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연쇄납치사건
>>>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칠 전에 기욱이가 해준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며 떠나질 않았다.
-불을 지를 거야, 도박장에. 같은 방 사람들이 도와주기로 했어. 시간이 모자라. 얼마 뒤면 지금까지 쌓아온 물량이 대거 수출되는 날 이래. 그날이라면 모두 분주할 테고, 경비 태세가 조금 허술해지겠지. 그 틈을 타면 돼. 최대한 큰 불을 내려면 연소시킬만한 재료들을 많이 모아두어야 할 거야. 재료는 우리가 옮기는 포대자루로 충분하겠지.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하루에 한 개씩 빼돌리면 한 번에 5개, 일주일이면 35개가 되겠지. 문제는 이 많은 것을 어디에 숨기느냐인데...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눈알사탕을 떠올렸다. 도박장이라면 아주 낮은 곳부터 천천히 타들어가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갈수록 불길을 거세질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겠다며 기욱이를 안심시켰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 얘기를 꺼내려고만 하면 입술 사이에 껌이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정말로 말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눈알사탕을 불렀지만 그녀가 나를 바라보자 난 쓸데없는 말들로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렇게 잠 못 이룬 밤이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그녀에게 이 말을 선뜻 꺼내기 쉽지 않은 이유는 많고도 셌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유일한 쾌락, 행복, 기쁨이 모두 담긴 그곳에 불을 지른다는 것이었다. 재가 되어 텅 빌 그 공간을 마주할 눈알사탕의 한쪽 눈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내가 앗아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처음 집을 나오던 날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바닥을 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해도, 설상가상 차에 치여 죽더라도 그 순간의 해방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다시 미묘한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소중함이라는 다면적인 감정이 가슴 한 편을 따스히 지키게 되었다. 잃을 게 없던 그때의 내가 그립지 않지만 지금의 내가 달갑지도 않았다. 한껏 복잡해진 머릿속이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방의 한 구석에서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자 눈알사탕이 내게 다가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 그늘 아래에서 나는 눈알사탕의 그림자가 더 길어지고 커지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느꼈다.
-뭔데. 말해봐.
눈알사탕이 무릎을 접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남주도 시츄도 영재도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요즘 표정이 별로야! 그렇게 자주 인상을 찌푸리면 눈가에 주름 생기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뜯던 손톱만 만지작 거렸다.
-말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불편한 얘기인 거지?
남주는 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름을 나누는 건 제게 두려운 시작이에요.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마음속에는 영원히 남는데 제 곁은 간혹, 아니 줄곧 떠나더라고요. 그러면 그 이름들이 있던 마음 한편이 비어요. 텅 비어서 차가운 바람이 통하는데 바람이 닿을 때마다 시려요. 그래서 그것이 익숙해지면 그곳을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채우지 않으려 해요. 상처는 시간이 지나 딱지가 앉았고 일부러 들어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가명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었어요.
눈알사탕은 내가 얘기를 시작하자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눈이 새초롬해지며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원래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는 스타일이었나?
그러나 나는 얘기하면 할수록, 내 속마음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 얘기를 이렇게 길고 솔직하게 얘기한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래서 두려워요. 내가 여러분의 지금의 생활을 무너뜨릴까 봐. 겨우내 자리 잡은 단단한 마음들에 내가 기름이라도 부을까 봐.
그만 말해야 하는데, 그만 드러내야 하는데. 한 번 시작한 실토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할수록 복잡했던 머릿속도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개운해지고 시야가 맑아지고 그들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깨닫게 된다. 고작 며칠 사이 그들은 내게 소중해졌다. 아니 그들은 원래 그들 자체로 소중했다. 이기적인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면 선택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나는 존중해야 한다. 만약 의견이 다르더라도 난 내게 더욱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킨다.
-제게 여러분처럼 소중한 사람이 있어요. 가족 같은 두 사람.
가족 같은 두 사람이라는 말에 술렁인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전달하려는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눈을 감고 꼭 전해야 할 말을 입에 담는다.
-이곳을 나갈 겁니다. 탈출할 거예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내 선언에 허공을 떠돌던 소음이 일제히 멈춘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한다.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흐른 정적이 아주 긴 호흡처럼 느껴졌다. 고요한 숨을 작은 구멍으로 내뱉으며 영점 몇 초간을 다투는 긴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 순간 얼어붙은 공기의 흐름은 단박에 깨졌다.
-계획은 있고?
남주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계획. 나는 기욱이가 말했던 계획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턱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남주가 말을 꺼냈다.
-불만 지르면 끝이 아니잖아. 사람들이 혼비백산이 된 틈을 타서 나가려면 출구를 알아야지. 어느 경로로 탈출할지를 알아야 계획이 안 꼬여. 그리고 불은 한 군데에만 지르면 번지는 속도가 느려.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게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물었다.
-정말, 이렇게 쉽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도와달라며. 나도 슬슬 이곳이 질릴 때였어. 이제 나갈 때도 됐지. 근데 나도 너를 이용하는 거야. 그니까 너도 나 실컷 이용해 먹어라.
남주는 그렇게 말하고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나는 남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특히 눈알사탕에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알사탕은 내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난 좋아!! 여기서 일하는 것보다야 밖에서 예쁜 옷 입고 놀러 다니는 게 훨씬 좋지!
-나, 나한테 다 무, 물어봐. 머리는 내, 내가 제일 좋으니까...!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홀로 창문 앞에 선 눈알사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알사탕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말했다.
-나는 원래도 몸과 마음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었어. 폭식증, 우울증, 도박까지. 네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이곳에서의 생활도 그냥저냥 할만하다고 생각했어. 도박할 시간도 따로 내주지, 숙식도 해결되지. 근데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멋진 동료를 잃고 싶을 정도는 아니더라고. 항상 누군가를 원망하기만 했는데.... 고맙다.
눈알사탕은 내 팔을 가볍게 톡 쳤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결정에 탈출 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날 밤 도박장에는 기욱이와 민우, 나, 그리고 눈알사탕이 모였다. 그 외의 사람들은 원래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갑자기 자주 온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2개가 있어요. 첫째는 불을 지필 포대자루들을 모아둘 장소의 마련, 두 번째는 남주의 말대로 도주 경로. 이 중에서 첫 번째 장소는 불을 지를 곳과 가까운 곳이면 좋을 텐데...
-포대자루를 쌓아둘 공간은 나한테 맡겨. 어차피 도박장에서 불을 지를 계획이라면 그곳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눈알사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남주의 말대로라면 도박장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를 또 모색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곳 위치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건 나한테 맡겨. 여기 지리를 꽤나 잘 아는 사람이 있거든.
기욱이가 말했다. 민우도 기욱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느 날 방화를 저지를 것인지.
-포대자루가 어느 정도 모이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릴 거야. 그리고 그것을 적당한 곳에 옮기는 시간도 필요하지.
기욱이의 말에 눈알사탕이 열흘 뒤에 초과근무 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분명 그날이 물건 출하 당일일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날은 고위직책자들이 오전부터 납품 문제로 정신없을 것이니 제격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 오늘로부터 열흘 뒤, 그날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