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너머로 두고 온 풍경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복층적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

by 백치

16년도엔 좋은 영화가 참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라라랜드>, <문라이트>, <컨택트>, <로스트 인 더스트> 등등.

마법을 부리는 영화도 있었고, 이성을 차갑게 만드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상 결과가 가장 궁금했던 아카데미도 바로 당해였습니다.


그러나 저 고래 같은 영화들 속에서, 가슴속에 깊은 잔상으로 남아 꾸준히 떠올리게 되는 영화가 있다면 단연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카데미 각본상의 영예로 그쳐야 했던 본 작품이 어떤 식으로 감정을 묘사하는지, 창(窓)의 은유를 중점으로 파헤쳐보려고 합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2016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개략적인 시놉시스는 이렇습니다. 아파트의 잡역부로 일하고 있는 리 챈들러는 어느 날 그의 형 조 챈들러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고, 뜻하지 않은 귀성길에 오르게 됩니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도 잠시, 형이 죽기 전에 자신을 조카의 후견인으로 지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종의 이유로 두고 떠났던 맨체스터의 풍경이 다시금 리의 가슴을 저미기 시작합니다.


"당신들 나 알아?" "그럼 왜 쳐다보고 지랄인데?"


주인공 리는 얼핏 보기에도 고장 난 인물입니다. 잡역부로서 세입자에게 기본적인 사회적 매너도 챙기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모조리 차단하며, 바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본 보트 위의 살가운 삼촌과는 완전 딴판입니다.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형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병원으로 향하면서입니다.



그의 무미건조한 일상과 형의 부음


유리창의 은유는 병원으로 향하는 찻길에서 처음으로 암시됩니다. 길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아파트 관리인과의 사무 전화고, 다른 하나는 교통체증입니다. 관객은 오로지 룸 미러로 비치는 그의 눈빛과, 사이드 미러 앞 쪽 바람막이를 통해서만 리의 얼굴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그의 맨얼굴을 비추지 않습니다. 암시는 병원 씬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병원에는 이미 조의 절친한 친구 조지와 담당 간호사가 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가 이미 리의 도착 한 시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카메라는 갑자기 길을 잃은 듯 리의 앞과 옆, 뒤를 방황합니다. 조지는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을 훌쩍거리는데 반해 리의 얼굴엔 미동도 없습니다. 이내 조의 담당 의사가 끼어오고 자세한 사인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리는 돌연 "집어치워"라며 내뱉듯 읊조립니다. 정확히 그 순간 카메라는 칸막이의 유리 뒤로 숨어듭니다. 이것은 그가 미약하게나마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씬입니다.


바로 그 지점. 리는 창 속에서조차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


리는 곧바로 감정을 추스릅니다. 마치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의사에게 사과 인사를 건네고 형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영안실로 향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선 어색한 침묵뿐입니다. 차갑게 식어 누워있는 형 앞에서도 리는 말이 없습니다. 어깨에 팔을 둘러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곤 이내 영안실을 빠져나갑니다. 장례에 관해 몇 가지 사무적 절차를 거친 뒤 리는 조카 패트릭이 있는 학교로 향합니다.


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리 되묻습니다. "그 리 챈들러 말하는 거야?". 그는 이미 유명인사입니다. 조카를 찾아온 아이스링크장에서도 리는 완전히 저승사자입니다. 학우들이 말하길 패트릭의 아버지가 아플 때만 찾아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분명 그에 대한 소식이 부풀려져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패트릭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리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형의 집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패트릭은 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별로 충격받은 것 같지 않습니다. 마치 '언젠간 그리 될 줄 알았다'는 양. 슬픔을 애써 감추는 것은 핏줄인가 봅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패트릭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입니다. 친구들은 조가 얼마나 재밌는 아저씨였는지 떠들어대고, 여자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친구 앞에서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냐며 애써 성숙한 흉내를 냅니다. 삼촌은 완전 외부인 취급입니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향합니다. 조의 유언을 듣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소환된 리는 자신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리는 곧바로 '나는 못한다'며 온갖 이유를 갖다 댑니다. 변호사는 리에게 '당신에게 있었던 일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라며 운을 띄우고, 그제야 관객은 리가 왜 지금의 반파된 인간이 되었는지 목도하게 됩니다. 그전까지 발작적으로 끼어들던 플래시백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리가 친구들을 불러 한창 파티를 벌이던 날 밤 있었던 일입니다. 아내 랜디의 등쌀에 못 이겨 친구들을 모두 쫓아낸 리는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마트로 향합니다. 필요한 생필품들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길가의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빛이 보입니다. 집에 도착하자 화마에 휩싸인 건물이 보입니다. 리는 자신이 화로에 안전망을 걸어두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내는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그의 두 딸과 젖먹이 아들은 이미 새까만 재가 된 후였습니다. 꺽꺽대다 기절한 랜디에 반해 리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완전히 벙쪄있을 뿐입니다.


"코카인도 있었고, 그리고…"


경찰서로 장면은 전환됩니다. 리는 밤새 있었던 자초지종을 경찰에게 설명합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마약까지 언급하며 리는 자신의 잘못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체포하지 않습니다. 안전망을 깜빡한 건 법적으로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리는 취조실을 걸어 나오자마자 지나가는 경찰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자신에 머리에 겨눕니다. 안전장치가 걸려있어 자살은 실패하고 곧바로 경찰에게 제압당합니다. 케이시 애플렉의 "제발요.."라는 애드리브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결정적 순간


리가 어째서 감정을 숨기고 살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서사적으로도,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변되는 심리적 장벽 바깥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간 곧바로 자기 파괴로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느 때고 창 뒤에 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관객은 리가 겪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의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 절반 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남은 절반은 그가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할애됩니다.


리의 방어전략과 그 내면을 알지 못하는 패트릭에게 그는 답답하고 말수 없는 삼촌일 뿐입니다. 어째서 삼촌이 자신을 데리고 그가 살던 지방으로 내려가려 하는지도 패트릭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패트릭의 삶은 모두 맨체스터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 그 풍경, 그 바다. 리에게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상기시키는 것들입니다.


"내 친구들은 다 여기 있어. 내 하키 팀이랑 밴드도 여기 있고 내 여자친구들도 여기 있다고. 삼촌은 어디 살든 상관없잖아!"


리와 패트릭이 싸우는 일은 점점 잦아집니다. 리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 남았으면 겪지 않았을 사회적 고초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패트릭은 그가 좀 살아있는 사람처럼 굴 것을 요구합니다. 전처 랜디에게서 받은 전화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과거에 침잠해 있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지하에서 숨만 쉬고 있을 동안 세상은 계속 흐르고 변했습니다. 리도 이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온 껍질이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조의 장례식이 끝나고, 그가 고향에 내려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닌 시작일 뿐입니다. 반지하 아파트에서 가재도구도 모두 챙겨 왔습니다. 이제 리는 맨체스터에서 다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맨체스터의 풍경을 응시하는 리


2층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 리의 등 뒤로 창 밖의 맨체스터가 보입니다. 삼각 지붕들과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바다. 리는 그 앞을 한참 동안 서성거리다 돌연 주먹을 휘둘러 창문을 깨뜨립니다. 이는 리의 내면적 서사와 영화적 은유가 가장 노골적으로 맞닿는 장면입니다. 리는 자신과 맨체스터를 분리하는 막을 깨부수고 변화하고자 합니다. 피는 조금 나겠지만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이때 흘러나오는 곡은 잉크 스파츠의 "이제야 빛이 보이기 시작해요(I'm Beginning To See The Light)".


그리고 그 변화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패트릭이 여자친구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와 애써 대면합니다. 뻔한 핑계를 대며 패트릭과 (또 다른) 여자친구를 위해 집을 비워줍니다. 어머니와의 좌절스런 재회로 실망한 패트릭을 위로하기 위해 총기 수집품을 팔아 보트를 고칠 것을 제안합니다. 패트릭 커플과 함께 떠난 보트 시운전에서는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리가 처음으로 앞에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전한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저 행복한 패트릭


일반적인 가족영화를 만든다면 여기서 끝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말입니다. 그러나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다릅니다.


패트릭과 여자친구를 집에 남겨두고 홀연히 거리를 서성거리던 리. 골목을 돌아서니 랜디가 앞에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음악은 전조도 없이 뚝 끊겨버립니다. 어색한 안부 인사를 몇 마디 나누더니 랜디가 벌컥 무너져 내립니다. "당신에게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난 지옥에 떨어져도 싸". 리에겐 날벼락이나 다름없습니다. 지나간 감정을 거둔 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는데 막상 아내를 마주하니 주마등이 스쳐 지나갑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말까지 더듬던 리는 황급히 자리를 뜹니다.


새 옷과 새 아이, 유모차. 랜디는 변했지만 리는 그대로다.


랜디와 헤어진 뒤 리가 향한 곳은 술집입니다. 죽상으로 바에 기댄 채 맥주를 몇 모금 마시더니, 돌연 옆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영화의 초반부가 오버랩되는 장면입니다. 이윽고 조지가 뛰어들어와 싸움을 말리고 성난 무리에서 리를 뜯어냅니다. 조지의 집에서 아내에게 치료받는 리. 애써 괜찮은 척 돈을 내고 자리를 뜨려다가 제지당하고,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며칠 후엔 요리를 불 위에 올려놓고 깜빡 잠이 들어 집을 태워먹을 뻔하는 사고까지 일으킵니다.


리가 스스로를 벌주는 방식


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변화하려 했지만 과거의 기억이 리를 붙잡습니다. 리는 자신이 패트릭을 돌봐줄 여력이 안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느 평범한 가족 영화였다면 다시금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은 삼촌과 조카가 서로를 끌어안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러한 이상론적 결말을 거부하고,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서로의 자리에 앉아보다.


사고 당일 날 밤 리는 곧장 조지의 집으로 가 패트릭을 입양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후 패트릭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소식을 전합니다. 패트릭은 그냥 삼촌이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몇 번 묻고는 이내 받아들입니다. 패트릭도 이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어머니와의 어긋난 재회에서 가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배웠습니다.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이해뿐입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 이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경솔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입니다. 리와 패트릭은 서로의 아픔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리는 다시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있습니다. 보는 이들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창 뒤에 숨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대담한 도전은 실패했지만 원점으로 돌아온 것 역시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조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리는 세상을 등진 게 아니라, 그저 패트릭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오래된 착각 중 하나는 단 두 시간 만에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 비탄과 상실, 마음 아픔이 수복이라는 완결을 맺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보단 미결의 감정을 떠안고 살아가는 방법의 궁리인 경우가 훨씬 잦지요. 세상의 모든 아픔이 성장통일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가 그것을 목격하고, 다시 목격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한 층 여물기도 하니, 그게 영화가 삶에게 내미는 반창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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