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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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조사실 앞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있는 내게 송연수 형사가 따뜻한 꿀차를 건네고 옆에 앉았다. 따뜻한 무언가를 전해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는 많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아마 형사님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르고 고르느라 선뜻 대화를 시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 또한 이미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기 때문에 또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기엔 문득 대화가 너무 단조롭다. 그리고 다시 또 정적이 찾아올 것이 명백했다.
-고마워.
서로 말을 고르느라 고요함이 배경을 지배할 때쯤 형사님이 꺼낸 말은 의외의 단어였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던 선택지 중에 고맙다는 말이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자 형사님은 아, 하고는 말을 더 이었다.
-그, 명함을 잘 써줘서 고맙다구.
아, 명함.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한동안 정적이 길어졌다. 나는 형사님이 건네주셨던 꿀차를 호로록 마셨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내 물음에 송연수 형사는 어떤 말을 해도 될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잠깐 바닥재의 무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나를 마주 보고 말했다.
-네가 신고한 건 우리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미제사건의 해답이었어. 그 미제사건이 바로 연쇄실종사건이야.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드물게 젊은 청소년, 청년들까지 사라졌어. 수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대중없고 실종자들 사이의 공통점도 크게 없었지.
처음 형사님을 만나게 되던 날, 우리를 연쇄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 미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 작은 시골 동네로 발령받았다고 했다.
-단 하나, 마약을 제외하고 말이야. 그러나 마약사건은 담당 부서가 따로 있는데 협조가 어려웠고,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었지.
나는 기욱이가 말해주었던 게 떠올랐다. 우리가 갇혀있던 그 공장이 사실은 마약공장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리니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아마 이렇게 큰 사건에 도움이 된 너희들이니 기사에도 나올 거고, 뉴스에서도 난리일 거야.
형사님은 그 말을 하며 나의 안중을 살폈다.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기사와 뉴스 같은 곳에 내가 나올 것을 생각하니 더 어색했다. 그리고 불안이 엄습했다. 만약 마약공장의 최고 관여자인 유민철이 민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민우가 받을 비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둥, 나였으면 그냥 돈 많은 아빠 밑에서 얌전히 있었겠다는 둥의 말들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이 사건에서 아예 너희 존재를 지워낼 수도 있어.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말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주실 수 있어요?
-물론이지.
나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결연한 표정과 환한 미소가 믿음직스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열정이 미더웠다.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수사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참고인 조사가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워낙 인원수가 많았어서... 중간에 도망을 친 사람들도 많았고. 그래서 그동안 머무를 수 있는 호텔을 마련해 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가 모두 끝나면, 어디로 갈 거야?
송연수 형사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면서 지낸다고 해도, 일주일이 지난 뒤에는 어디로 가야 하지. 내가 무엇을 위해 계속 움직였던 걸까. 그 본질을 고민해보게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기욱이와 민우만 있다면 어디로 가도 상관없단 것이었다. 놀랄 정도로 친밀해진 애정 어린 관계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욕망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 절망적이었던 그때, 내가 찾아 헤매던 것. 머릿속에서 풍경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고요를 찾아 이 여정을 계속 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오두막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을 떠올렸다.
난 하동의 한 작은 호스피스에서 일을 했단다.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 취직한 내가 그곳을 때려치우고 처음 마음을 움직인 선택지였지. 그곳은 즐거웠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어.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지….
-호스피스를 하나 찾아주세요.
내 말에 형사님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모름지기 호스피스의 사전적 정의는 ‘죽음이 가까운 환자를 입원시켜 위안과 안락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특수 병원’이었다.
-오두막 할아버지가 머물렀던 하동의 작은 호스피스를 찾고 있어요.
그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야. 유유히 퍼지는 풀내음과 바람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몸을 뉘어 보이는 잡초들까지. 멜로디가 기가 막힌 새소리로 아침잠을 이겨내는 일도 드물지 않았지. 함께 했던 자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추억처럼 남아있는 게 내 가슴 한편을 후벼 파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곳을 다시 발견했으니 내 평생의 운을 다 쓴 것이 분명해.
왠지 그곳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생각, 아니, 확신이 들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일주일 사이에 송연수 형사는 하동의 몇 안 되는 호스피스를 찾아보았고, 내게 위치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치와 사진만으로 특정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직접 가서 호스피스 관계인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형사님은 이번 주 주말에 함께 후보지를 돌아보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토요일에 민우, 기욱이와 함께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고, 평일 내내 조사에 성실히 임했다. 민우를 알게 된 경로, 유민철을 만난 이야기, 공장에서 벌어진 소동과 사건들, 내부 형태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주말이 되었다. 호텔에서 도보도 3분도 채 걸리지 않아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송연수 형사뿐만 아니라 한 남자가 더 있었다. 기욱이는 그 남자를 보더니 윽, 하고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음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와.
나는 송연수 형사님께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옆의 남자를 자신의 사수인 장형준 형사라고 소개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장형준 형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기욱이와도 아주 친해 보였다. 대화하는 내용은 주로 장형준 형사의 말에 단답 하는 기욱이의 구조가 계속 반복될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중 하나를 예를 들어 보이자면, 장형준 형사가 먼저 창밖의 나무를 가리키며 영문을 모르겠는 추억 얘기를 꺼내자 기욱이는 몰라, 기억 안 나, 하고 정면을 주시한 채 말했다. 쉴 새 없이 말하는 장형준 형사를 향해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하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기욱이에게 많이 컸다며 팔로 기욱이의 목을 조르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뒷자리에 가운데 껴 있었던 민우만 허리 아프게 계속 몸을 접고 있어야 했다. 민우에게 괜찮냐고 물으면 웃으며 재밌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순서대로 몇 군데를 둘러보며 호스피스 직원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실패를 거듭하며 모두 조금씩 지쳐갔다. 처음에는 시끄러웠던 장형준 형사도 언제부턴가 조용해졌다. 점심도 대충 해결하고 시간은 벌써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이야.
송연수 형사님이 숲 속을 한참 달리며 독채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없어서 주변 아무 곳에나 댔다. 장형준 형사가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여기는 주변에 뭐가 하나도 없어서 생활이 되긴 하나?
그는 하품까지 하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 말투가 재수 없긴 했으나 반박할 수 없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우거진 숲을 차로 내리 달려 들어왔으니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해도 믿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풀내음과 선선히 부는 바람과 맞닿아 입구에 걸린 풍경에서 흘러나오는 청아한 소리. 그것들은 모두 어린 시절 툇마루에 누워있으면 눈에 걸리던 그 풍경과 닮아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설레는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그때, 외부인의 소리에 한 여자가 호스피스에서 나와 우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우리는 입구로 다가갔다. 나는 확신했다. 이곳일 거라고. 다가갈수록 이상하리만큼 확신이 들었다. 어느 순간보다 강렬한 확신이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요. 봄이 왔다고들 하지만 아직 날이 찹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입구로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들리는 유리 부딪히는 소리에 나는 정신이 맑아지기도 했다가 점점 아득해졌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이었다. 분명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장소였지만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저, 이곳에서 일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