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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ul 14. 2021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이란 없다.

여유롭고 편하게 그러나 '반듯하게' 늙어가는 것이 맞다.


'영원, 절대, 결코' 귀한 단어다.

젊은 날, 종종 내 입술에서 새어 나오던 언어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이 귀한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한 것이.


시간은 바람처럼 움켜쥔 손가락 사이에서 사라진다.

바람조차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 사이로 왔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시간은 끝없이 이어지겠지만, 우리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것은 없다.

일상은 조건과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결코ㆍ절대'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책임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사진: pixabay.com

생명체는 시시각각 모두 변한다. 

외모도 다르지 않다. 

쭈그러지는 흔적마다 지나온 시간이 녹아있다. 

세월 앞에선 '원판 불변의 법칙'도 비켜가는데,

사람이 지니고 사는 성향이나 습관은 숱한 시간이 흘러도 옹고집스럽다. 

주름이 늘어가도 자신의 관점이나 이념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며 살다 간다. 

물질이 그대로 보존되진 않아도, 그 속에 있는 질량과 에너지 총량이 보존되는 것과 비슷할까?

앞장서, 세상을 향해 소리치지 않아도 시간은 정의를 향해 가는 줄 믿기도 했다. 쳇바퀴 돌리듯 사는 소시민들이 힘들어하는 사회는 누구도 바라지 않으니까.

그런데, 힘을 가진 사람이 치우친 관점과 이념에 고정되어 있다면,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보며 제법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작아지는 걸까! 


어느새 행동보다 생각에서 자유로워진 나이가 됐다. 

늙어가면서 좋은 것은 삶이 여유롭고, 마음도 편해졌다는 것이다.

들어오는 물질이 작아도, 나가는 것도 함께 작아졌다.

성장한 자식들도 각자 알아서 살아가니, 걱정거리도 줄어든다.

물론 여유롭고 편하다는 것이 흐트러진 모습이거나, 생각을 제대로 헤아리고 판단하는 능력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여유롭고 편하게 그러나 '반듯하게' 늙어가는 것이 맞다. 


할아버지와 꾸미, 여의샛강에서~

최근 내 머릿속엔 손녀 '꾸미'가 들어와,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 주 다시 만날 꾸미를 생각하면 그냥 행복하다.

꾸미도 느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주체하지 못하는 이 사랑을.

나는 딸과 '꾸미'를 우리 집으로 데려 와 돌보면서, 딸을 조금 쉬게 하고 싶다. 

나의 귀한 존재들을 좀 더 아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부부를 지탱하고 있는 시간들이 아직은 제대로 작동하니, 이 또한 고맙다.



존재와 상관없이 시간은 영원히 흐른다. 

시공간이 씨실과 날실로 엮이며 역사가 된다. 

우리 기억 속에 손녀 꾸미의 시간들도 소중한 역사로 담긴다.

읽기보다 보기를, 쓰기보다 말을 쏟아내며 지내는 요즈음,

'성인 연간 독서율 59.9%, 독서량 8.3권'이라는 철 지난 기사에 일조라도 했는지 되묻게 된다. 

약하게 짜인 나의 시공간 원단이 그대로 찢길 것만 같다. 

짧은 생각, 부족한 글이라도 남기며 자신을 되돌아보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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