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꿀 수 있는 욕망은 무한하나 모든 욕망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1991년 29살이던 위기철 작가는 남몰래 슬펐던 『아홉살 인생』 이야기를 세상에 툭 던졌다.
위기철 첫 장편소설인 『아홉살 인생』은 1960년대 서울 산동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각자의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가는데 이 책이 작은 보탬이나마 되길 바랐고, 우리는 그의 바람대로 9살 인생에서도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60년대 그 시절엔 9살 아이가 '세상을 느낄 나이'였던가! 여민이는 '지나치게 행복했던 아이가 아니었기에 9살에 벌써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주인공 백여민은 5살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지만, 당시 아이 들치곤 생각이 조숙했다.
2024년 5살 된 손녀를 가만히 바라보면, 행복해도 세상을 암팡지게 느끼는 것 같긴 하지만.
여민이는 '어떤 사람을 아무리 좋아해도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 -본문 163쪽 -로 상처받은 자존심에 아파하기도 했고, '가난은 슬픈 게 아니라, 싸워 물리쳐야 하는 것' - 본문 253쪽 -이라는 현실을 스스로 깨닫기도 하면서 9살 인생을 지나쳐간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온 여민이네 가족은 부모님과 여동생 여운이까지 4 식구가 산동네 가장 높은 곳에서 '숲의 새 주인'살이를 시작했다.
주먹다짐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여민이의 친구가 된 기종이는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와 단둘이 살고 있는 지저분한(더러운) 아이였다. 기종이는 다복해 보이는 여민이 네를 많이 부러워했다.
산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심하게 차별하는 담임선생님의 매질은 역겹다 못해 울분을 느끼게 했다. 기종이는 여민에게 말했다. "가난한 아이들을 때려 주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학교다. 넌 아직 그것도 몰랐니?"- 본문 71쪽 -라고.
『아홉살 인생』에 등장하는 인물 관계도는 네이버 천재 학습백과 미리 보는 중학 문학에 한눈에 딱 들어오도록 친절하게 나와 있어 참고할 수 있도록 가져왔다.
산동네에는 노모가 생선 장사로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수년째 고시 공부만 하고 있는 골방 철학자도 있었다. 사람들은 대학까지 나온 그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들 했다. 그는 여민에게 짝사랑(?) 편지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접근하면서 여민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본문 108쪽 - 이 골방 철학자는 부자들이 사는 산 아래 파란 대문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던 윤희 누나를 짝사랑했다. 얼마 후, 골방 철학자는 숲에서 목을 매고 자살함으로써 9살 여민이도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마을 최고의 속물은 산동네에 허름한 집을 여덟 채나 엉성하게 지어놓고, 매달 월세를 받아 가는 '오직 배 채울 궁리만 하는 인간'인 풍뎅이 영감이었다. 몸집이 땅딸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풍뎅이 할아버지 정식 호칭은 '최 영감님' 또는 '최 씨 할아버지'였다. 영감이 산동네에 나타나면 '방을 당장 빼라', '한 번만 더 봐 달라' 온 동네가 시끄러워지곤 했다. 영감 앞에서는 쩔쩔매다가 영감이 돌아가면 온갖 욕을 다 해대는 세입자들을 보면서, 9살 여민이는 이들이 비굴하고 치사해 보였다. 모두 속물이란 생각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말씨가 거칠었으나, 행동은 술을 먹었거나 싸움을 할 때를 제외한다면, 비굴할 만큼 소심하고 순종적인 편이었다. 풍뎅이 영감이 아무리 험한 욕을 퍼부어도 그들이 짹소리 한마디 못하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풍뎅이 영감은 방세 밀린 기종이 누나를 들볶았고, 여민이 아버지는 영감에게 건물이 남의 땅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임을 일깨워주었다. 풍뎅이 영감은 이후론 세입자들에게 큰소리를 질러대지 못했다. 여민이는, 아버지가 '무허가 건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미리 밝히지 않은 것을 알게 된 후, 아버지까지 교활한 속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을엔 별명이 난무했다. '쌈 쟁이네 집' 가장의 별명은 '오지랖', 아내는 덩달아 '지랖네', 큰딸 금복이는 '악바리' 둘째 딸 은복이는 '작은 악바리' 세 살 배기인 돈복이 까지 '돋보기'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 세 딸을 합쳐 부르는 별명은 '금은방'이기도 했다.
여민이 아버지는 '꼭대기 아저씨', 어머니는 '꼭대기 아줌마'란 애교스러운 별명으로 불렸다.
우림이는 9살 여민이의 첫사랑이었다. 여민이는 변덕스러운 꼬마 숙녀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었기에, 혼란스럽고 마음 한편이 아팠던 경험을 한다. 여자 아이란 매우 까다로운 상대였다. 윤희 누나도 '여자의 마음'에 관해 명쾌 답을 주진 못했다. "여자인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어쩌겠습니까? 여자의 마음에 대해 알려면 좀 더 자라세요. 대책이 없답니다." - 본문 134쪽 - 누나는 자꾸 키득키득 웃었지만, 여민이는 왜 그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골방 철학자가 윤희 누나를 짝사랑하던 그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까?
여민이에게 사랑은 귀찮은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윤희 누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몹시 귀찮은 일이지. 공연한 참견쟁이가 되고, 남의 인생 때문에 속상해하곤 하지. 그러면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아." " 참 이상한 일이야. 뭔가 아쉽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데, 사랑을 하면 더욱 아쉬워지게 되거든. 그래서 때때로 악당이 되어 버리지. 공연히 트집을 잡고 공연히 화를 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야...." -본문 163쪽-
어느 날, 여민이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으로 반 아이들은 누구나 여민이와 사귀고 싶어 했다.
지지리도 별 볼일 없던 여민이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지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여민이가 그린 그림이 전국 규모의 미술 대회에서 '꿈을 따는 아이'라는 제목으로 최우수상으로 뽑혔던 것이다. 여민이는 여동생 여운이가 밥 먹으러 안 오고 꾸물대는 모습을 그냥 쓱 그려놓고 제목도 '꾸물대는 아이'로 붙였을 뿐이었다. 여민이의 형편없던 맞춤법 실력으로 제목이 근사하게 바뀌었다. 담임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칭찬 일색이었지만, 여민이는 어리둥절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기종이만은 조금 달랐다. "나는 예전엔 너를 질투했었다. 네가 싸움을 잘하는 게 몹시 부러웠기 때문이다. 싸움은 산동네 아이들한테 꼭 필요한 거니까. 하지만 네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하나도 부럽지 않아. 그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 본문 155쪽 - 기종이가 말한 다른 나라란, 그림을 잘 그리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휴지를 잘 줍는 아이들한테 상을 주는 나라를 의미했다. 기종이가 예언한 것처럼 여민이는 동네 아이들의 싸움박질이 지긋지긋해졌고,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야' 하고 믿게 되었다. 대신 여민이는 칭찬을 받기 위해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이런 행운은 혼란만 가져왔을 뿐이다. 사실 여민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평소 길가에 박힌 돌멩이처럼 거의 눈에 띄지 않던 토굴 할매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이웃 사람들은 토굴 할매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올바로 알지 못했다. 여민이 아버지는 혼자 살아가시던 할머니 집 물독을 늘 채워 주곤 했었다. 여민 아버지는 이번에도 앞장서서 관을 지게에 얹어 메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이제 아침에 옆집 할머니네 물독을 채워 줄 일도 없어졌다.
아버지는 붉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주든 못해 주든, 한 번 떠나 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 - 본문 173쪽 - 이 말이 여민이도 슬프게 했다.
여민이 곁을 떠나는 사람은 또 있었다.
검은 제비네 아버지는 산동네 유명한 술주정뱅이였다. 온 가족이 그의 술주정으로 힘들어했다. 검은 제비는 주정뱅이의 장남이었다. 한 번은 보다 못한 여민이 어머니가 검은 제비네 동생들을 여민이네 집으로 몽땅 피신시킨 적도 있었다. 가족들을 먹여 살렸던 사람도 주정뱅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다. 검은 제비 어머니는 머리카락 장사를 했다. 주정뱅이는 그 해 가을이 되기 전 어느 날 잔뜩 취해 길가에 쓰러진 채 죽어 버렸다. 산동네 어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했다.
검은 제비는 곧 돈을 벌어야 한다며 건달 걸음으로 숲을 떠났다. 여민이는 기왕이면 '검은 제비가 잘 있는 쪽'으로 상상하며 살기로 했다.
기종이는 여민의 그림에 시비를 거는 유일한 아이였다. "... 너는 미술시간에 네가 그린 그림을 들고 교단 앞에 나가 이렇게 말했지. "이 기다란 노란 네모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나두 엄마를 무척 그리워하지만, 절대루 노란 네모처럼 그리워하지는 않아!" - 본문 191쪽 - 노란 네모는 여민이가 처음 얻게 된 별명이었다. 노란 네모는 직업적 이유(?)로 무수히 많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끔 된 여민이에게 썩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소설가로 살아가게 될 여민이는 직업상의 거짓말이 '노란 네모'가 아닌지 늘 조심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이 꿈꿀 수 있는 욕망은 무한하다.
거지는 왕자가 되고 싶어 하고, 왕자는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왕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
물론 모든 욕망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욕망은 마음속에 고이고 썩고 응어리지고 말라비틀어져, 마침내 오만과 착각과 몽상과 허영과 냉소와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우월감과 열등감이 되어 버린다.
이런 성격 파탄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현실에 맞춰 욕망을 바꾸거나 욕망에 맞춰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 본문 204쪽 -
여민이는 골방 속에 갇힌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한 골방 철학자를 떠올렸다.
그는 머릿속으로 판검사, 외교관, 소설가로 성공하는 온갖 욕망을 다 꿈꾸었으며 심지어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믿으며 지구에서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골방 철학자의 턱없이 큰 욕망, 어머니의 절대적 기대와 달리 그는 산동네 골방 속에 갇힌 현실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다. 걸핏하면 제 장래를 바꾸는 심한 증세를 떨쳐내지 못하고 스스로 사라져 갔다.
'아무리 활달하게 꿈꾸어도, 골방은 우리의 삶을 푹푹 썩게 하는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은 자유지만, 자유는 상상이 아니다.' - 본문 213쪽 -
고물장수 외팔이 '하'상사는 기종이 누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지만, 기종이는 누나를 하상사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으로 분노하고 힘들어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만나고 힘을 보태고, 그리고 강해진다. 그러한 세상살이 속에 사람은 결코 외톨이도 고독한 존재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본문 223쪽 - 결국 오누이는 하상사의 왼팔이 되었고, 하상사는 오누이에게 부모처럼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기종이네는 하상사를 따라 산동네를 떠났고, 9살 여민이와 기종이는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인간은 도대체 홀로 갈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어서, 황홀하든 끔찍하든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다. 고단한 세상살이를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해 저 혼자 아무리 고고하고 우아해지려 애써도, 세상은 결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는 법이 없다. 내 낭만적인 숲 속의 방랑에도 어찌나 훼방꾼들이 많던지!' -본문 242쪽 - 여민이에게 숲은 골방 철학자의 골방과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피난처나 은둔처, 휴식처가 아닌 그저 방랑의 장소처럼.
긴 겨울이 시작됐고, 여민이네 학교도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새해가 지나자 여민이의 아홉 살도 끝났다.
물론 '인생에는 죽는 순간까지 단절이 없다. 그냥 쭈욱 진행되는 과정이다.' - 본문 257쪽 -
살아가노라면 수만 가지 '때문에'로 혼자만의 울타리를 높게 쌓기도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9살짜리 여민이를 만나면서, 그 울타리를 높게 쌓으면 못된 거인의 정원처럼 봄이 찾아오지 못했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여민이가 전하는 앳된 목소리가,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다양한 목소리로 꺼내 들고 새봄을 맞이하시라!"라고 전하는 것만 같았다.
위기철 작가도, 여민이도, 우리도, 모두 각자의 이야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