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회로가 멈춘 자리, 비로소 눈에 밟히는 다정한 생명들
14년을 살았던 수원 시내였다. 마흔둘, 늦깎이로 입사해 치열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 인생의 가장 뜨거운 한때를 보낸 곳. 출근길 상습 정체구간이던 인도래 사거리와 낯익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천지사방 들려오는 듯한 아파트 단지들. 그 익숙하던 삶의 터전이 화성으로 이사 온 지 고작 3년 만에 낯선 타국처럼 보일 줄이야. 버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도무지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잿빛 살풍경 속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도전을 위해 웹디자인 학교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나선 길이었는데, 세 번째 방문하던 사흘째가 되어서야 내 영혼은 비로소 "아, 여기가 거기였지" 하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 이상해진 것 같아, 정말." 남편에게 털어놓은 고백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비명이기도 했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지도가 절로 그려지는 사람이었다. 낯선 길도 한 번만 지나면 딱 반 접었다 편 데칼코마니처럼 복귀 항로가 ‘도면’처럼 뇌리에 인화되곤 했다. 길눈 어두운 남편 곁에서 내심 명민한 감각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던 나였다.
하지만 그 단단하던 세계가 여덟 시간이라는 마취의 암전 속에 묻혀버린 것일까. 마취의 긴 그림자가 아니고서야, 내 삶의 지각 능력이 이토록 무력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먹통이 된 내비게이션처럼 뇌 회로가 멈춰버린 자리에는, 이제 10분 전에 지나온 길조차 까맣게 지워진 막막한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기억은 이제 미지수의 영역이다.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삼촌과 버스를 타고 가던 날의 기억조차 의심스럽다. “여자애가 팔에 무슨 털이 이렇게 기냐, 빗으로 빗어보고 싶게.” 향수 뿌리냐며 킁킁대던 삼촌의 하이톤 목소리. 영화 필름처럼 생생한 이 장면마저 내 뇌가 만들어 낸 '가짜 기억'은 아닌지, 언제고 삼촌을 만나면 넌지시 물어보고 싶다.
언젠가 산책길에 "새들은 으레 짝을 지어 날아요"라고 호기롭게 말했던 적이 있다. 내 눈엔 늘 그렇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비 오는 날 조수석에서 본 풍경은 달랐다. 쉼터 하나 찾지 못한 채 각자 고단하게 날던 새들. 내 뇌의 회로들도 긴 수면에서 깨어나며 너무 지친 나머지, 꼭 켜야 할 스위치 하나를 그냥 두고 돌아온 것만 같았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인데, 희한한 건 그다음이다. 차를 타면 시공간의 감각이 무뎌지던 내 뇌가, 한 걸음 두 걸음씩 두 발로 땅을 딛고 걷기 시작하면 마법처럼 작동한다. 시속 60km의 속도에서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사람이 걷는 속도인 '시속 4km'의 시공간에선 하나하나 눈에 밟힌다. 길가에 나앉은 달팽이 한 마리, 도로변의 두꺼비... 남들은 보지 못할 작은 생명들이 내 눈엔 선명한 문장으로 박힌다.
어쩌면 내 뇌는 이제 훑고 지나가는 인연들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셔터를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작고, 적고, 여린 것들—오직 내 마음 한 조각이라도 채워질 수 있는, 미약한 의미일지라도 깃드는 곳에만 시선을 주겠다고 선언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제 길을 잃는 나를 너무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뇌 속 한 곳의 정교한 도면이 사라진 허허로운 자리 위로, 뜻밖의 온기 몇 스푼이 퍼진다. 생일을 기억해 준 동료의 선의, 안부를 묻는 지인의 조심스러운 문자, 다시 펜을 잡게 이끌어준 친구의 기별...
삶의 도면은 다소 느슨해졌을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초승달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 몇 안 되는 사람들 덕분에, 나의 평범할 것 같던 미래가 꽤 살아볼 만한 세상으로 변한다. 내가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련으로 닫혀 있던 마음이 서서히 열린다. 나도 이제 그들에게 시속 4km의 속도로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
“마구마구 선해지고 싶어. 정말이지, 이것이 내가 착하게 살아갈 이유군.”
[작가의 말]
8시간의 전신마취가 앗아간 것은 정교했던 기억의 도면만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명민했던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 익숙한 길 위에서 길을 헤매며 참 많이도 속앓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시속 4km의 보폭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길가의 작은 생명들과 내 곁을 지켜준 다정한 인연들...
*정확한 도면 없이도 천천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걸어봐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눈부신 풍경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