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의 내맘대로 리뷰
아. 이별했구나, 그리워하는구나, 추억을 곱씹는구나.
처음 시집의 제목을 마주하며 든 단순한 생각이었다. 곱씹을수록 단물이 나는 제목이다. 문득 든 생각. '시적화자는 과연 며칠동안이나 당신의 이름을 먹었을까.' 라는 궁금증에 나의 되새김질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었었’이 아닌 ‘-었’의 사용은 어쩌면 시적 화자가 아직도 ‘당신의 이름‘을 지어먹고 있을 수도 있고 앞으로 영원히 먹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제목
1. ‘-지어 먹었다’는 표현에 대하여
그러나 '-지어 먹었다'라는 표현에 집중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선 ’먹었다‘라는 표현은 음식에 사용한다. 더 나아가 '지어 먹었다'라는 표현은 '밥'과 함께 사용된다. 밥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구수한 냄새가 어느새 군내로 변하고 진득해지면서 마침내 쉰내가 날 것이다. 아니면 냉장고에 보관한다고 하자. 그래도 갓 지은 밥보다 맛있을까. 똑같이 점점 맛이 없어지고 종국에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수도 있다. 밥은 음식이기에 언젠가 찰기를 잃고 변질되기 마련이다. 시적화자는 ‘밥‘의 위치에 ’당신의 이름‘을 놓는다. '당신의 이름'이 '밥'의 알레고리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시적화자는 '밥'과 같이 '당신의 이름'이 언젠가 상하고 썩어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언젠가 이 행위가 반드시 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왜 밥인가?
왜 작가는 많은 음식 중 ‘밥’을 선택했을까. ‘밥’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이해가 간다. ‘밥’만큼 매일 먹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음식이 있을까? ‘밥’은 우리의 주식임을 떠나 ‘일상’의 메타포이다. 그렇다면 ‘밥’의 자리를 대신한 ‘당신의 이름’의 의미는 시적 화자에게는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 속 존재다.
그런데 밥은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굳이 한번 지어서 며칠씩이나 먹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밥을 새로 지으면 되는 것을. 그러나 ‘당신의 이름’은 새로 지을 수 없다. 새로 짓는다는 의미는 곧 이별일 테니 말이다. 가장 평범하고 익숙하지만 소중한 존재에 대한 만남과 이별을 작가는 ‘밥을 지어 먹다'라는 행동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감상
2012년 12월. 시인의 말이 쓰여진 시점이 마음에 든다. 한해의 마지막에 비는 소원이나 기도 같았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라는 아무런 미사여구 없는 시인답지 않은 고백은 이 시집을 더 읽고 싶게 만들었다.
시의 주된 제재로 등장하는 '미인'과의 추억, 이별, 그리움이 시집의 서사에 핵심으로 보인다. 박준 시인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미인'이 단순히 여성이나 연인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고 소중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나'의 옆에 없는 사람들을 통칭한다"고 했기에 연인 관계로 단정 지어 해석한다면 감상폭이 좁아질 수 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여성과 연인관계라고 생각하고 읽는 편이 더 와닿고 재밌기는 한 것 같다.)
#인상 깊었던 시: 4편
1부. <동지(冬至)>
1. 시의 디자인: 내용 배치
"그때."라는 두 글자가 시의 한페이지 전부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 페이지에 소괄호로 "그때."에 대한 보충 설명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배치가 효과적이라 생각한 이유는 소괄호의 내용보다 "그때."라는 두 글자가 더 많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신선한 시의 형식
시의 형식이 참신했다. 제목을 "그때."라고 지어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동지"를 제목으로 써서 "그때."를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피라미드 구조처럼 보여서 색다른 매력을 느끼며 읽는 재미가 배가 되었다.
3. 내용
필자는 이 시를 사랑하는 당신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과 많은 일을 함께했던 순간들이 "그때."라는 단 두 글자의 보충설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들의 “그때”가 결국 “동지”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대체된다는 것이 아쉽고 슬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억이란 것이 구구절절하기도 하지만 이토록 단순한 것이어서 우리가 잊고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2부. <옷보다 못이 많았다>
옷보다 못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못은 보통 무엇을 걸기 위해 사용된다. 걸어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내려놓지 못한다.' 더 나아가 '내려놓을 공간이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내려 놓지 못하는 것은 가난일 수도 죄책감일 수도 있다.
이 시 전체에 못 같은 가난과 작은 죄들이 아프게 박혀있다. 신도 포기해버려 "썩은 달"이라 불리는 "윤달"에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고, , "다른 집에서 훔친 양장책", "셋방의 셈법"에 기뻐하고, "밥 한 주걱 더 먹은 것"을 잘못이라 부르고, "가슴에서 얹혀있는 일들" 내려놓지 못하는 생활고에 찌든 화자의 모습은 가슴에 못을 박는 듯한 아픔을 준다.
3부. <마음 한철>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마음 한철> 中
연애할 때 우리는 종종 상대의 진심을 에둘러 떠보기도 한다. 시에서 '미인'은 '나'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했고, '내'가 "나도 사랑해"라고 답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응"이라는 싱거운 말 뿐이었다. 대답을 들은 '미인'의 심정은 아마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곤두박질치지 않았을까.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한 것도 그 때문이라.
4부. <세상 끝 등대 2>
사진이 시가 되었다. 그리고 2018년에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 세상 끝 등대 2,3가 등장한다. 마치 드라마의 예고편 혹은 영화의 쿠키 영상을 본 것 같다.
#마무리
박준 시인의 시집의 강점이라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확실하고 시의 형식이나 구상 또한 참신하다. 난해한 시들보다 이해가 쉽고 솔직하고 와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를 읽으면서 많이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었다.
논외로 항간에 "나태주 시인의 시가 좋은 시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시가 단조롭고 반복적이라는 점, 대부분 형상화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직관적인 이해로 인해 독자의 상상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좋은 시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다른데 감히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필자는 시인이 최소한 시론을 가지고 자신의 시를 통해 세상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면 충분히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박준 시인의 시도 난해하기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시의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시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풀꽃"들이 사라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