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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 실상사, 지금은 지역사회 문화 플랫폼

실상사의 비극적인 천년 역사를 들여다보면, 실상사만의 상처가 아니다.

by Someday

실상사는 아름다운 지리산 자락에 한 폭 그림같이 앉아 있다. 지리산 부드러운 능선들이 천년고찰 실상사를 삥 둘러싸 안고 있는 형상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곳은 828년 신라 흥덕왕 때 지장 대사의 제자인 증각대사가 설립한 최초의 선종 가람으로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사찰이다.

당시 흥덕왕은 절을 세울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왕 본인도 태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대사는 선종의 유행을 일으켰고, 실상사도 계속 번창했다.

창건 당시엔 지실사(知實寺)로 불렸으나, 수철 화상이 실상 산문 제2대 조사가 됐고, 조계종 실상 산파로 종명을 개칭한 고려 시대가 남원 실상사의 최대 융성기였다.


현재 실상사 보광전의 모습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 실상사도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세조 1468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설과 그 후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실상사의 승려들은 실상사 안의 백장암이란 작은 전각에서 생활해야 했다. 1680년 숙종 5년에 이르러서야 승려들이 상소문을 올려 36채 건물을 중건했다.

그러나 1882년 고종 19년, 남원 근처 유생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다시 불을 질러 실상사는 모두 타버린다.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공비들이 번갈아가며 점령, 근현대의 아픈 역사까지 다 품어왔다.

실상사의 되풀이되어 온 비극적인 역사를 들여다보면 실상사만의 상처가 아니다.

우리 문화의 원형이 훼손되는 가슴 아픈 일은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사상이나 정치, 흔들리던 국격이나 국력에 의한 외세 침입 등 총체적인 난국과도 맥을 나란히 한다.


현재 실상사는 깨어있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인드라망공동체가 활발하게 움직인다.

작은 학교(대안학교), 사단법인 '한 생명', 단체 '생명평화 결사'와 템플 스테이, 농장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귀농학교도 지속적으로 열어 산내면은 이미 모범적 귀농자 마을을 형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단체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곳이다.



실상사 석장승

누워있는 돌 장승 / 실상사 석장승

실상사 석장승은 사찰로 들어서는 길목, 해탈교를 건너기 전 2기, 건넌 후 2기가 있었다.

1기는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 3기만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장승은 남녀를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하는데, 이곳은 모두 남자 어르신들이다.

석장승들은 주먹코, 둥근 눈, 커다란 귀가 인상적이다.

키는 2.5~2.9m, 너비는 40~50cm로 늘씬하고, 멋진 모자를 쓰고 있다.

조선 영조 1년(1725년)에 출생했으니, 300살이 다 되어가는 할아버님들이다.

얼핏 보면 제주 돌하르방과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누워있는 돌 장승은 남천에서 가져온 긴 모양의 돌로 만들었다. 남천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산내면을 흘러, 경남 함양군 임천(川)으로 이어지는 하천이다. 돌 모양이 마치 머리 없는 장승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여, 머리를 만들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본래 장승이 서 있던 자리에 뉘어있으나, 언젠가 긴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서길 은근히 바라게 되는 친근한 모습이다.

지리산 프로젝트 2014 성신 석 조각 연구회 작업으로 이루어낸 누워있는 돌 장승의 편안한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


해탈교 아래로 흐르는 남천(5월 24일 당시 긴 가뭄으로 천의 수량이 부족한 상태)

람천교 위에서 살짝 고개를 들면 아름다운 지리산 주능선이 쭉 펼쳐지는 장관을 마주하게 된다. 


실상사 해탈교와 목장승

해탈교 / 목장승과 빈의자

해탈교를 건너 가면, 오른쪽으로 실상사 농장 가는 길이 보인다.

목장승들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서 있다.


고목은 야생화의 지지대가 되어주고~ / 상원 주장군 석상

목장승들 왼쪽으로 석장승인 '상원 주장군'이 유난히 큰 주먹코를 벌렁거리며 실상사로 들어서는 우리 부부를 반겨주고, 맞은편 '하원 당장군' 석상이 조금 뻘쭘하게 비석과 함께 서 있다.


하원당장군인 석장승

우리는 차를 큰길 건너편 주차장에 세워두고 걸어 들어왔다. 들어와서 보니 실상사 바로 앞에도 넓은 주차장이 있다.

걸어서 들어와도 차를 타고 들어와도 다 좋은 곳이지만, 차를 탔다면 실상사 석장승의 인사를 받으며 해탈교에서 멀리 보이는 실상사의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며 산책하는 즐거움은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휴휴당(템플스테이)


실상사 밖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실상사 풍경


실상사 천왕문
공든 탑

실상사 천왕문이 보인다.

천왕문 앞 주차장 옆으로 공든 탑들이 각기 다름 모습으로 우릴 반긴다.

해탈교 아래로 흐르는 냇가에서 날아온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탑들이다.

우리나라 사찰이나 산속을 지나치다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탑과 조금 다르다. 성신 석 조각 연구회에서 기획해서 만들어진 탑이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이루게 해달라고 빌곤 한다. 이곳을 찾은 이들의 선한 소원도 이루어지길..


실상사 천왕문 앞으로 들어가는데, 지리산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청소년 서너 무리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친다. 대부분 밝은 모습으로 제 갈 길에 바쁜데, 한 소녀가 가벼운 목례를 건네기도 한다.

아이들의 건강한 모습이 눈부시도록 예뻤다.

편한 복장으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모내기 실습을 하러 가는 중인 듯하다.

그들의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과 키워가는 꿈이 햇볕 아래 투명하게 빛난다.

실상사 작은 학교 학생들이겠지!

바라만 보아도 흐뭇해지는 광경이다.


실상사 정문 앞, 오른쪽으로 보이는 휴휴당과 멀리 부드러운 지리산 능선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 36개 사찰만을 남겨 놓는다.

종교나 문화도 권력 앞에서는 추풍낙엽에 불과했다.

지구상 모든 곳에서 역사는 이렇게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하며 돌고 돌아온다.

본래 남원 실상사의 말사였던 이곳 사찰은 산내면 원천리 소재 원수사(源水寺)의 관할에 속하게 된다.

고려 말 이후 잦은 병화로 쇠퇴해지기 시작한 실상사는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된다.

이후 200년간 절의 영역은 민간 경작지로 사용되어 왔다.

그대로 보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철불과 석탑만이 논바닥에 방치되어 오다가 1690년(숙종 16) 침하 조사에 의해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36동의 건물을 중창한다.

그러나 1883년과 1884년 가람의 화재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등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겨두고 모두 전소된다. 1884년 월송 대사가 불탄 자리 위로 지금의 보광전 건물을 새로 중창했다.



실상사 천왕문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사대천왕을 만난다.

무섭다기보단 친근한 표정으로 맞아준다.


사대천왕, 증장천왕과 광목천왕 / 지국천왕과 다문천왕

천왕문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또 다른 형태의 공든 탑 돌무더기와 범종각이 보인다.


공든 탑, 앞에 설명된 글을 읽지 않아 실제 이름이 공든 탑인지는 모르겠다.


실상사 범종각

범종각

1칸짜리 사모 지붕 아래 범종이 걸려있다. 범종각은 1991년 건립됐다.

1967년 파손된 범종을 발견, 범종이 있던 자리에 같은 모양의 범종을 만들었다.

파손된 실제 범종은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실상사 삼층석탑 (쌍둥이 석탑)

가운데 보광전과 석등, 양쪽으로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부처의 유골(사리), 관련 서적 등을 보관하는 무덤이기도 하다.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으로 높이는 8.4m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고, 각 층 몸체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받침 부분이 일반적인 탑들보다 넓다.

왼쪽 탑(서쪽 탑)은 꼭대기 일부를 잃은 채 서있어 아쉽기도 했고, 현재 탑이 조금씩 기울고 있다고 하니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동쪽 탑 / 서쪽 탑(사진 왼쪽)


실상사 석등


실상사 쌍둥이 석탑과 석등


실상사 보광전

보광전은 채색이 되어있지 않은 통나무 그대로의 색과 빛이 참 곱다.


건칠마이타불좌상과 건칠보상입상

실상사 보광전, 건칠마이타불좌상과 건칠보상입상


실상사 동종은 조선 숙종 20년(1694년) 만들어졌다. 높이 123cm, 넓이 83cm의 작은 범종으로 스님이 기도할 때 울린다.


타종은 곁에 뉘어진 작은 나무망치로 울린다. 귀한 문화재이니 살살 쳐서 오랫동안 길게 울려지길~

구리로 만든 범종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울린다. 문득, 이 범종의 작은 울림이 간절히 듣고 싶다.


종 머리에는 용뉴라는 용 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옆에는 한국 종의 전통 요소인 용통이란 굵은 관이 달려있다.

네 방향 모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했고,

유곽 사이엔 보살 상이 조각되어 있다.

용뉴와 용통의 장식이 간소하고 종의 밑자락엔 무늬를 새기지 않은 소박함이 은은하다.

크지 않은 동종에서 긴 세월의 흔적이 가볍지 않게 드러나니, 멈춰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보광전 처마 풍경 / 보광전 왼쪽 문에서 바라본 안과 밖 풍경


보광전 입구 댓돌 위, 우리 부부의 신발 / 보호수 소나무


실상사 칠성각


칠성각은 재물과 재능을 주고 풍년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칠성신을 모신 전각이다.

1932년에 세워진 정사각 각 1칸의 자그마한 목조건물 어쩜 이렇게 예쁠까!

칠성각 쪽에서 바라본 보광전


왼쪽부터 명부전, 석등, 오른쪽 삼층석탑, 범종각


실상사 명부전


길선당의 옛 터에, 순조 21년 의암 대사가 명부전으로 옮겨지었다.

이곳에는 지장보살과 저승 십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불교가 널리 퍼졌다.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지장보살께 빌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불교는 민초들에게 이승에서는 바르게 살라 이끌었고, 저승에서는 왕생극락하도록 함께 염원해 주었다.



실상사 약사전

약사전은 약사불을 모신 곳이다.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중앙의 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약사여래는 몸과 마음의 병을 낫게 할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 이익적인 부처다.

인간의 생로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는 약사불은 우리나라에 약사 신앙이 전래된 이후 신앙이 되었다.

노년의 병든 사람뿐 아니라, 현실의 바람도 항상 많은 중생들이니 약사여래는 한마디로 매력적인 분이다.

비실 거리기도 하고 골골대기도 하는 나도 그냥 의지하고 싶어 지는.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 철로 만든 약사 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 불화가 있다.


실상사 철조 여래좌상

9세기경, 통일신라 시대의 철조 불상




실상사 대숲 법당 '바람 그물'


대숲 법당에선 작은 바람도 머물다 간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저절로 심신이 편해진다.

호흡은 깊어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숲을 스치는 실낱같은 바람의 울림이 살아있는 숨결처럼 느껴진다.

이 울림은 멀리서 들려오는 우리 손녀 꾸미의 옹알이 소리 같기도 하고, 처마를 울리다 말고 흩어지는 풍경소리의 아련함처럼 밀려들기도 하고, 심오한 독경의 울림처럼 들고 나기도 한다.

바삐 흐르던 일상의 뇌파 활동이 완화되고 알파파가 가득 차오른다.

우리는 이미 대숲 법당에 들어선 순간 알파 상태에 이른 듯하다.

살아서 천상을 산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나마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또 있으랴!



가끔씩 장난스러운 포즈를 묵직하게 드러내는 남자와 그리고 나


실상사 우주 예술창고와 작은 학교

우주예술창고 내부와 묵직한 철문
양혜당


작업장과 양혜당, 작은 학교 식당 등을 쓱 둘러본다.

실상사는 현재, 지역사회 문화 플렛 홈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리산 자락의 자연환경과 불교문화가 어우러진 사찰에서 누군가는 배움 길을 걷기도 하고 누군가는 지친 마음을 치유받기도 한다.

특히, 실상사 작은 학교는 불교계 유일의 대안 학교로 2001년 3월 설립된 비인가 중등 교육 기관이다.

학생들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배운다.

실상사 작은 학교는 모범적인 대안 중등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실상사를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 다시 보광전 안을 기웃거려 본다. 소박해 보이는 처마와 지금은 울리지 않는 풍경소리에 귀 기울여 가며.

하늘에선 따뜻한 봄볕이 흘러내리고, 오가는 바람은 스칠 듯 말 듯 부드럽다.

실상사 경내 풍경은 정물화처럼 시간까지 멈춰 세운 듯 조용하다.

산새 소리와 이따금 만나는 사람들이 정물화 서너 장을 밀어 넘긴다.




지금은 쓰임을 멈춘 실상사 맷돌


전시용 해우소!?


이곳은 뭐 하는 곳인가?

딱 1인용 아니, 2인용 카페 같다. ㅋ

뒷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일 수 있단 말인가!

들어서기 전엔 냄새가 날 것만 같았던 선입견이 곧 다 부서져 날아간 곳.



전시용 해우소 옆 풍경

사진 맨 왼쪽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언니 오빠들 모내기하는 모습을 구경 갔다 돌아오는 중.

우리가 사찰을 돌아볼 때, 모내기 구경 간다고 나서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 슬쩍 곁눈으로 담아놓았던 그 어린아이 들이다.


입구 오른쪽에서 안쪽에 있어 보광전으로 들어갈 때, 돌아 나가면서 들리기로 하고 그냥 지나친 곳이 있어 다시 발걸음을 전시용 해우소 반대쪽으로 옮긴다.

실낱같이 부드러운 바람에도 미동하는 노란 리본들이 멀리서도 선명하다.




반 외부 형식의 건축물 - 세월호 참사 '함께 울었던 첫 마음을 기억'하는 장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났을 세월호 백 여덟 번째 봄에도

또 다른 우리가 저승으로 향했을 그다음 이백 여덟 번째 봄에도

2014년 4월 16일 그날 함께 아팠던 첫 마음 계속 잊지 않길.....

그리고 이런 비극적인 일들일랑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실상사 목 탑지

실상사 목 탑지



실상사 돌 솟대


조계암 터 부도전과 약수암은 올라가 보질 않고 돌아 나왔다.

6박 7일간 '남원에서 살아보기'여행을 끝낸 나도 아직 피로가 덜 풀린 상태고, 묵도 부산 출장을 마치고 안양 집에서 나를 찾아 다시 남원까지 달려와 주었으니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겠지.

좀 늦었지만 모닝커피가 당기는 시간이다.



실상사 느티나무, 빵아제


친환경 농산물을 파는 '느티나무'는 실상사 입구 왼쪽으로 있다. 매장 입구 오른쪽 한편에 '빵아제'가 입주해 있다.

구운 김, 유정란, 김부각, 통밀빵 등을 사서 숙소인 선돌촌으로 돌아와 차 한잔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실상사와 숙소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좋다.

자동차로 5~10분여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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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여행' 다음 코스로 오후엔 몽심재와 수지 미술관, 교룡산성 등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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