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동연쇄납치사건

by 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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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주림이 가져온 명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명함은 마치 얇고 연약한 동아줄 같았다. 그 줄이 나를 도와주겠노라 믿고 잡는 순간 후두둑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제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이리저리 실험해본다 해도 난 끝내 그것이 날 도와주리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어떤 소득도 없이 시간은 흘러 나와 유민우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문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철창살을 부수고 나갈 수 있는 완벽한 계획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불이 다 꺼지고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꼿꼿하게 앉아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야심한 밤에 무섭게 왜 그러고 가만히 앉아 있어? 죽을 결심이라도 한 거야?


나는 뒤를 돌아 남황민을 쳐다보았다. 달빛에 비춰 소름돋게 빛나는 눈을 마주한 남황민은 당황하다니 미친놈, 이라며 돌아 누웠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죽을 생각이면 말아라.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냐. 누구라고 있고 싶어서 있겠어.

남황민의 말에 번뜩이는 묘책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것을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다음날 해가 뜨고 또다시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짐을 나르며 남황민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이곳을 탈출하자.


내가 언제부터 확실한 것을 좋아했던가. 인생은 모 아니면 도.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경찰보다는 이쪽에 모든 걸 걸고 판 뒤집을 생각을 하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기이한 두근거림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설주림을 생각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묵직하게 운동하는 가슴의 떨림.


남황민은 큰소리로 웃었다. 나이도 어린 보초한테 조용히 하라는 한 소리를 듣고 나서도 여전히 목청만은 좋았다. 내 제안은 그에게 그저 허황된 꿈일 뿐이라고 느껴졌다. 혹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졌던가.


-원해서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잖아. 그렇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어떤 방법으로 이곳을 나가? 네가 아무리 대단한 방법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절대 못 나가.


남황민의 얼굴에서 씁쓸함을 읽었다. 이전에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구나, 그리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무거운 포대자루를 오른쪽 어깨에 얹으며 물었다.


-...실패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죽었어. 쥐도새도 모르게. 가족들은 유골을 찾았으려나.


담담하게 말하며 걸어가는 남황민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이 등에 가득 묻어났다. 그렇다. 이곳에서 탈출한다는 계획은 단순한 어린애들 놀음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런 묵직한 결심이었다. 남황민의 말에 잊고 있던 현실에 맞은 느낌이다. 누구보다도 가볍게 여겼던 내 목숨이 언제부터 잃기 싫어졌을까. 지나가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복 입은 어린 여자애가 내게 단명할 목숨이라고, 목숨을 부지하려면 꼭 소중한 사람을 찾으라고. 그땐 그냥 쪼그만 여자애가 별 소름돋는 소리를 다 한다며 뺵빽 소리를 질러댔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 또한 내 운명이라던 그 여자애가 문득 지금 이 순간 떠오른 것이었다.


남황민이 저 멀리 무거운 포대자루를 바닥에 두고 다시 이쪽으로 걸어온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서워? 죽을까봐?


남황민이 눈썹 한 쪽을 치켜 떴다. 신경이 곤두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이때다 싶어 말을 계속 이었다.


-누가 그러더라고. 내가 단명할 운명이래. 그땐 별 생각이 없었거든. 오히려 이딴 인생 기왕이면 빨리 끝내지 뭐, 그랬거든. 근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원래 인간들은 보통 그런가? 나를 위해서 산다기보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거야?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한쪽 어깨에 짐을 실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이른 아침부터 터덜터덜 걸어나가던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강하게 양쪽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황민을 따라 걸어갔다.


-가족이 있어.


남황민은 목이 메인 듯 울렁이는 목구멍에 입을 닫았다. 그리고 어깨 가득 쌓인 하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아내가 있고, 뱃속에 아이가 하나 있는데. ...아니지. 이제는 아내의 품속에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요람에 있으려나.


남황민은 다시 또 걸어가더니 갑자기 멈추고 뒤를 돌았다.


-보고 싶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위로를 해본 적이 있던가, 공감을 해준 적이 있던가. 그것들을 모두 차치하고 나는 내 가슴을 꽉 쥐었다. 이런 게 할멈, 할배들이 말하던 가슴아픔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남황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흐르는 눈물까지 훔치진 못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사이 남황민이 내게 말했다.


-내가 왜 힘차게 일하고, 웃고, 여전히 열심히 운동하고 농담도 던지면서 사는지 아냐?


-글쎄.


남황민은 그래, 그렇겠지, 라며 피식 웃었다.


-내 가족들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때가 오면 열심히 일하고 가꿔온 멋진 남편이자 아빠로 아내와 아이를 마주하기 위해서지.


나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소중하고, 애처롭고, 미워하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런걸 사랑한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 근데 그 사람이 여기 있어.


남황민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언젠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없어. 아니 애초에 희망 따위 가지지 않아. 내가 무엇도 안 하면 변하지 않아.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딱 한 가지가 바로 그거야. 내가 가만히 있으면 무시 당하고 밟히고 결국 질뿐이었어. 이기기 위해서는 나도 누군가를 차고 짓밟아야 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남황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나가야 해. 아니, 함께 나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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