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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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유민우를 구하러 갈 거야.
한참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설주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설주림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울었다. 쉼 없이 울었다. 숨은 잘 쉬고 있는 건지, 그 속에서 공기가 부족하진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땅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표정에는 앞선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단단한 결심이 서 있었다.
그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소중했다. 지나가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웃기지. 이런 순간에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스스로가 싫어진다. 이런 마음을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감정이 내게 생소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녀가 유민우를 구하러 가겠다고 했을 때 난 쓴 미소를 뗬다. 그녀가 한 말에 나는 없었다. 유민우와 설주림 자신만이 있었다. 내가 같이 가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한편에 내가 없다는 것이 씁쓸하게 다가오다가도 난 그녀에게 그러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설주림을 좋아하는 걸까. 질투와 밀당으로 가득한 사랑 말고 그 사람을 위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런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가 갖지 못해서 끓어오르는 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내비치던 짜증, 그런 것들이 그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그 시발점은 모른다. 계속해서 시간이 지나가도 아마 나는 모를 것이다.
-유민우 집이 어딘지 알아.
우리는 지나가던 소형 트럭 뒤에 숨어 버스 터미널까지 이동했다. 이름도 모를 터미널에 내려 상주로 가는 가장 빠른 버스표를 끊었다. 각대봉투는 설주림의 품에 고이 맡기고 바짓춤에서 꺼낸 쭈글쭈글한 만 원짜리 몇 장을 조심히 꺼내 안내원에게 건넸다. 남은 돈으로 편의점에서 구운 계란과 오렌지 주스를 사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설주림에게 다가갔다.
-먹어. 먹어야 힘이 나지. 뭘 하려든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야.
설주림은 내 손에 들린 계란과 주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은 건조하고 공허했다.
-그러고 보니 넌 항상 내 밥을 챙기네.
-...... 계란 좋잖아. 여행하는 느낌도 들고.
구운 계란이 손에 딱 들어오는 감각이 묘하게 중독적이다. 반들반들한 겉면을 톡 하고 깨어 서로 사이좋게 계란을 나눠 먹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버스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흔들리는 것이 마치 파도를 타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었더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쳤다. 따갑다가도 호통치는 것 같은 버스의 바람이 썩 나쁘진 않다. 마치 얼굴에 무겁게 내려앉는 숙제들 같았다. 앞에서 춥다는 불평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바람을 맞았다. 설주림이 몸을 웅크리고 팔을 모을 때 즈음 난 창문을 닫았다. 새카만 밤하늘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창밖엔 풍경이랄 게 없었다.
우리는 한밤중에 버스에서 내렸다. 터미널 정문에 꼿꼿이 서 있는 시계탑을 보니 벌써 12시 50분이었다. 우리는 걷고 걸었다. 향수병이 돋으려는 조짐이 보일 때면 난 목적만 생각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인지, 내 일행이 누구인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조금씩 주변이 낯설어진다.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나무와 식물들, 싹이 마른 꽃봉오리가 고개를 들면 설주림이 했던 말들을 자꾸 반복하게 되었다. 아름답다, 예쁘다 같은 이상적인 말들을. 어찌 보면 그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나뿐인 거 같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어떤 다짐을 되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드시 회복해야만 한다, 돌아가야 한다. 그녀와 함께 한 시간들로 만들어진 지금의 나를 설주림은 보지 않는다. 그녀는 현재를 부정하고 또 혐오한다. 그녀의 시간은 과거에 멈췄다.
오래 걷지 않아 거대한 저택을 발견했다. 10년 전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자택은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난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과 거리가 멀 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대로 바라본 적도 드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꼭대기에 달린 조그만 창문을 바라보았다. 딱 한 번 이곳에서 유민우가 울고 있는 표정을 본 적이 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민우의 얼굴에는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나는 유민우가 했던 말들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서 나오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유일하게 감시가 소홀한 곳이니까.'
분명 그 이후에 또 어떤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유심히 듣지 않았던 그때의 나를 원망했다.
'차고지… 아버지 방…'
아버지 방으로 이어진 차고지. 유일하게 아버지 방에서 차고지로 갈 수 있다던 통로. 그곳만이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곳이라고, 분명 유민우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발을 움직였다. 차고지는 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차는 없었다.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차고지의 벽을 두들겨보았다. 텅 빈 공간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커다란 벽을 이리저리 만졌다. 내 모습을 바라보던 설주림이 벽을 그대로 왼쪽으로 밀어버렸다.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리는 설주림의 손과 함께 그 거대하던 벽이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더 어마어마한 광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유명한 외제차 브랜드가 적어도 모두 한 대씩은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차고지의 다섯 배는 되는 널찍한 공간을 스포츠카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처럼 보이는 건 딱 두 곳뿐이었는데 한 곳은 새하얀 문이었고 또 다른 문은 많이 낡아 보이는 문이었다. 난 그 앞에 멈춰 섰다.
-이쪽으로.
그때 설주림이 허름한 문에 달린 금장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문 너머에는 계단이 있었다. 난 그녀에게 어떻게 안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앞이 어두운데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서며 답했다.
-유민우 아버지라는 사람, 결벽증이 있는 것 같아. 우리한테 돈 봉투를 건네고 난 다음에도 손수건으로 자기 손을 박박 닦더라고.
적어도 10년은 살았을 이곳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문이라면 당연히 허름한 문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더러운 문을 드나들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좁은 등이 조금은 든든하게 느껴졌다. 한참 계단을 오르자 벽이 하나 나왔다. 어두운 탓에 그게 벽인지 문인지 모르고 한참을 더듬었다. 벽 너머에서 어떤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벽에 귀를 대고 섰다.
-내가 그 문은 건들지 말라고 했지! 양 비서님 같으면 남이 건든 거 또 쓰겠어요?
마치 크레셴도처럼 커지던 목소리가 잠깐 조용해졌다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들려왔다.
-균 옮는다고. 고작 그 더러운 균에 감염이라도 돼서 앞으로 내 일 년치 계획이 무너지게 아프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알아들어?
탁탁, 일정하게 발을 굴리던 소리가 멈추고 벽 건너편에 있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꼼짝 말고 자리 지켜.
남자의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높은 확률로 이 벽을 열 것이다. 이대로 들키면 우리는 끝이었다. 나는 설주림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설주림을 품으로 당겨 안아 오른쪽으로 붙었다. 그때 우리가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강렬한 빛이 들어왔다. 절반 정도 열린 벽 사이로 한 남자가 씩씩대며 계단 아래로 급하게 내려갔다. 설주림은 그 틈을 타 빛 속으로 들어갔다.
난 한참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오래 멈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감상 아주 긴 호흡을 하고 있었다. 심장박동 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오고 씩씩대는 남자가 뒤로 지나가도 등에 남은 세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던 반면 품에 안긴 설주림의 체온, 숨소리, 그리고 또르르 굴러가는 그녀의 눈동자 소리까지도 매우 선명하게 내 신경세포를 자극했다. 공간을 울리는 남자의 발소리가 흐릿해질 때쯤 설주림이 먼저 나의 품에서 벗어나 벽 너머로 향했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그 온기가 너무도 따뜻해서 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사늘해진 공기에 가시가 돋아 재빨리 그곳을 피했다.
층고가 높은 천장에 따뜻한 빛을 품은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내가 걸어온 방향을 바라보니 우리가 있던 이 방 너머의 공간은 책장 뒤편이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서 영화라도 많이 본 모양이었다. 나와 설주림은 문에 기대어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회장님 비상호출로 이 층에 있던 모든 관리인들이 다급하게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문을 슬쩍 열어 밖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후 살금살금 이동했다. 움직이다 말고 나는 창문 앞에 멈춰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쯤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였어. 작고 동그란 창문이 이 위쯤에 있었는데.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양쪽 복도 가장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왼쪽에는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장식품이 떡하니 있었는데, 그 모양새는 돼지를 닮아 있었다. 황금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는 그 돼지는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고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괴상한 장식품을 누군가 사긴 하는구나, 싶었다. 설주림은 그것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마침내 진주목걸이를 두른 황금돼지의 코를 비틀었다. 그러자 장식품 뒤로 문이 열렸고 우린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고작 몇 계단을 오르니 슬며시 한 공간이 드러났다. 그 옥탑방은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낀 듯이 먼지가 흩날렸다. 새벽의 푸른빛이 작고 동그란 창문에 번졌다. 그 구석에 세상을 잃은 표정을 한 남자가 보였다. 드디어 유민우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