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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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했다. 날 때부터 가지라고 떠밀어준 안식처 따위는 없다. 애초에 안식처가 필요한가? 세상 사람들이 가족만큼 중요한 건 없다길래 가족 없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가족 행세를 좀 했다. 부모나 자식 같은 따분한 역할을 정하는 건 절대 금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고 쓸데없는 게 그런 역할놀이었다.
처음에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생각에 귀찮았고, 함께하며 물자를 나누다가 싸우는 게 지쳤다. 점점 질렸고 흥미를 잃어갔다. 왜 다들 가족 같은 게 필요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안식처가 가족이라는 것도 다 설교에 불과했다.
자주 만나는 녀석들도 하나같이 재미없다. 아, 유민우라면 좀 재밌을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다른 애들과 다르게 돌아갈 집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나를 따라다니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유민우에게 도둑질을 가르쳤을 때 그 녀석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요즘 나의 낙이라면, 유민우의 그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을 찾는 것이었다. 가끔 성질을 돋우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 남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날 바라보는 건 이제 아무렇지 않다. 유민우가 바라보는 시선은 좀 다르다. 딱 사람 열받게 하는 표정이다.
나는 편의점에 들러 검은 우산을 하나 사고 알바생한테 전화를 빌렸다. 주저 없이 전화번호를 눌렀고,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연결되었다.
-유민우, 비싼 술 하나 훔쳐와라.
-지...
뚝. 유민우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시키면 당연히 할 테니까. 용건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돌려주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야야, 방기욱 왔다.
-기욱아 왔어?
대충 손을 흔들고 시멘트 자루 위에 앉았다. 자루 위로 흩날리는 가루에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아 씨발. 밤새 놀 거라니까 장소를 뭐 이딴 곳으로 했냐?
-그게, 오늘 밤에 비가 온다길래...
-맞은편이 존나 밝잖아. 가로등 어제 니가 바꿨냐?
정혜련이 특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야 쳐 웃으면서 기대지 마.
나는 정혜련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팔짱 낀 손을 뺐다. 그리고 불을 붙일 때부터 짧았던 담배를 바닥에 떨구고 지르밟았다.
아, 재미없다. 유민우나 빨리 왔으면.
나는 뒤로 드러누워 하늘에 뜬 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별은 징그럽게 분포되어 있었고 너무 과하게 밝았다. 나는 오른 팔로 눈을 덮어버렸다.
-쟤 유민우 아니야?
-기욱아 너 또 유민우 불렀어?
정혜련이 짜증을 내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유민우의 손에는 값비싼 술 상자가 안겨져 있었다.
-역시 넌 해낼 줄 알았어, 새끼야.
유민우라면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는 언제나 한결같이 예상을 벗어났다. 아주 어릴 적부터 변함없던 사실이었다. 벗어난 예상 밖에서 유민우는 늘 나를 자극했다. 유민우랑 함께라면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자신의 아버지 술창고에서 술을 훔쳐온 유민우를 당분간은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거봐. 해보니까 별 거 없지?
나는 유민우가 기특하여 과격하게 어깨에 손을 걸쳤다. 유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부답인 유민우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유민우의 품속에 있는 상자에서 술을 꺼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는 모르지만 까는 방법은 잘 알았다. 코르크를 뽑아내고 한 모금 마셨다.
-다들 마셔!
하나 둘 술을 마시더니 취한 듯이 비틀대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방기욱은 유민우에게 술을 권유했으나 늘 그렇듯이 거절당했다.
-시시하긴.
유민우 이 자식이 오늘 제대로 사고 칠 줄 알았더라면 나도 어디서 비싼 안주라도 훔쳐오는 건데.
솨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밤이 무르익어갈 때쯤 알록달록한 골목 사이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뭐야, 짭새야?
아니었다. 몸집이 왜소한 한 여자였다.
-귀신 아니야?!
정혜련은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귀신으로 오해할 만한 꼴이었다. 비에 쫄딱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비쩍 바른 것이 자칫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그리고 나는 발견했다. 유민우가 짜증 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듯,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깐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괜히 시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 여자한테 반했냐?
유민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한 번 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민우를 골목 쪽으로 밀었다.
-고백이라도 하지 그래.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모두 큭큭 웃으며 자지러졌다. 재밌는 꼴을 보겠다고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유민우는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그 여자의 가까이로 향했다. 그러자 여자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모두들 그 장면을 즐기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빗소리 때문에 하나도 안 들리네.
나는 조금 더 골목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역시 대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유민우를 보는데 왠지 평소와는 달랐다. 유민우가 무슨 짓을 할지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나뒹굴던 검은 우산을 쓰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슨 말소리라도 들려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놈의 빗소리가 문제라고 방기욱은 생각 했다. 여자가 눈치챌 만큼 가까이 다 달아서야 유민우의 표정도 보였다. 이를 꽉 깨문 유민우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저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건가?
-반가워.
나는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서 보니 꽤 어려 보였다. 얼굴 이곳저곳에 먼지가 묻어있고 몸이 성한 곳이 없어 보였으나 분위기가 거칠지 않았다. 그러나 순간 여자의 얼굴에 비소가 올라왔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이 무얼 뜻하는지 알 길은 없었으나 달가운 미소는 아니었다. 나는 본능에 이끌려 금방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발을 뗐다.
-하지 마.
그 순간 유민우가 나를 막아섰다. 분명히 유민우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유민우가 자신을 막아서니 더욱 재밌어졌다. 그 지점에서 무엇보다 여자한테 흥미가 생겼다.
여자는 기죽은 내색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민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와 함께라면 이전까지의 재미보다 두 배는 즐거울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지금의 지루한 일상에서 탈피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머릿속을 강렬히 지배했다.
-어디로 가?
-그건 왜?
쉬운 게 하나도 없는 여자네, 그렇게 생각했다. 빌빌대지도 않고 상황이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따라 가게. 얘랑 같이.
나는 눈짓으로 유민우를 가리켰다. 유민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여자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우산을 씌워주었다.
-너 재밌어. 같이 있으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풉....... 아하하!!!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볼이 패인 여자가 비틀대며 웃었다. 우산을 씌워준 호의가 무색하게 반경을 넓히며 웃었다. 이 웃음은 아까의 비소만큼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그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오늘 처음 본 저 여자가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취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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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웃었더니 골이 울릴 정도로 띵하다. 우산을 든 남자가 날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는 알까? 내가 머지않아 동상으로 생을 마감하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짜릿하게 울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눈앞의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와 같이 소나기를 맞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나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움츠리고 있다. 비에 젖은 파란 셔츠가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고 어딘가 위축된 모습이다. 우산을 든 남자가 오기 전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나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지녔구나. 그 나약한 마음을 끈질긴 생명이 막았구나. 그렇게, 체념했구나. 그는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그의 말과 몸짓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반면, 우산을 든 남자는 머리가 참 보송했다. 젖지 않은 앞머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우산 덕분인 걸까, 보송한 머리를 지키기 위해 열심인 걸까.
-목적지는 없어. 죽기 좋은 곳이 어디일지 찾을 뿐이야.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뭘 알았다는 거지?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의 말에는 기어이 나를 따라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내 앞에 선 그들은 덩치가 큰 무서운 어른들과 다르게 골격이 미완성인 소년에 가깝게 보였다.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던 위압감과 역한 기분이 그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오거나 말거나, 사실 이 와중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난 그저 그들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가로등 아래에서 비를 맞으면 내가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것이 싫었다. 얇고 가는데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그것들이 자꾸 나를 찌르는 것만 같아서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나를 감싸 안고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눈을 감고 양팔을 움켜쥐며 세상이 날 보듬어주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흘러도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
톡. 바닥에 무언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아도 어두워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역시 너랑 같이 가면 재밌는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니까? 이것 봐. 고작 몇 분 사이에 내 인생이 부정당하고 있다고!
우산을 들고 있어야 할 남자가 길쭉한 팔을 하늘로 뻗었다가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그 자리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보인다.
느끼고 있는 걸까. 무엇이 당신이 비를 그리 느끼도록 만드는 걸까. 가벼운 듯 무거운 비가 어떻게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닐까. 맑은 하늘 아래서 비를 맞는 것과 새카맣게 물든 하늘 속에서 비를 맞는 것조차도, 목적지에 따라서도, 사소한 일상에서 비가 가지는 상징은 다른데. 당신은 어떤 감정일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