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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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고 온몸이 추위에 약해진 기분을 느꼈다. 나는 우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우산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고. 비를 피하는 게 아니라 바람결을 따라 빗줄기가 흩날리던 그 순간을 계속 즐길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비가 내렸던 어느 과거를 회상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김밥을 사러 들어갔던 편의점에서 김밥 대신 물과 우산을 사서 나왔던 날을 기억했다. 그토록 당연했던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쓴다는 것은.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났다고 느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덮고 있는 겉옷의 크기가 자신이 입었을 때에 비해 두 배는 족히 커 보였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 설주림.
설주림, 설주림.... 나는 그 이름을 몇 번 반복해서 말했다. 제 딴에는 이름을 외우기 위한 필사적인 발악이었다.
-너는?
설주림이 유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민우는 눈을 크게 떴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유민우.
설주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어딘가 닮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점도, 나를 재밌게 한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그녀한테는 시간개념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시린 추위에 아침 일찍 일어난 나와는 달리 설주림은 정오가 다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길고 긴 잠을 잤다. 그러다 설주림이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면 그녀를 따라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길을 걸으면 뒤따라 걷다가 낡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쉬면 따라 쉬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아기새들이 엄마새를 따라가듯이 말이다. 다리를 쭉 뻗고 벤치에 앉은 설주림이 하품을 했다. 그녀를 너무 예의주시하고 있던 나머지 하마터면 하품까지 따라 할 뻔했다. 나는 몸이 찌뿌둥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설주림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버스정류장 건너편을 따라 바라보다가 일순간 시선이 유민우를 향했다. 유민우의 배에서 꼬르륵,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밥을 안 먹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던 유민우의 습관이 어디 쉽게 사라질까.
-그나저나 설주림, 너 밥은 안 먹는 거야?
-응, 안 먹어.
그녀가 왜 그렇게 말랐는지 알 것 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설주림에게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뒤쪽을 향해 달렸다. 버스정류장 근처라면 작은 마을이라도 하나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뛰다 보니 저 멀리 작은 골동품 가게가 보였다. 주인장은 따스한 햇볕을 쬐다가 선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나무 문이 가게 외관을 쏙 닮아 있었다. 삐걱대는 소리 때문에 조용히 들어가는 일이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코를 고는 주인장이 뒤로 자빠질 것처럼 목을 꺾어댔다.
무사히 진입한 가게 안은 먼지가 가득했다. 목이 간지러워도 간신히 기침을 참았다. 입을 틀어막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먹을만한 것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찰나 작은 초콜릿이 든 라틴 바구니가 보였다. 그 초콜릿들을 뚫린 주머니에 전부 찔러 넣었다. 외투부터 바지 주머니까지 볼록 튀어나온 채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헨젤처럼 달리다가 초콜릿을 떨어트릴 새라 조심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에 세숫대야에 과일을 팔고 있는 할매가 있었다. 할매는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변함없이 앉아있었다. 난 비쩍 마른 설주림을 떠올리고 할매한테 가까이 다가갔다. 입을 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작게 말하면 안 들리겠지?
-할매! 과일 파는 거야?
-예끼 인석아, 귀 떨어지겠다!
할매가 방기욱의 팔을 치며 그보다 더 큰 목청으로 답했다. 그는 대답하며 때리는 건 어느 쪽 할매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역에서 노숙하던 할매도 자신의 팔을 그렇게 때렸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난 피식 웃었다.
-이 초콜릿이랑 사과 하나랑 바꾸는 거 어때? 물물교환 같은 거, 알지?
할매의 눈이 커졌다. 이제야 눈이 떠진 건지, 커진 건지 알 길은 없었다.
-물물교환도 값이 맞는 것끼리 하는 게지!!
할매는 그렇게 말하며 또 팔을 때렸다. 이제는 슬슬 짜증도 났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주머니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한 뭉텅이 더 꺼냈다. 딱 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전부 털었다.
-이게 전부야.
할매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손에 있는 초콜릿을 전부 가져가더니 사과 한 개와 바꿔주었다.
-잘 있어, 할매!
나는 하나밖에 없는 사과를 옷에 깨끗이 닦으며 달렸다. 저 멀리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설주림과 유민우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손에 든 빨간 사과를 보고 설주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잠시만.
나는 사과를 두 조각으로 쪼갰다. 그리고 절반을 설주림에게 건넸다. 설주림은 조심히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머지 반은 다시 반으로 쪼갰다.
-배고프면 말을 하지 그랬냐.
나는 유민우에게 절반으로 자른 반쪽짜리 사과를 던져주며 말했다.
-… 배고픈 건 아니었어. 배가 제멋대로 소리를 낸 거지.
-그거나, 그거나.
사과를 씹느라 우물대며 말했다. 아주아주 단 사과였다. 분명 초콜릿 한 움큼의 값을 했다. 느지막한 오후에 출발했더니 사과를 다 먹을 때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오늘 밤에 잘 곳을 찾던 중 익숙한 역 입구를 발견했다.
-이런 곳에도 역이 있구나.
설주림이 신기한 듯 말했다. 나는 유민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다 유민우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여긴 노숙자가 많아서 잘 곳이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설주림은 그렇게 사람이 많냐며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한 번 들어가 보자는 설주림의 말에 유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심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둘을 따라 들어갔다. 기다란 입구 길을 따라 노숙자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늘어선 노숙자들 근처에는 파리가 앵앵 거리기도 하고, 갈라진 머리를 틀어 올린 자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싸한 시선에 왼쪽을 쳐다보았다.
-야 이놈아!!!
목에 손수건을 세 개나 두른 할매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방기욱의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또 왔네!
유민우가 할매를 막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설주림도 이내 나서서 유민우를 도왔다.
-야 이놈아! 또 저놈이 니를 여로 끌고 온 거제?
할매는 그렇게 말하며 또 달려왔다. 나는 도망치며 소리쳤다.
-아,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