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더 킬러>, <방랑자> 외 2

by 백치

<피아니스트>, 미카엘 하네케


<La pianiste>, 2001


한편으론 사랑의 단면에 관한 연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내외적 압박에서 탈출하는 한 여성의 페미니즘 서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확실한 건 여기서 로맨스를 보는 인간은 제정신일 리 없다는 점이다.

주제 운용 형식으로서 방과 계단의 사용이 흥미롭다. 첫씬에서부터 제시되었듯이 대개 하나의 질서는 하나의 공간, 방 안에 머문다. 전복의 욕구는 문고리나 계단을 통해서 나타난다. 에리카가 모든 질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곳은 포르노 대여점의 상영관이다. 두껍게 방음처리가 된 문으로는 외부의 소리(정신병적 아버지 슈베르트에게서 발현되고, 어머니의 의해 실행되는 질서-즉 음악)가 들어오지 못한다.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여 새롭게 부상하는 질서인 왈터와 에리카의 성애는, 대여점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는 아버지의 방에서 진행된다. 다만 왈터의 첫 등장에서부터 암시되었듯이, 에리카를 지나치게 앞질렀을 뿐이다. 최후에 이른 에리카의 선택은 자학과 공간 자체에서의 탈출이다. 탈출은 탈출일 것이고 가슴팍의 자상은 글쎄, 일종의 성해방적 DIY 정신이 아닐까.



<더 킬러>, 데이비드 핀처


<The Killer>, 2023


암살, 생업 되다: 허무주의 암살자는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을 약한 다수와 강한 소수로 나누며 자신이 마치 후자에 속하는 자처럼 넌지시 암시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할 정도는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유의미한 것은 보수뿐이다- 혹은 그렇게 되뇌거나.

방아쇠를 당기는 자는 곧 그 총알 또한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실상 살의는 다른 사람의 것임에도 그렇다. 전문가는 곰과 사냥꾼 이야길 들려주며 자신들이 공유하는 이 일에 대해 경고한다. 반복적 행위 뒤에 숨겨진 은밀한 욕망에 대한 암시다. 공교롭게도 암살자는 지금 막 짐승을 죽이고 온 참이다. 배후에 있는 억만장자에게 총구를 겨누고서야 암살자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살인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다. 반복의 무의미함 때문이다.

2시간 내내 암살자가 읊는 경구들 중 어디에도 암살과 관련된 부분은 없다. 톡 떼고 보면 일개 회사원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는 워크에식 정도로만 보인다. 민간인을 죽인 것의 업보로 여자친구가 공격받지만 전문가가 지적했듯 이는 어디까지나 직업적 위험일 뿐이다. 복수 끝의 안식 또한 복수 그 자체가 아니라, 커피와 스낵, 볕 밑의 선베드 따위로 찾아온다. 전문성에 대한 강박을 거두고 퇴근의 감사함을 알게 되는 것, 아마 그보다 소시민적인 성장은 없을 것이다.



<방랑자>, 아녜스 바르다


<Sans toit ni loi>, 1985


아녜스 바르다의 또 다른 ‘시선’. <이창>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첫 번째 씬은 가장 적절한 피사체를 찾아 딥 포커스를 헤맨다. 영하의 날씨에 밭에서 잔가지를 줍고 있는 노동자를 경유해 카메라는 동사한 여자의 시체에 도착한다.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과 함께 그녀는 부활한다. 이름조차 애매모호한 그녀는 꽉 막힌 연애를 하는 여인에게는 로맨스의 화신이 되고, 자식이 없는 커리어우먼에게는 딸이자 젊은 날의 희망이 되고, 폭주족에게는 섹스어필이고, 모로코 출신의 노동자들에게는 처지를 이해하는 동반자가 된다. 방랑자는 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자유롭다. 무능한 노숙자의 최후가 곳곳에 암시되지만 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한 그녀는 죽지 않는다. 옹호하거나 비판하거나, 그것은 보는 이의 선택이다.



<키스 미 데들리>, 로버트 알드리치


<Kiss Me Deadly>, 1955


괴상한 여정이다. 이름을 좇고 좇다 보니 마주한 건 이해하지도 못할 추상미술과 핵 과학이다. 장르의 굴절을 거듭하는 영화를 B급 영화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것은 여지없는 B급 영화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키스 미 데들리>가 분명 당혹스러운 결말로 이어지긴 하지만, 감정의 흐름 자체는 억척스러운 구석 없이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B급 영화 특유의 감수성이 없다. 마이크가 겪는 심경의 변화, 즉 사립탐정으로서의 이윤추구(소시민들은 모두 돈을 원한다)로부터 가까운 사람의 보전으로의 내적 성장은, 상업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와 현대미술의 당혹스러움을 극 안에 가두면 B급 영화가 되지만, 오히려 그 당혹스러움을 주인공과 함께 경험하기로 결심하면 그저 냉전의 방사선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소시민의 모험이 된다. 후대 영화광들에게야 B급 영화 계보의 돌출점처럼 여겨지지만, 당시 관객들에게는 얼마간 실제적인 위기로 비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Laitakaupungin valot>, 2006


사람을 마른 걸레가 되도록 쥐어짜는데도 가학성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무관심함은, 카메라와 피사체 쌍방의 것이다. 희망은 너무나 쉽게 꺼지는 탓에 언제든 다시 피어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에 구체적인 근거 같은 건 필요 없다. 언제나 그랬다. 그딴 여자는ㅡ 평생 남자의 종으로나 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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