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글로벌 스탠다드

by 최성환

도진은 이승민 기자의 전화를 받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장 안정성 확보가 최우선’

거래소는 그렇게 입장을 정리했다. 그 말은 결국 ‘현 상태 유지’를 선언한 것이었다.


서울 세종대로, 남대문 근처의 한 중식당. 금융시장국 남지호 팀장과의 점심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남지호는 단정한 셔츠와 다소 마른 인상이었다. 게살 수프를 숟가락으로 저으며 그가 말했다.

“거래소 쪽 분위기는 전해 들으셨죠?”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거래소에서 발표한 보도자료 내용도 알고 계시죠? 예상은 했지만 빠르네요.”

남지호가 조용히 말했다.

“거래소가 직접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거긴 그 구조에서 이익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한국거래소 1년 순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4,000억 원이 넘어요. 2023년에는 거의 5,000억 원에 달했다니까요.”

“그래서 결국 이런 건, 금융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지호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이어 말했다.

“금융위가 가만있을까요? 생각해보세요. 거래소도, 예탁원도, 금융투자협회도 다 산하기관이에요. 말이 좋아 ‘자율 규제 기관’이지, 한국거래소나 예탁결제원 같은 곳은 금융위 승인 없이는 인사도 예산도 못 움직입니다. 그런데 또 웃긴 건, 금융위는 그걸 단순히 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시장 전체를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까지 하고 있어요. 결국, 감독기관이라기보다, 실질적인 관할 정부부처인 셈이죠. 거기다….”

도진이 대신 말했다.

“…금피아.”

남지호는 쓰게 웃었다.

“네. 정년퇴임 한 고위 공무원들, 금융위 출신들이 거래소 상임고문, 자산운용사 감사, 협회 자문으로 다 흘러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상장 심사 구조, 지수 운영 체계 등 모든 곳에 관여했고요. 절대 바꾸려 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지금 구조를 다 자기들이 만든 거거든요. 바꾸는 순간, 자기 경력이 부정되는 셈이니까요.”

도진은 말없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국내 금융 시스템의 핵심에 있는 사람도 이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전….”

남지호가 조용히 말했다.

“당장은 바꾸겠다는 말보다 ‘이건 시장 전체를 위한 정비 작업’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누군가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이게 시스템 리셋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겁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시스템만 바꾸려는 게 아닙니다.”

남지호가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도진을 바라봤다.

“이런 시스템이 왜 계속 잘못 만들어지는지, 그 원인을 먼저 봐야 다시는 비슷한 구조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게 뭐죠?”

남 팀장이 물었다.

도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남 팀장님, 골프 좋아하시나요?”

“좋아하긴 합니다. 근데 시간이 없어서 필드는 자주 못 나갑니다.”

“제가 미국에서 MBA할 때, 집 주변에 가까운 골프장들이 많아서 골프를 자주 쳤는데요. 미국인들과 시합을 해 보면… 스코어 카드에 풀 스코어를 다 적더라고요.


스크린샷 2025-12-19 092225.png


예를 들어 파4에서 보기를 하면 우리는 1오버니까 ‘1’이라고 적지만, 그들은 ‘5’라고 씁니다. 처음엔 그게 불편해 보였어요. 그런데요,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고요. 그게 정확한 기록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숫자. 숨기지 않고, 줄이지 않고, 해당 홀이 파4인지, 파5인지 몰라도 그 홀에서 몇 타를 쳤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게 시스템을 신뢰하게 만드는 기본값이더라고요. 근데 한국은….”

도진이 말을 이었다.

“빨리빨리, 대충대충, 적당히 넘어가기. 골프뿐만 아니라, 시장도, 제도도, 숫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도리’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기준을 외면해왔어요. 예전엔 단일민족이라는 이유를 들며 우리들만의 규칙이 통했죠. 정해진 규칙이 없어도 그냥 끼리끼리 알아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글로벌화의 발목을 잡고 있어요.”

남지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말을 이어갔다.

“MP3 플레이어로 유명했던 ‘아이리버’ 기억하세요? 그때 전 세계가 한국 전자제품에 놀랐습니다. 싸이월드도 마찬가지예요. 페이스북보다 먼저 나왔고, 아바타와 타임라인까지 다 있었죠. 그런데 왜 망했을까요?”

남지호가 답했다.

“지나치게 내수 위주로만 가서?”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는 내수 시장에 사로잡혀서 생태계라는 것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아이리버는 MP3 디바이스만 좋은 디자인과 품질로 싸게 생산하려고 했습니다. 소비자들은 여기에 넣을 음원을 모두 불법 다운로드로 받아 넣었지요. 하지만 아이팟은 아이튠즈라는 음원 생태계를 만들어 창작자와 소비자를 연결했습니다. 싸이월드 또한, 한국에서만 통하는 UX였고, 글로벌화를 위한 최소한의 공용 언어조차 없었어요. 결국… 우리는 시스템을 ‘글로벌 기준’으로 만들 줄을 몰랐던 겁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지수 문제, 상장제도 문제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남지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지수를 고치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숫자’를 어떻게 다뤄왔는가부터 고쳐야 한다는 말이군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숫자는 정직해야 하니까요. 숫자를 마음대로 다루기 시작하면, 그 시스템은 누구에게도 신뢰받을 수 없습니다.”


남지호는 도진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향하는 도중 최근에 있었던 참사가 떠올랐다. 2024년 12월, 방콕발 제주항공 여객기가 무안국제공항 착륙을 시도하던 중, 조류 충돌로 엔진 하나가 꺼졌다. 긴급 동체착륙을 시도했지만, 활주로 끝단까지 기체가 미끄러지며 정면의 콘크리트 장벽에 충돌해 기체가 반파됐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건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콘크리트 장벽 위에는 항공기가 활주로 중앙으로 정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로컬라이저(Localizer)라는 레이더 장비가 있었는데, 국제 기준대로라면 충격 흡수가 가능한 파손형 구조물 위에 설치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몇 년 전 기상악화로 시설물 손실이 반복되면서 콘크리트로 재설치한 정황이 밝혀졌다.

‘우리는 또, 글로벌 표준을 편의에 맞게 바꿨다. 그리고 그 대가는… 대규모 인명 사고였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또한 비슷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장면이 도진의 말과 겹쳐졌다. 지수 산정, 상장 제도, 기술특례… 하나같이 ‘우리가 만든 규칙’으로 굴러가는 체계. 그 안에서 시장은 멀쩡한 척 버젓이 운영되고 있고, 그 결과는… 언젠가 한순간에 참사로 이어질 것이다.

국제 기준을 ‘우리식으로 바꾸는 것’이 능력이라 여겼던, 오래된 환상. ‘우리 시장은 특수하니까’라는 말로 회피해온 지난 20년간의 관성. 남지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앱에 두 줄을 적었다.


편의를 기준으로 삼으면, 구조는 무너진다.

글로벌 기준이 불편하다고 밀어낸다면, 그 대가는 결국 국민이 치르게 된다.


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조용히 메모장을 닫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 금 연재
이전 05화3장. 민감한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