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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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이 경찰서도 끝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릴 대로 질린 저 아저씨와 마침내 끝이었다.
-여, 이제 가는 거냐?
-정말 꾸준히도 시비를 거시네요. 어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 봐요.
-참나. 나이 먹는 게 니들이나 성장이지, 나 정도만 나이 먹어봐라. 난 가만히 있는데 숫자가 자꾸 먼저 간다.
아저씨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존댓말 하는 거 그만둬.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어색해. 죽을 거 같아. 막 소름이 돋아.
기껏 어른 대우 해줬더니 돌아오는 말이 이딴 말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챙길 짐도 딱히 없어서 몸만 차에 실었다. 나는 주말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설주림은 마지막 호스피스에 도착하자마자 대뜸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하더니 그 여자는 더 대뜸 그러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으나 설주림의 기뻐하는 얼굴을 봤으니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지난주 주말보다 더 시끄럽게 조잘대는 아저씨의 옆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슴 한쪽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던 건 변함없는데 이상하게도 더 마지막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주림이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곳에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을까. 왠지 이번에는 더 어딘가로 떠나기보다 오랫동안 머무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햇살이 따뜻한 오후 2시쯤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처음 왔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어서 몰랐으나 이곳에도 이름이 있었다. 꽃구름 호스피스.
-어서 와요.
이 호스피스의 수간호사이자 처음 왔을 때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그 여자가 문 앞에서 반갑게 우릴 맞이했다. 여자 형사의 손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과일 주스 선물 세트가 들려 있었다. 간호사는 아늑한 중앙 휴게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정말 깜짝 놀랐었죠. 갑자기 일을 하고 싶다니.
수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너무 급작스러워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마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듯 여자 형사가 말했다. 수간호사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곳은 아주 작은 호스피스예요. 인원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일하는 게 힘들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일하면서 머무를 곳을 안내해 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러보는 호스피스라는 공간은 전혀 병원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운 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 생명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저 멀리 들어오는 햇빛들에 생긴 그림자들도 고즈넉해 보였다. 공유공간에는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TV를 보며 깔깔대며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젊은 사람도, 어린아이도 있다. 이상한 곳이다. 아픈 사람들 특유의 냄새랄까, 그런 것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편안하다. 따뜻한 분위기가 마음이 무르게 한다. 또 내 기분까지 차분해지게 한다. 이곳을 위해 설주림은 오랫동안 달려온 것일까. 그 끝이 이곳이라면 참 괜찮은 곳일 것만 같다.
설주림은 호텔에서 내게 그랬다. 오두막 할배가 있던 곳을 찾을 거라고. 여자 형사가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그렇게 찾은 곳이 이곳, 꽃구름 호스피스였다. 할배도 이곳에 있으면서 내가 느낀 것과 같은 안락함과 포근함을 느낀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로 이곳을 찾은 건 할배의 평생 운을 다 썼다고 해도 믿을만한 발견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가는 길이 험하니 조심하시고요.
아저씨와 여자 형사는 고개 숙여 수간호사한테 인사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록 너와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지만 안전해 보이니 됐다.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떠났다. 나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형사가 떠나고 나서 우리는 저녁 식사 준비를 도왔다. 계란을 까고 부치고, 나물을 버무렸다.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 가득했다. 쉴 틈도 없이 일에 가담했지만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할 일이 있는 편이 더 좋았다. 저녁 식사를 배식하기 위해 여러 방을 돌아다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모두 웃는 얼굴이었으며 친절했다. 배식을 마치고 우리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휴게실에 앉았다. 수간호사 외의 두 간호사분과 마당을 정돈하고 청소를 도와주시는 환경미화원, 직원은 이렇게 넷이 다였다. 모두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분들이었다. 이곳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예요?
환경미화원인 중년 남자가 물었다. 그러자 두 간호사도 옆에서 그러게, 신기하네, 라며 거들었다.
-아무래도 깊은 산속에 있다 보니 찾기 여긴 쉬운 게 아니었을 텐데.
설주림이 아, 하고 서문을 떼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산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오두막을 짓고 살고 계셨는데 소싯적 이곳에서 일을 했다고 들었어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이곳에서 일을 했던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을 텐데요. 그렇죠?
수간호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혹시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설주림은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을 하다가 병이 생기셔서 환자가 되었다고 해요. 그게 싫으셔서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기로 결심하셨다고...
한 여간호사가 손뼉을 마주치더니 아! 하며 무언가 알아차린 듯 보였다.
-설마 꽃구름을 지으신 윤명례 대표님 아니실까요?
-이야, 이거 놀라운데요? 그렇게 전설적이신 분이시라니!
환경미화원 남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윤명례 대표님의 이야기는 이 호스피스에서 거의 전설로 내려와요. 그분께서 생에 벌어두신 수십억에 달하는 돈을 기부하고 봉사하며 지내시다가 어느 날 돌연 이곳을 떠났다고 하죠. 왜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은 병이 생긴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신이라도 모시는 것처럼 기도하듯 합장한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다른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로 황홀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 감자를 그렇게 훔쳐가던 오두막 할배가 이런 존재일리 없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믿기지도 않았다. 확실히 그 할배는 어딘가 불가사의한 면이 없진 않았지만 결국 마지막은 늘 내기에서 이겨 내 감자를 가져간 약아빠진 할배일 뿐이었다. 그 표정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유독 재수 없던 표정.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부럽기도 하네요. 저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시니깐요.
-수간호사님께서 뵌 적이 없을 정도라면 적어도 10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는 말인걸요?
수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맞아요. 제가 오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으니...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분명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는걸요.
설주림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할배가 정확하게 1년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계절이 지나는 주기로 1년 정도가 되어 간다고 추측한 것이었다. 만약 할배의 증세 악화로 인해 더 이상 기억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라면 1년이 아니라 그곳에서 10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분은 계속 산속에서 지내신다고 하시던가요? 왜 함께 오시지 않고... 저보다 오래되신 분들 중에는 분명 알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 말이죠.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은 설주림은 나랑 유민우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화재 사고가 있었어요. 그곳에서 헤어졌어요.
그들은 설주림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설주림도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다 깨달은 게 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이거,
설주림은 주머니에서 작은 나무 조각 하나를 꺼냈다. 구름 모양 나무 조각이었다. 할배가 틈이 날 때마다 조각하던 구름 모양 나무 공예품이었다. 그녀가 왜 이곳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법했다.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거예요. 이곳에 소중히 보관되었으면 좋겠어요.
수간호사는 고맙다며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가슴에 한 번 품더니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