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4km ⑤] 나의 1월은 수학처럼 아름답다

물방울이 일러준 인생의 공식과 필연적인 재회

by 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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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통창 너머, 빗물을 가득 머금은 남향 난간 하부를 유심히 살핀다. 손으로 움켜쥐면 차가운 금속음이 들릴 법한 그 난간 아래로, 회색 무당벌레 같은 물방울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신기하게도 녀석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자꾸만 오른쪽으로, 안락한 남쪽을 향해 미끄러져 간다. 바람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 난간의 설계 자체가 아주 미세하게 그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물방울들의 만남은 기막힌 예술 그 자체다.


대부분은 왼쪽의 음수(-) 같은 녀석이 속도를 내어 빠르게 달려와, 오른쪽 양수(+)의 영역에서 앞서가다 속도가 더뎌진 녀석의 등을 툭 치듯 합쳐짐과 동시에 떨어진다. 그러다 아주 가끔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슬금슬금 마중 나오던 녀석이 왼쪽에서 오던 녀석의 미적거리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품어 안으며 한 몸이 되기도 한다.


녀석들의 속도가 제각각인 만큼 한 몸을 이루기까지는 그 지점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양수가 됐든 음수가 됐든 자신들의 속도에 맞춰 비로소 '0'이 되는 순간, 물방울들은 미련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낙하하는 지점도 모두 다른—비가 그칠 때까지 계속될 이 짜릿한 시연을 보며 깨닫는다. 어쩌면 나의 삶도 저 물방울처럼, 뒤에서 뜨겁게 밀어주는 이의 열정과 앞에서 딱 버티고 있다가 반갑게 마중 나오는 이의 손길이 머문 시점에서 가장 환한 남쪽으로, 이미 따스하게 기울어져 있었음을.


그리하여 나 역시 그동안 멈추어 있었다고 해서 끝은 아니었음을 안다. 늘 시작은 벼랑 끝, 그 간절함에서 태동하는 법이니까. 수많은 굴곡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 시련들은 모두 오늘이라는 값진 '두 번째 삶'을 가장 완벽하게 세팅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 과정이었음을 말이다.


나의 1월은 그래서 더 명쾌하고 아름다웠다. 17년 전 가장 행복했던 기억 속에 머물던 사람들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지국장이셨던 지금의 사업국장님과의 재회는 필연 같았다. 내가 현장으로 돌아온 지 단 한 달 만에 그분의 정년퇴임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오차 하나 없이 그분은 퇴임을 앞둔 귀한 시간에 나를 맞이해 주셨다.


보통 사람들은 저마다의 잣대와 편견에 갇혀 타인을 평가하곤 하지만, 그분만은 늘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노고까지 치하하며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셨다. 나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분은 변함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셨다. 재입사 동기에게 "이 사람에게 배우라"며 대놓고 나를 자랑하시던 환한 눈웃음. "휴가 때는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오라"며 스스럼없이 건네신 말씀. 단 두어 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시간은 내 17년을 건너온 인연의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나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해 주는 이가 승진의 정점에서 나를 기다려준 것, 그리고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퇴임하며 내 손을 잡아준 것. 이것이 잘 짜인 운명이 아니고서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나의 지국장이셨던 총국장님 역시 이제는 정년의 갈림길에서 나를 응원해 주신다.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이 남기는 온기가, 이제 막 다시 시작하는 나의 발등을 따스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타 지국장님의 세심한 귀띔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음 한구석 껄끄러운 기억으로 남았던 이의 정년퇴임 소식. 그 소식은 마치 내 인생이라는 프로젝트에서 불필요한 데이터가 삭제되듯 명쾌했다. 과거의 묵은 감정은 떠나가고, 오직 환대와 기꺼움만이 내 앞에 남았다.


인생은 흔히 흘러가는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지금의 내 삶은 마치 세심하게 설계된 '프로젝트' 같다. 시련이라는 이름의 변수를 극복하자, 탄탄대로라는 결괏값이 나를 향해 펼쳐진다. 벼랑 끝 역경을 뚫고 피어난 민들레처럼,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이 두 번째 기회가 눈물 나게 소중하다. 행복이란 그저 막연히 느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행복은 내 삶의 질서를 깊이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재입사한 지 1년이 지난 오늘, 창밖 흐린 3월의 하늘을 새 두 마리가 꼭 붙어 날아간다. 이 납빛 공기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샘이 날 정도로 다정한 날갯짓으로 높이 비상한다.


그들의 거침없는 유희를 보며 나 역시 조심스레 나의 두 번째 날개를 펼쳐본다. 1년 전 수학처럼 명쾌하게 정리되었던 내 삶의 프로젝트는 이제 3월의 기류를 타고 조용히 비상을 준비한다. 거창한 영광의 재현이 아니어도 충분하다. 차가운 공기마저 심플하고 명확한 응원으로 다가오는 오늘,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이 눈부신 기류를 타고 난간 아래 그 물방울처럼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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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월의 명쾌한 기억을 더 선명한 문장으로 나누고 싶어 글을 조금 다듬어 보았습니다. 소중한 공감과 댓글로 함께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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