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검절약 생활을 강조한 중세 가톨릭 시대, 서민들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중세는 신이 주관하는 세상이었다. 서민의 삶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세는 르네상스시대와 상반되는 의미로 중간에 낀 세대라는 뜻이다.
470년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1453년 동로마 제국 몰락까지 신앙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이집트 미술이 왕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스 미술은 인간을 위한 작품이었고, 중세 미술은 신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중세는 건축이 그림보다 중요했다. 그림 자체 의미보다는 건물 속에 그려진 의미가 더 중요했다. 유럽 역사 중심으로 본 중세는 476~1453 약 천년 간이며, 476~1000년(약 5백 년)을 중세초기, 1000~1300년(약 3백 년)을 중세성기, 1300~1453년(약 150년)을 중세후기로 보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둡던 중세는 시민이 아직 인간으로 존중받기 전, 아주 먼 옛날이다. 중세 거대한 성당을 마주할 때마다 그 건축물을 완성하기까지 서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묻곤 한다. 종종 신의 위대함보다 시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 옛 시간까지, 아득하게나마 우리 마음이 닿길 바란다.
4세기경부터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게르만 민족이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자리를 잡았고,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지방민족 사이에도 퍼져나갔다.
이교(異敎)나 아리우스 파(4세기 전반에 비잔틴제국의 교회 내에 일어났던 이단파)를 믿고 있던 지배자 계층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마침내 프랑크 제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종교 미술의 길이 열렸다. 중세 미술은 기독교 가치가 담긴 종교적 내용을 바탕으로 초자연적, 상징적 미술과 거대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고대 제국 붕괴부터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 경까지는 강력한 통일국가도 없었고, 지역 간 문화격차도 컸다. 서양 중세 미술은 천년이 넘는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모든 예술사를 아우른다.
지난주, 로마 시대 미술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상을 언급한 바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 (272년 2월~337년 5월)는 중기 로마 황제(재위 306년~337년)다. 동방 정교회는 모두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성인으로 추대, 성 (대) 콘스탄티누스(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호칭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 번째 기독교인 로마 군주로,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끝났다. 기독교가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된 것이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노예제도가 있던 그리스 로마시대 귀족들은 일을 하지 않고 예술만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중세 가톨릭교는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를 지나치게 강조했고, 미술과 예술의 암흑시대가 시작됐다.
800년, 비잔틴 제국, 이슬람 세력, 야만족의 족속(서로마 쪽)이 있었다.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야만족들도 나중에 기독교를 갖게 되고, 동서 쪽은 같은 기독교 국가가 된다. 1000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첫 승리를 거두지만, 나중에 예루살렘은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간다.
초기 기독교 미술로부터 비잔틴 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로 이어지는 14세기까지 서양화가들은 대부분 예수나 성인의 일생과 기독교적인 주제를 표현했다. 종교화를 더 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풍부한 색채와 금도금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중세 미술과 건축에서는 거대한 절대자의 힘이 느껴진다. 중세 종교의 절대적 가치 중심은 인간이 아닌 신이었기에.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회화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만, 서양 중세 미술 키워드는 신과 기독교 신앙이었다.
카타콤(Cataconb)은 초기 기독교 지하 공동묘지이며, 흙으로 구멍을 뚫어서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부활을 생각해서 시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지하에 그대로 묻었다.
기독교인들은 64년 네로황제 때부터 지속적인 기독교 말살정책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예배하며 생활했다. 카타콤 지하생활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계속됐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나왔을 때에는 거의 장님이 되어 나올 정도였다.
약 10평 정도 작은 공간에서 400명이 찬송을 하였고, 전염병이 돌면 삼분의 일이 죽었다.
카타콤 벽화에는 성서를 기초로 한 상징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카타콤 지하 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은 카타콤 벽에 ‘선한 목자’를 그렸고, 천장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 이야기'를 그려 넣으며 신앙생활을 했다. 요나(비둘기라는 뜻)가 고기에게 잡아먹혀 그 뱃속에서 3일간 들어가 있다 토해진 그림으로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천장 화가 그려질 무렵 그리스도가 공인되었다.
'선한 목자' 사진출처: 제주도민일보 - ( 3세기|프레스코(부분)|이탈리아로마, 선한 목자 쿠비쿨룸 프리실라의 카타콤 ) 발췌=「명화 1001」
'요나 이야기' 사진출처: 아트 칼럼 - 미술인선교회
기독교가 핍박을 받지 않을 때, 카타콤 지하 밖으로 나왔던 기독교인들 중, 타락한 세상을 보고 후회하며, 다시 들어가 생활하기도 했다. 카타콤은 나폴리, 시라쿠사이, 말타,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성 피에트로에 마첼 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세기 초, 로마) 속 인물 상들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는 점이 다르지만, 이교도인 로마의 그림 양식을 담고 있다. 이 벽화는 현세 행복보다 구세주와 함께 할 내세에 집중되어 있어, 초기 그리스도인들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비잔틴 미술은 5~15세기 후반까지 동로마 제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정교회 국가에서 발생한 건축과 회화 등의 시각예술로 4세기 경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동로마 제국의 예술품을 망라한다.
비잔틴 미술은 고대 로마제국의 미술을 계승하는 황제미술로 발전, 르네상스문화에 큰 영향을 준다. 비잔틴 미술의 특징은 돔(doom) 양식과 모자이크 장식을 꼽는다. 대표적인 건축물은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산 비탈레 성당과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 성당을 들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옛 도시 비잔티움에서 유래한 동로마 제국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를 통일하고 324년 수도 로마에서 비잔티움을 천도함으로써 신 로마가 탄생했다. 비잔틴 미술은 14세기 이전까지 서유럽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조상이자 원시 르네상스미술이기도 하다. 비잔틴의 미술은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서(西) 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발달했다. 5~6세기경 오리엔트 지역의 사실주의와 서양의 헬레니즘미술이 만나 동서양 미술이 융합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중앙 집중식 성당으로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가장 유명한 두오모다. 서유럽 비잔틴 미술에 중요한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여덟 개 라벤나 건물들 가운데 하나다. 성당은 팔각형의 평면을 띠고 있다.
건물은 로마 건축 요소(돔, 출입구, 계단 탑)와 비잔틴 요소(다각형 후진, 주두, 폭이 좁은 벽돌 등)가 결합해 있다.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밖에 그려진 가장 크고, 가장 잘 유지된 비잔틴 모자이크로 특히 유명하다.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547년경 모자이크인 '유스티아누스 1세와 수행원들'을 보면, 신이 아닌 황제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빛난다. 생존한 사람에게는 원래 정사각형 후광을 사용해야 하지만, 당시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후광은 그 권위가 흡사 신처럼 느껴진다.
모자이크는 비잔틴 회화를 대표한다.
모자이크 기법은 로마제국 당시 바닥 장식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사실주의 미술을 추구한 이 시기에는 건물 내부 장식 등에 프레스코 벽화가 많이 사용했다.
비잔틴 건축은 고대 로마의 건축과 달라졌다. 이전까지 종교 건축물 구조는 고대 그리스 신전 양식을 계승한 '바실리카'였다.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전소된 티르키에 '아야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면서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한 돔으로 설계됐다. 돔을 지탱하기 위해 네 개의 아치가 돔을 지탱하도록 했으며, 볼트의 일종인 역삼각꼴의 구조체로 네 개의 아치를 연결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은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명으로 건설, 537년 12월 축성된 성당으로 정교회의 총본산 역할을 했다.
아야 소피아는 당시 어떤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졌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아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다. 수백 년 뒤 르네상스 시대 세워진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이전까지 돌이나 벽돌을 쌓아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조적 돔이기도 했다.
잠시 기원전 27년으로 돌아가, 고대 유산 판테온 둘러보고 오기!
판테온은 세계 최초의 돔 건축물이자 서양 건축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그리파가 올림포스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처음 세웠다고 전해진다.
아그리파 집정관 때 처음 만들어진 건축 흔적이 석판에 그대로 남아있다.
판테온 내부는 여러 개 두꺼운 벽체가 둥글게 감싸 안은 돔 구조다. 벽에 창은 없다.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는 둥근 천장 구멍에 있다. 태양 빛이 스며드는 이 천창은 '오큘러스'라 불리며, 신전 내부를 밝혀주는 유일한 자연조명이다.
시칠리아섬 북서부 티레니아 해 팔레르모 만에 위치해 있는 팔레르모 성당은 1185년 완공됐으며 동로마, 이슬람, 노르만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중세 성당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두꺼운 벽체와 기둥, 아치, 돔, 작은 창문을 지녔으며,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 로마네스크의 건축 대부분은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고 있으나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조각만큼 많지 않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기원후 약 1,000년부터 13세기 이후 고딕양식이 나타날 때까지 서유럽 미술이다. 로마네스크는 종교적 성향이 강한 고딕양식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타난 양식으로 인간과 이성, 자연의 고대시대를 지나 신비로운 신앙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특색을 지다.
11세기초~12세기 중엽까지 로마풍의 돔을 지닌 중후한 양식의 건축물은 삼각형 지붕, 아치형 창,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벽면이 특징이다.
가장 대표적 건축물로는 피사의 대성당을 들 수 있다.
피사 대성당은 유럽 중세, 상업도시였던 피사에 위치해 있는 로마네스크 건축을 대표하는 성당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Domo di Pisa)으로 토스카나 풍(風) 로마네스크 양식(樣式)의 건축이다. 1063년 착공, 50여 년간 공사를 거쳐 완성했다.
피사 대성당은 '피사의 사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종루, 세례당, 묘지 캄포 산토(성스러운 토지) 등을 갖추고 있다. 이 성당은 팔레로 모 해전 승리를 기념, 그리스인 부스 케투스(Buschetus) 설계로 기공했고, 1118년 헌당됐다. 12세기말, 라이날 두 스(Raynaldus)가 서측 부분을 연장해서 돔을 설치했고 가장 마지막으로 13세기 이 정면 파사드를 완성, 준공했다.
대성당 중심축 제단 위 돔 주변에는 고딕 양식 장식물이 있다. 이 돔은 1595년 화재로 소실, 복구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이 아닌 고딕 양식이 가미되었다. 3개 청동 출입문 위로 4층 기둥으로 장식된 개방된 형태 회랑이 있다.
두오모는 로마네스크 양식 걸작으로 아름답지만, 부속물인 종탑이 너무 유명세를 치르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감도 있다. 피사시와 피사 대성당은 종탑 덕분에 유명 관광지로 남아있나 싶기도 했지만, 막상 대성당의 위용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나면, 그런 생각도 이내 사라진다.
대성당 출입문은 고풍스럽고 육중한 느낌을 준다.
부조로 장식된 3개 청동문은 원래 Gimbologna가 만들었으나 1595년 화재 후,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다.
청동문 위에는 비잔틴 영향을 받은 화려한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뒤쪽 청동문에도 같은 모자이크 장식이 돋보인다.
피사 성당에는 바실리카풍의 단면을 가진 5 회랑식 회당부가 있다. 대리석의 가로무늬 모양의 석조물 배합으로 외부가 선명하다.
둥근 지붕이 있는 복도와 측주(側柱)가 둘러쳐져 있으며, 서쪽 정면(正面) 상부 4층은 개방된 열주(列柱)로 장식되었다.
대성당 내부에는 '조반니 피사노'의 대표작인 설교단이 있다. 설교단 앞에 갈릴레이가 진자의 원리를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는 ‘갈릴레이의 램프’도 있다.
1235년 설립된 독일 트리어 대성당은 트리어에 있는 트리어 교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벽돌 재질로 지어졌고 실제로 보면 정말 큰 건물이다. 대성당 주변으로 나무가 많다.
고딕 미술(고딕 예술)은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말 북부 프랑스에서 발달한 중세 미술로 고딕 건축과 함께 발달했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까지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다.
고딕은 과거 고트족 미술과 문화를 지칭한다. 옛 로마제국과 고대 문화를 파괴했던 고트족은 이방 오랑캐이다. 고트족의 미술은 야만적이며, 무지하고, 고전적인 미적감각이 결여된 낙후한 미술로 치부했다. 이런 경멸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고딕미술이지만 오늘날 고딕미술의 정의는 중세미술 전체를 통칭한다.
고딕미술과 건축의 특징은 뾰족 첨탑, 스테인드글라스를 들 수 있다. 첨탑식 고딕 건물의 긴 창문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아름답고 정교하게 꾸며졌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 독일의 쾰른대성당이 유명하다.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은 고딕 성당의 대명사이다. 건축물을 지을 때 새로 개발한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성당 건축에서 좌우의 측랑 사이에 끼인 중심부인 신랑에 여러 개의 커다란 창문을 만들었다. 성당은 벽 대신 채광창에 원형, 사각형, 마름모꼴 등의 프레임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 총 2000제곱미터가 넘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 석재의 흰 빛과 선명하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다. 서쪽 주출입구와 남북 쪽 트렌셉트(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 상단)엔 화려한 장미창이 있다. 장미창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경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 장미 창은 프랑스 북부 주요 고딕 양식의 성당들에서 관측되고,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다양한 형태를 띠다가 19세기부터 고딕 복고양식으로 전 세계 기독교 교회들에서 나타난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114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194년의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12세기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사이에 재건되었다.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제작 당시 원형이 많이 남아있어 미술사적, 역사적 가치가 높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1979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노트르담 드 대성당은 프랑스 파리 시테 섬 동쪽에 있는 후기고딕 양식 성당으로 1163년 착공, 1345년 완공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 건물로서 파리 대주 교좌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히 프랑스 고딕 건축 정수로 이야기된다. 프랑스 유명 건축가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복구됐다. '노트르담'은 '우리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프랑스혁명 이전 전근대 사회에선 기득권 사회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성직자는 프랑스 귀족 계층에서 배출되었으며, 귀족과 기득권층 법률적 옹호기관인 고등법원 관료 역시 노트르담 대성당 성직자들과 혈연관계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혁명 당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고,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도 그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 무대가 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혁명 당시 귀족 문화, 종교문화 자체를 증오하던 시민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됐고, 성당 내부도 외양간으로 쓰이는 등 수모를 겪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빅토르 위고는 성당 훼손과 파괴를 막으려고 '파리의 노트르담'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이 인기를 끌면서 평판도 좋아져 성당을 재건하게 된다.
1804년 12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한 곳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 센 강변 일대 자연환경과 그 주변 문화유산인 에펠 탑, 루브르 박물관 등과 함께 하나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에서 화재가 발생, 약 10시간 만에 진화됐다.
보수 공사 중이던 첨탑 주변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첨탑과 그 주변 지붕이 붕괴되었다.
우리나라 숭례문과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물론 발화 연대나 원인이 각기 다른 화재였으나, 귀중한 문화재가 한순간 잿더미로 변한 아픔과 안타까움은 이심전심이랄까, 서로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서울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된 사건이다. 방화범은 구속 수감되었다.
성모가 예수 어머니로 표현된 건 5세기부터였고, 중세시대부터 보편적으로 쓰였다.
'온유한 성모', '수난의 성모' 2점은 제한적인 표현으로 예술적 한계가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중세의 다양한 상징과 의미가 담긴 *이콘 성모자상으로 의미가 크다.
*이콘: 러시아의 전통적인 미술의 한 형태. 종교나 신화와 같은 관념 체계를 바탕으로 특정한 의미와 유형화된 양식에 맞게 표현하는데, 주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성인 따위를 묘사한다.
온유의 성모
엘레우사(Eleusa)는 그리스어로 ‘자비, 부드러움’을 뜻한다. 이 '온유의 성모' 성화는 12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려져 키예프를 거쳐 블라디미르로 오면서 ‘블라디미르의 성모’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수난의 성모
이탈리아 로마 성 알폰소 구속주회 성당 중앙 제대 위에 모셔진 41㎝×53㎝ 크기의 *이콘(ikon)으로, 14세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성모 왼쪽 천사는 성 미카엘이고, 오른쪽 천사는 성 가브리엘이다. 미카엘 천사는 해면이 꽂힌 막대기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들고 있다. 오른쪽 가브리엘 천사는 십자가와 못을 들고 있다. 성모자를 그린 이콘과 성화에서는 두 천사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쾰른 대성당은 독일 쾰른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쾰른 대교구 주교좌성당인, 쾰른 주교좌성당이라고 불린다.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일컬어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쾰른에서는 로마제국 식민지였던 1~4세기 사이에 지어진 로마식 주택 흔적이 발견됐다. 내진 밑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최소 4세기 이후부터 당시 쾰른 첫 교구장 주교였던 마테르누스의 지시로 지어진 정사각형의 '최초 성당'을 포함, 기독교와 관련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쾰른 대성당은 신성 로마제국 시절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가져온 동방박사 3인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한 곳으로 124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지만, 오랜 건축 기간을 거쳐 결국 1880년 네오고딕 양식으로 완공됐다. 높이 157.38미터로 울름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 성당이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다. 중부 움브리아의 오르비에토 마을에 위치한 14세기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성모 마리아 승천에 헌정되었다. 1986년 이래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이전 토디 교구의 주교 자리이기도 하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웅장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절벽 위 작은 중세도시에 이렇듯 거대한 규모의 두오모가 있다니, 오르비에토 광장에 들어선 순간 모두 놀라게 된다.
1263년 오르비에토에 거주했던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볼세나의 기적'을 보고 받고, 오르비에토 대성당 건축을 명령한다.
두오모 정면 파사드는 오르카냐와 파사노의 작품이고, 성 브리지오 예배당 프레스코화는 안젤리코로부터 시뇨렐리가 마무리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1290년 착공, 300년 동안 공사를 진행 1600년 경 완공했다. 성당 전면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화려하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문이 아름답다.
크고 넓은 기둥의 섬세한 부조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극치를 보여준다. 4개 기둥을 장식하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형상화한 부조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늘로 뻗어 오른 고딕 양식 첨탑과 박공을 장식하고 있는 황금빛 모자이크는 화려함과 신비로움을 드러내고, 건축물 외관은 석회암과 현무암이 줄무늬 형태로 보이도록 되어있다.
성당 안에 있는 성 브리지오 예배당 프레스코화도 유명하다. 성당 내부에는 모자이크와 조각 및 부조로 신구약 주요 인물과 장면들이 소상하게 재현되어 있다.
사진 설명: 바티칸 사도 궁전에 있는 라파엘로 '볼세나의 미사' 1512년 - 성체에서 예수 피가 흘러내렸다는 '볼세나의 기적'을 표현한 프레스코화
오르비에트 대성당 벽화인 루카 시뇨렐리 '최후의 심판, 지옥의 영혼들'(부분) 1500~1504년 / 루카 시뇨렐리 '최후의 심판, 잠에서 깨어나는 영혼들'(부분) 1500~1504년
중세 미술사의 일부분을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훌쩍 천년의 세월 지나갔다. 유럽은 어딜 가나 성당이 보이고, 문외한인 내 눈에는 모든 성당이 대부분 비슷해 보인다. 우리나라 명산마다 있는 유명 사찰도 구조나 형태가 비슷해 보이듯이. 그러나 좀 더 관심을 갖고 보면 모두 다르며 각기 특별하다.
미술사를 통해 모르던 부분을 알게 되는 기쁨도 크지만,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니, 찾아보고 익히는 과정도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기원전 400년 즈음 남긴 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의미가 딱 들어맞는다. 긴 여운을 남기는 짧은 문장에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가까이 두고 살다 보면, 우리네 인생도 결코 짧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