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꽃구름

by 문나인

>>>


이곳에서의 일상은 늘 반복되고 평화롭다. 일이 손에 익기 전까지는 이른 저녁만 되면 잠에 들곤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내가 찾던 곳임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요리하고, 함께 오순도순 대화하며 식사를 할 때도,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며 빨래를 널 때도, 나른해진 오후를 틈 타 눈을 부칠 때도 저 멀리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언제나 함께 한다. 이곳은 인생에서 딱 한 번 들을 종소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소리가 언제 들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기보다는 자연히 유수에 몸을 맡기고, 종소리를 맞이하는 곳. 이곳보다 더 평화로우며 욕심이 없는 곳이 있을까.


민우와 기욱이와 이곳에서 함께 일을 할 때면 옛날에 어느 한 기차역에서 빨래를 했던 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순수하게 웃으며 함께 즐거웠던 순간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찾아오길 바라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는 분명 그럴 날이 오겠지.


그날 밤, 나는 밖에서 별을 보고 있었다. 이 별들을 바라보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민우가 내게 다가왔다.


-아직 많이 춥지 않아?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민우가 가져온 담요를 내게 건넸다. 벤치에 앉아 우리는 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계속 바라보니까 목이 엄청 아프네.


나는 어색하게 뒷목을 잡고는 하하, 웃었다. 뭔가 어색했다. 민우와 오랜만에 둘이 제대로 대화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둘이 대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민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응, 그러네. 계속 정신이 없었으니까....


-있잖아, 주림아. 늘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늦어지는 것 같더라고.


나는 민우를 마주 바라보았다. 민우가 말을 이었다.


-고마워.


오랜만에 바라본 민우의 눈은 깨끗했다. 항상 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투명한 건 색이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 몰라도, 깨끗하기로는 제일이었다. 민우의 시간은 여태껏 멈춰있다가 이제야 흐른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제 민우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유리는 깨지고 새롭게 들어앉은 단단하고도 투명한 유리구슬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떨어뜨려도 예전만큼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떨어뜨리면 깨질 것 같은 구슬은 깨뜨리고 다시 더 단단하게 만들면 되지만 이미 단단한 구슬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일까.


고맙다고 하는 민우에게 무슨 말도 답해야 할지 어려웠다. 내가 나도 모르게 변하는 사이에 민우도 변한 것이었다. 처음 우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우리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 같기도, 내가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기도. 만약 후자라면 어떡하지.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내가 이렇게 성장하는 데에 민우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나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민했다. 민우랑 이 이상으로 예전만큼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원래 성장할수록, 생각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가까워지기 힘든 것일까. 성장과 솔직함은 반비례하는 건 아닐까.


민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어느 순간부터 어려워졌다. 한쪽에 어둠을 드리운 이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늘 진심일 리 없다고 단언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결정을 떠넘기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그것을 차치하고 이 사람에게 무슨 결핍이 있다고 단정할 뿐이었다. 그 결과 나는 결핍이 해결된 지금 이 사람의 진심을 모른다. 사소하게 좋아하는 음식도, 좋아하는 색도.


내가 민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척 굴었던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충격받은 얼굴로 나는 물었을 것이다.


-나,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알려고 들지도 않았어. 내가 너무 힘들다는 핑계로. 그 말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민우는 환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흰색이야. 좋아하는 음식은 음, 라면이려나.


민우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아. 누가, 여기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더라고.


하늘을 다시 바라보며 그는 입김을 호, 불었다. 공중으로 연기가 흩어진다. 요술램프 같기도 하고 투명한 민우의 눈 같기도 했다. 나는 부끄러운 탓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였구나. 내가 그랬구나. 사실 그때의 나는 정말 민우의 사소한 것들이 알고 싶긴 했던 걸까?


-내가 좋아하는 건 푸른색, 그리고 마시멜로.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구워주시던 폭신폭신한 마시멜로를 오물오물 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제일 좋아했다. 그러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내가 씹고 있는 것 같았다. 민우는 응, 그렇구나, 하고 답하며 웃었다. 나눈 거라고는 고작 좋아하는 색, 음식뿐이었다. 하지만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진작 이랬으면 좋았을 걸. 지금껏 함께 해온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가갈 용기가 서지 않았다. 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한결같이 머뭇거린다. 결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있을 때 느껴지는 묘한 안정감 같은 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낄 자리가 없다고 단언하게 된다. 저 둘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뒤에 선 나는 걷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오다니. 역시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더 뒤처지면 나는 결국 저 두 별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될 것만 같다. 더 멀어질 것만 같다.


이제 곧 주림이의 여행도 끝이 나겠지. 주림이가 호스피스 문에 달린 풍경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는 걸 들었다.


-내가 찾던 풍경 소리...


주림이는 앞을 향해 나아갔고, 스스로 찾아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 스스로가 원하는 곳을. 유민우도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났다. 벗어난 그곳이 좋은 곳이든 나쁜 곳이든 어딘가에 도달했다. 그런 반면 나는 뭐가 달라졌지? 유흥거리에 흥미를 잃은 거? 그런 건 이제야 원점인 셈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스타트라인일 뿐이다.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답을 찾으려 애써도 결국 원점이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가장 첫 번째 연결고리를 바꿔야 했다. 그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사실 이미 그것으로 머릿속이 가득 들어찼다.


-왜 여기 있어?


한 치매 할매가 와서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빨랫대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이유는 할매가 내 왼팔을 꽉 잡았기 때문이다. 무슨 할매 힘이 이렇게 쎄?라고 생각되는 순간 그 할매가 말했다.


-왜 여기 있어?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뭐야. 뭐 알고 말하는 거야?


나는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다.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방어적인 말이었다. 할매가 손을 턱, 하고 놓았다. 그 손이 지나간 팔목이 찌르르했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니. 말이 쉽지. 어디로, 어떻게? 아니 애당초 돌아간다는 표현이 맞긴 하나? 그 표현이 타당하다면 나는 돌아간 채 다시 이곳으로 오면 안 된다는 의미인 건지... 생각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복잡하고 짜증 나는 것 투성이인 거야?


사실 돌아가야 할 곳이라면 떠오르는 곳은 단 한 곳이었다. 하지만 계속 부정해오고 있었을 뿐이다.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려고 해도 마땅히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시 이런 건 나와 맞지 않는다. 일단 가보고 해 보자. 가는 동안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서야 뭔가 진전이 있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부르는 주림이와 민우가 보인다.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 분하긴 해도 내가 없는 편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내가 있으면 그림이 묘하게 불량해진다. 그쯤은 이제 나도 좀 안다. 저 둘을 바라보고 나니 이제 확실히 알겠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 어처구니없게도 이제야 깨달았다. 내게는 자격이 없다는 걸. 그들에게 있는 순수함, 따스함, 그런 것들에 진절머리를 느끼는 나 같은 거는 섞이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속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잠깐 잊었던 거 같다. 지나간 시간들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진다. 잠시동안 저들과 함께 해서 재미있었으니 됐다. 애초부터 목적은 그거였다. 재미. 그래, 까짓 거 다시 돌아가보면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의 디폴트가 아니었던가. 치매도 있는 양반이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해 버린 탓에 하마터면 쓸데없는 추억팔이까지 갈 뻔했다. 나는 할매한테 꽉 잡혔던 손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이전 27화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