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언포러 크루

by 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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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포러 크루는 대개 이른 새벽에 작업을 시작하고, 해가 중천에 뜨면 다시 아지트로 돌아왔다가 늦은 저녁에 남은 작업을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작업을 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에 대체로 사람이 없을 시간에, 빠르면 이틀 내로 그림을 완성하고 또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았다. 장소를 찾는 동안은 작업할 때와 반대로 사람들이 많은 시간에 활동했다. 장소를 찾을 땐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미리 생각하고 그 의미에 걸맞은 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처음 그들을 따라나설 때까지도 나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주림이 위험한 일에 말려드는 게 걸려서 언포러 크루원들과 동행했을 뿐이다. 남세혁의 도발에 넘어간 것은 인정하겠다. 제법 꼴사나운 표정으로 ‘네가 어디 한 번 해보던가’라고 말하는 게 내 심기를 건드렸다. 텅 빈 벽을 마주하고 서니 오래간만에 모든 것이 가로막힌 기분에 잠식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더라. 무엇을 하고 싶었더라.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을 그리고 싶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평소에는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지루해도 새로운 걸 구태여 찾지 않았다. 어느 누구의 눈에 지나치게 띄는 것도 피해왔다. 유민우와 함께라면 가끔 재밌는 일도 일어나고.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루한 평일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짧은 주말만 기다리며 버티고 또 버티면서. 그런데 설주림을 만나고 나서는 불안하고 새로운 것들이-물론 그 사이에 익숙한 사람과 배경이 내 시간을 비집고 들어오기도 했지만- 한 가득이었다. 처음은 즐거웠고 그다음은 불편했다. 잃을 게 없던 때와 비교하면 나는 이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함께 나눈 시간도, 나조차도 말이다. 설주림을 만나기 전 내 삶은 이제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대뇌의 해마에서 설주림이 있는 한 달이 내 앞선 삶의 기억 양을 훌쩍 뛰어넘었다.


어떤 그림을 만들어야 남세혁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지 생각하는 건 그만둔 지 오래였다. 애초에 이 정도로 깊이 생각하는 게 얼마 만이더라. 할 수만 있다면 열이 오른 뇌를 잠시 꺼내 찬바람을 쐬게 하고 싶었다. 설주림이 초콜릿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잠시 뒤를 돌아 설주림을 보았다. 잠깐 얼굴을 보면 뭐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뇌에서 타오르던 열이 피부 넘어까지 올라선 것일까? 나는 차가운 손을 뺨에 얹었다. 그때 무언가 번뜩 떠올라 영종이 형의 검은색 락카를 빼앗아 정 가운데 일직선을 그렸다. 선의 꼭대기 왼편에 휘어진 나선을 그렸다. 그러나 이다음이 문제였다. 선의 끝에서 조금 떨어진 아래에 웃는 입을 닮은 원만한 호를 따라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상하네. 왜 자꾸 흘러내리지? 나는 팔짱을 끼고 뭐가 문제일지 고민했다. 그때 영종이 형이 내 그림을 보고 웃었다. 내가 째려보자 살짝 뒷걸음질 치더니 다가와서 내 그림을 손봐주었다.


-이거 우산이지?


영종이 형은 두꺼운 붓을 검정 페인트에 담갔다가 빼고 페인트 양을 적절히 덜어낸 다음 락카가 흘러내린 부분을 덧칠했다. 그제야 제법 내가 의도한 모양새가 갖춰졌다. 나는 형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이제 가자고 말했다. 고민하느라 너무 시간이 지체된 탓에 제대로 완성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날 밤 12시를 넘어가기 직전인 야심한 밤에 다시 터널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두워서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경험을 살려 작지만 강한 랜턴도 챙겼다. 그리고 나는 영종이 형한테 제발 대신 운전해 달라고 말했다. 남세현의 운전실력은 토가 나올 만큼 영 아니었다. 그가 모는 트럭 뒤에 다시 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영종이 형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으니 운전경험도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터널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유민우와 낮에 겪은 -속을 다 게워내는- 일을 다시 경험해야 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문제는 운전자가 아니라 비포장도로가 범인인가?


나는 뒤집어진 우산 위로 내리는 비를 표현하기 위해 회색 스프레이를 뿌렸다. 회색 비는 기이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내 눈에는 매우 만족스러운 낭만 분위기로 느껴졌지만 말이다. 우리는 랜턴을 세워두고 밤을 새 가며 그림을 그렸다. 고민하고 또 그려내고 표현했다. 크루원들과 함께 일출도 구경했다. 나른한 오후에 미리 잠을 보충하고 나왔기에 졸리진 않았다. 해가 하늘에 정착하고 우리도 슬슬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완성한 그림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거칠게 완성된 그림이었다.


나는 왼쪽을 바라보았다. 유민우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유민우가 그렇게 해맑게 웃는 표정을 본 적은 정말 아주 오랜만이었다. 늘 공허한 눈과 씁쓸한 입꼬리로 웃었는데. 난 그 시선을 따라 벽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이었다. 맑고 부드러운 하늘에 폭신한 구름이 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뒤를 돌아 설주림 그림을 보았다. 보자마자 모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설주림은 우리가 기차역 언덕에서 보았던 풍경을 똑같이 재현해 놓았다. 개가 짖던 집 지붕을 노란색으로 색칠한 것까지 아주 똑같았다. 그때 언덕에서 보았던 경치가 담긴 그림은 내게 설렘을 안겨주었다. 설주림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건네고 싶게 만들었고 웃다가 그 속으로 빠져 죽어도 모를 만큼 좋았다. 난 설주림이 그때 언덕 아래의 경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것처럼 그 그림을 지긋이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자주, 다양한 곳을 누비며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다가 그 앞에 누워 다 같이 잠들었고, 어떤 날은 나의 수준급인 모닥불 피우기 실력을 자랑했다. 쉬는 날은 아지트에서 언포러 크루 탄생기를 듣기도 했다. 물론 설주림은 열심히 들었으나 나는 지루해서 듣던 도중 잠에 들기 일쑤였다. 기억나는 건 딱 두 개뿐이었다. 남세현이 미국에서 미술 공부를 하다가 귀국 후 본격적으로 그라피티를 시작한 것과 영종이 형은 솔로 라이터였다가 형의 그림이 정일환 눈에 밟혀 스카우트를 당했다는 것.


오늘도 다른 날과 같이 그림 그릴 곳을 몰색하던 중이었다.


-그냥 아무 데나 빈 곳에 그리면 되는데 꼭 이렇게 일을 벌인다니까.


-넌 항상 잘 따라오면서 불만이 많더라.


평소 같았으면 설주림을 아지트에 혼자 두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 집단이 여간 편해진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래봤자 영종이 형과 단둘이 정찰하지 않았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이제 주변 지리도 익숙해졌고, 그 많던 벽에 언포러 크루 마크인 무지개도 잔뜩 있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나는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지개 마크가 달린 그림 위로 새로운 그림이 덧그려져 있었다.


-아…. 이제 여기도 다른 그라피티 크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나 보네. 장소는 한정적인데 그리려는 사람은 많아지니, 당연한 수순이야.


영종이 형은 다른 사람의 그림을 덮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 때문에 그라피티 크루들 간의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슬슬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나도 저번에 봐 둔 곳이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해도 지고 이제 곧 여덟 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형과 아지트로 돌아왔다. 락카를 챙기던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 분주한 대화가 스쳐가고 있었다. 영종이 형이 정일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재료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더라고. 아무래도 창고를 한 번 보강할 필요가 있겠어.


-10시쯤이면 근처 큰 차량정비소가 문을 닫을 거야. 그곳에 스프레이가 있을 테니 내가 다녀올게.


남세현은 정일환에게 애들 밥 좀 챙겨줘,라고 전했다. 정일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멈추고 입을 열었다.


-쇼핑센터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아무리 시골 차량정비소라고 해도 저번에 주인아저씨한테 발각됐던 게 좀 걸리는데.


-이번에 그 쇼핑센터에 CCTV를 달았대. 둘 중 한 곳을 고르라면 차라리 개인정비소가 나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한 남세현은 훔친 락카를 담을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가방은 남세현의 등의 절반만 차지할 정도로 작고 가벼웠다. 앞으로 맬 수도 있어서 물건을 훔치기 용이해 보였다.


-잠시만요. 지금 장비를 훔치겠다는 거예요?


유민우는 남세현의 팔을 잡고 말했다. 남세현은 유민우에게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경찰한테 잡히기라도 하면…


나는 조용히 유민우의 팔을 잡았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가다간 자칫 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옆에서 눈을 감고 대화를 엿듣고 있던 정일환이 입을 열었다.


-훔치지 않은 스프레이를 사용한다면 그건 진정한 그라피티 라이터가 아니에요.


남세현은 입을 비죽 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그렇다네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놈의 진정한 그라피티 라이터. 슬슬 진절머리가 났다. 유민우도 할 말을 잃었다. 분위기상 이 크루를 만든 사람이 남세현이라면 운영의 중심축은 정일환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길에 그들만의 철학이 있음은 당연지사였다. 그것은 아주 단단하고 질기게 뭉쳐져 있어서 고작 우리 따위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그간 저희 때문에 재료도 빨리 줄어들고 숙식도 제공해 주셨는걸요.


설주림이 말했다. 그 말에 목이 꺾어져라 고개를 돌린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니었다. 남세현은 위험하니 함께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 말했다. 그러나 설주림은 단호했다. 그가 자신을 말리리란 걸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다. 나도 그녀를 말렸지만 내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얄궂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것이 나의 숙명임을, 내 선택임을 알고 있기에 한탄이 절로 나왔다.


-저도 같이 가요.


그때 유민우의 목소리가 복잡한 머릿속을 뚫고 들어왔다.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나 하나가 아니었다. 남세현은 너까지 왜 그러냐는 원망의 눈초리를 날렸다. 유민우의 발언으로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장이 꼬인 것처럼 뇌가 뒤죽박죽 섞여 깨질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질끈 잡았다가 풀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는 생각하고 행동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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