희도 검토해보겠습니다. 거래소 쪽에도 의견서 형식으로 제안을 한번 시도해볼 생각이고요.”
그는 명함을 건네면서 말했다.
“언제 식사나 한번 하시죠. 이렇게 피가 도는 얘기를 들은 건 오랜만이라….”
도진은 고개를 숙이며 명함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날 저녁, 정민에게 연락이 왔다. 메시지였다.
“세미나는 어땠어? 분위기 괜찮았어?”
도진이 “의외로 조용했어. 근데 진지했어.”라고 답을 보내자, 곧바로 정민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한국은행이 뭐, 강제력 있는 기관은 아니잖아. 그런데 거기 학자들이 많아서, 이런 내용 한번 파고들기 시작하면 확실히 반영되는 경우가 많아.”
잠시 뜸을 들이던 정민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도 우리 캠프 경제전략실에 관련 내용 검토 요청해볼게. 500만 개인투자자 잡을 좋은 공약이 될 것 같거든.”
도진은 잠시 정민의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스크롤을 멈추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오늘 하루, 시장의 가장 깊은 구조 어딘가에 작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