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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May 10. 2024

고대미술을 통해 고대인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교감한다

매주 금요일마다 시대별 미술사로 시간여행하기


미술사는 인류 역사이며 기록이다. 

인류가 남긴 모든 흔적 속에는 시대상과 이야기가 담겨있다.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동굴벽화를 들여다보며 당시 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다가올 미래까지 담고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남긴 미술품을 통해 그 시대의 가치를 교감하고, 어떤 순간 아름다움의 기준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을 통해 역사가 통과해 온 긴 터널의 시간여행은 고급스럽고 멋지다.

해외여행 시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는 세계인들 발길이 멈추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미술관마다 몰려드는 인파로 막상 벼르고 별러 방문해도 제대로 된 명화 감상은커녕, 마음에 드는 인증숏 한 장 남기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서면 아쉬움만 남았고.

명화를 제대로 꼼꼼하게 감상하려면, 차라리 컬러판 명화 책을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뭐, 여행은 여행이고, 명화 감상은 명화 감상이질 않나!

서양미술 연대를 살펴보면, 고대 ->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 18세기 -> 로코코 ->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 19세기 -> 사실주의 -> 인상주의 -> 후기인상파 -> 20세기 전반 -> 20세기 후반으로 나누고, 이번 회엔 고대 미술사를 들여다본다. 

고대 미술 ( ~3C)은 선사시대를 이어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시대로 이어진다. 



선사시대 

구석기인들은 컴컴한 동굴에다 수많은 그림의 흔적을 남겼다. 벽화는 4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제작되었다. 그들은 주요한 사냥도 하지 않고 왜 그곳에 틀어박혀 벽화를 그렸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술표현은 이성적이지 않은 활동이었을까?


사진 출처: 위키백과 - 라스코 동굴 벽화 / 알타미라 동굴 벽화


뿔 달린 동물이 두 발로 서있다. 사람인지, 동물(사슴)인지 알 수 없는 뿔 달린 동물이 두 발로 서 있기도 하다. 현대인은 13만 년 전 이 그림에 '마법 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벽화는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비례와 조화도 뛰어나다. 

책에서 마주한 구석기 사람들 그림 실력은 21세기 우리가 보아 대단해 보인다. 

어두운 동굴 속에 그려진 동물들은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고, 천정까지 가득 채워진 그림이 놀랍기도 하다. 얼굴 없는 세계 최초 빌렌도르프 비너스의 풍요로움은 신비롭고, 밀로의 비너스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황금비율을 보여준다.  


라오콘 군상(Gruppo del Laocoonte)

라오콘 군상은 기원전 2세기경 조각품으로 바티칸 박물관과 헬레니즘 미술을 대표한다.

이 작품은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헬레니즘 미술을 대표하기도 한다. 1506년 로마의 농부가 발견한 공중목욕탕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트로이전쟁을 묘사한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나오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트로이 목마의 비밀을 말한 트로이 사제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이 신들이 보낸 바다뱀에 질식해 죽는 장면이다. 뒤틀린 라오콘 몸, 고통에 벗어나려는 두 아들 모습을 통해 인간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고대 그리스 대표 조각상으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 여신을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높이 202cm이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였던 밀로스 섬 농부인 요르고스 '켄트로 다스'에 의해 발견됐다. 켄트로 다스는 집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가 이 아름다운 석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농부는 이 귀한 조각상을 오스만 터키군에 빼앗길까 우려해 집에 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결국 터키 당국이 강제로 이 석상을 빼앗아간다.

며칠 후, 이 비너스 상의 존재는 당시 이 부근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의 빌(Jules Dumont d'Urville)에 의해 프랑스 본국에 보고됐고, 프랑스 정부는 당시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샤를 프랑수아 드 리카르도를 통해 해당 석상 구입 의사를 밝힌다. 

당시 군사 강국이어던 프랑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쟁이 날 것을 우려한 터키 정부가 이 제의를 받아들여 비너스상은 프랑스로 실려갔다, 1821년 루이 18세에게 바쳐져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됐다. 

출토될 때부터 팔이 없었던 이 작품은 터키를 통해 프랑스 정부가 사 간 것이다. 1821년 당시 모습을 드로잉 한 스케치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오른쪽 팔이 좀 더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작 밀로스 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또 다르다. 

석상을 놓고 밀로스 섬 현지에서 프랑스와 터키 해군 간 격전이 있었으며, 서로 가져가려다가 비너스 상에서 팔이 잘려나가 바다에 빠졌고, 이것을 프랑스 함대가 건져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일각에선 루브르 박물관이 약탈 후, 정식 수입 작품으로 꾸미기 위해 남은 팔까지 더 잘라내 아예 팔이 없는 석상이 됐다는 설도 있다. 

그리스 밀로스 섬에서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프랑스 전시 약탈 문화재로 규정하고, 밀로스 섬으로 귀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리스 정부도 공식적으로 이 문화재가 발견된 지 200주년 되는 2020년까지 프랑스 측에 반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 및 보관 중인 작품 상당수가 해외 약탈 문화재이니, 그리스 정부 요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이 귀한 물건(작품)을 소장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고, 한 국가도 힘이 없으면 조상들의 찬란했던 문화유적과 미술품조차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크게 위안이 되진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해도 그 유적은 사라지거나 그 빛나는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며, 영원히 약탈자의 문화유산이 아닌 것은 사실이질 않는가!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셨던 '문화강국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작은 주먹을 다시 불끈 쥐게 된다.  

김구 선생은 1945년 8·15 해방 이후, 좌우대립의 커다란 혼란 속에서 민족자존과 독립사상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분투하셨다. 그분이 꿈꾸셨던 나라는 '민족이 하나 되어 문화로 융성하는 나라'였다. 백범 선생이 강조했던 말씀은 “한없이 갖길 원하는 것은 경제력도 군사력도 아닌 오직 높은 문화의 힘”이었기에 더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빌렌도르프 비너스

1908년 오스트리아 니더 외스터 라이히 주 빌렌도르프 근교 구석기시대 지층에서 발견된 11.1cm의 여자 조각상이다. 이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어란상 석회암으로 만들어졌고 석간 주로 칠해져 있다. 

1990년 조각상 발견 지점 주변 유적 층위 분석 결과, 이 석상은 2만 2000년~서 2만 4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빌렌도르프 비너스'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당시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리는 매우 굵고, 가슴과 배는 불룩 나와 있고, 엉덩이도 매우 발달해 있어, 생식과 출산, 다산 상징인 주술적 숭배 대상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작고 가는 팔은 가슴 위에 올려져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땋은 머리, 또는 모자의 일종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상적인 여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선사 시대 유럽 풍요의 여신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다산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면 뚱뚱함 몸은 당시 수렵 생활을 하는 사회에서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을 나타낼 수도 있다. 

'성공과 안녕의 상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석상 다리는 스스로 설 수 없는 형상이다. 세워 놓기보다는 지니고 다니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석상이 '여신'이라기보다는 '행운의 부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11여 cm 짜리 작은 석상이 후세에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석상은 아무 말도 없고, 기록도 없던 고대였지만, 당시 사회상을 전해주는 귀중한 고대 유산으로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현재,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빈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빌렌도르프 비너스 / 벨베데레 토르소(Belvedere Torso)


벨베데레 토르소(Belvedere Torso)

바티칸박물관을 대표하는 '벨베데레의 토르소'(Belvedere Torso) 상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로마시대 때 모방해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벨베데레 뜰로 옮겼다. 교황은 없어진 팔과 다리를 복원하길 원했지만, 대부분 작가들이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인간 육체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걸작으로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후대  많은 조각가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던 작품이다.



바벨탑 

바벨탑은 구약성경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탑이다. 

창세기 11장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쓰는 동일한 언어와 이에 따른 일종의 타락과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바벨탑/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 더' (1527년경 - 1569년 9월 30일) 브라반트 공국의 화가

'바벨탑 석비 Tower of Babel Stele'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비문에 지구라트의 건축을 위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모아 건축에 동원시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유수기 동안 당시 아나톨리아,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등 유럽과 가까운 서아시아 사람들과 에케멘앙키 건축에 동원된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제각기 달라 온갖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러 혼란을 마주했고, 이로부터 바벨탑 이야기가 파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동전에 새겨진 바빌론 황제, 네브카드네자르 옆모습

바빌론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은 여러 문헌에서 많이 거론된다.

특히,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바벨탑과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유명하다. 전설적인 고대 바빌론의 문 이 도시에서 발굴되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 속에서나 나오는 전설 중 하나로 치부했으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그 실체를 찾아내면서 실존했던 도시임이 드러났다. 

바벨탑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도 등장한다.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시 신화 노아의 방주와 거의 동일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보다 더 오래된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자체가 하나로 결합된 여러 시를 포함하고 있다. 12개 토판으로 연결되어 있고, 11번째 토판에 홍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Robert Koldewey(1855~1925)는 독일 고고학자로 18년간 바빌론 유적을 발굴, 바빌론이 실제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바빌로니아는 강대한 고대 도시국가였다. 수도 바빌론은 구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더 번영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남동쪽에 위치한 바빌론은 인류 문명 중 초기 2천 년 가량 세계 중심이던 도시였다. 

인류 문명 초창기 관개농업을 시행한 도시들 중 하나였고, 현재 사용하는 시계의 60분 체계를 확립한 나라다. 잉여 자원을 통해 교역을 적극적으로 시행한,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고대도시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성경 속에서도 바빌론을 탐욕과 죄악이 가득 찬 악의 도시로 그리고 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다고 하지 않던가!


바빌론은 사라졌어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계속 오리엔트 세계 중심 지위를 누렸다. 

바빌론 위상을 대체한 크테시폰이 이슬람교 발흥 이후, 사산 왕조에 쳐들어온 아랍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 옆에 또 다른 새로운 도시 바그다드가 세워지면서 수백 년 동안 번영했다. 

그 후, 수천 년에 걸친 집약적 관개 농업으로 토양 염화와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훌라구의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파괴해 폐허로 만들었다. 역사는 덧없이 흘러, 찬란했던 그 도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로 남아있다.


사진 출처: 나무위키 - 바빌론 3D 복원도

한가운데에 푸른빛 문이 전설적인 바빌론 문이다. 그 옆으로 바벨탑으로 알려진 마르두크의 대신전이 우뚝 솟아있다.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지금까지 그 원형 색깔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그리스 조각품들도 원래 빨, 노, 파 등의 색깔이었지만, 오랜 세월 햇빛과 비바람에 탈색되었기 때문에 하얗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메소포타미아 조각과 미술품이 더 위대해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이집트 피라미드, 중남미 마야 잉카 이즈택 문명으로 흘러갔고, 한국 석굴암(불상 의상이 흐르듯 표현된 기법)과 일본 7층 집(피라미드처럼)까지 흘러왔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엔 이층 집이 없다. 탑 종류는 7층, 9층이 있어도 집은 2층조차 짓질 않은 것이 특이하다. 

기후나 자연환경 때문이었을까? 온돌생활을 하기 때문일까? 

얼마 전, 진천 만뢰산 보탑사에서 1층 대웅전, 2층 법보전, 3층 미륵전 품은 3층 목탑을 올라가 보긴 했지만, 이 목탑은 고려시대 절터 위에 1996년 창건한 국내 유일의 목탑이었기에, 고대로부터 2층 이상의 집을 짓지 않은 그 이유가 여전히 궁금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정복한 국가들에서 끌고 온 수많은 노예들 착취해서 짜낸 고혈의 결과물이란 설(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생산한 통설)이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 '마크 레너'와 '자히 와히드' 등의 주장은 이를 뒤집고 있다. 

정부와 동등한 계약을 맺은 일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역작이었다는 견해다. 

이들은 풍족한 임금을 받았고 하루 8시간만 일했으며 8일을 일하면 2일을 쉬었고, 채찍질도 없었고 휴일에도 임금이 나왔다. 일당이 밀리면 파업을 했고, 피라미드 옆에 자기 자신을 위한 무덤을 세우기도 했다. 


사진출처: 나무 위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상  

이집트에는 '왕들의 계곡'이 있다. 

유물은 거의 다 도굴당했고, 이집트 유물을 보려면 차라리 영국 박물관으로 가는 게 낫다.

이집트에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많은 미라뿐이다. 

현재, 이집트에 살고 있는 이집트 사람들은 이슬람인 들이고, 실제 파라오의 후예인 이집트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파라오인이 살던 이집트는 BC 3,000년 전부터 3천 년간 유지되어 온 대단한 국가다. 



스핑크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 시 스핑크스의 코에 포를 쏘았다. 그때 스핑크스의 코가 무너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나폴레옹이 만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핑크스(Sphinx)는 원래 그리스 미술과 설화 속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사자 몸통과 다리와 발에 여자사람의 머리, 그리고 조류 날개와 뱀 꼬리가 달린 짐승으로 묘사된다. 

스핑크스라고 하면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가리키는 경우기 많다. 스핑크스는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했다. 가장 오래된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는 길이 80m에 달하는 스핑크스다. 

이집트 스핑크스는 그리스 스핑크스로 재탄생한다. 그리스 스핑크스는 규모가 작고, 여성적이며 날개가 달렸다. 기원전 530년 경에 만들어진 그리스 스핑크스는 사악한 여성 괴물이었다. (아래 오른쪽 사진)        


사진출처: 위키백과, 기자의 대스핑크스 / 그리스의 스핑크스


당시 이집트는 일부일처제 국가였고, 모든 것을 파피루스에 기록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성스러운 문자로 생각했고, 세계 최초의 종이책 '사자의 서'는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로 쓰인 두루마리 책이다.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 탑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탑이다. 사람을 죽여 계단으로 굴러 떨어트렸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제물로 삼았던지, 나중에 인구가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사진출처: 멕시코 피라미드 속 '제3의 피라미드' 발견.. 마야 문명 단서되나 - 파이낸셜뉴스


중남미 마추픽추, 잉카제국 옛 수도 쿠스코에 관한 설명도 흥미롭다.

특히, 페루 나스카 평원의 거대한 문양은 아직까지도 불가사의하다. 거대한 문양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아야 보인다. 1939년 하늘 위에서 처음 확인된 나스카 라인은 태평양과 안데스산맥 사이에 위치한 나스카 평원 곳곳에 그려져 있다. 

약 1~6세기 고대 나스카인들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양으로 원숭이, 도마뱀, 고래 등 동물을 비롯, 각종 기하학적 도형까지 수백여 개가 발견되고 있다. 

나스카인들은 이처럼 거대한 지상화를 왜 그렸을까?


사진 출처: 나무위키 - 페루 나스카 평원의 거대한 문양 / 잉카제국 옛 수도 쿠스크


'모아이'석상

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칠레 이스터 섬에는 수백 개 '모아이'상이 태평양을 등지고 서 있다. 

이스터 섬은 폴리네시아 제도 끝에 해저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섬이다.

칠레 영토에서 가장 외딴섬으로 본토에서 서쪽으로 약 3,500㎞ 떨어져 있다. 

약 2900년 전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처음 이 섬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민들은 이스터 섬을 ‘커다란 땅’을 의미하는 ‘라파누이(Rapa Nui)’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의 제독인 야코프 로헤베인(Jakob Roggeveen)이 오랜 항해를 하던 중, 1722년 부활절에 이 섬을 발견했다. 


사지 출처: 나무위키 -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모아이(Moai)라 불리는 887개 석상은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100~168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상의 높이는 대부분 약 3.5~5.5m, 무게는 20톤 정도 되지만, 일부 석상은 높이가 10m, 무게가 90톤이 나가기도 한다. 이런 석상이 이 작은 외딴섬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고대인은 이곳에, 이런 석상을 왜 만들었을까?

고대 미술사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 고대 미술을 보는 커다란 즐거움은 배가 된다. 

칠레 이스터 섬에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다. 



네페르티티 흉상

당시 최고 미인 얼굴인 이집트 왕비 조각상으로 아름다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아케나톤 왕(재위 B.C. 1379년경~1362년경)의 부인이다. 

네페르티티의 오른쪽 눈은 처음부터 그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왼쪽 눈만 그려져 있다. 

흉상에서는 도도한 여왕이라기보단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느낌이 전해진다. 

이 흉상은 이집트가 아닌 서 베를린 국립미술관(샬롯덴부르크 중 이집트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집트 3대 미인으로 네페르티티, 네페르타리(람세스 2세의 부인), 클레오파트라가 꼽힌다. 


네페르티티 흉상 / 투탕카멘 황금가면


투탕카멘 황금가면

이 황금가면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투탕카멘 왕의 유물이다. 룩소르 왕들의 계곡의 무덤 군에서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은 중신 '아이'와 노장 '호렘헵'(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묘가 테베 서쪽 교외 외곽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 된 탓으로 도굴당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유명해졌다.

붕대로 감은 미라 얼굴에 파라오 얼굴 모양대로 만들어진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이마 위에는 이집트 수호신인 대머리 수리와 코브라가 조각되어 있다.


파라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23년경, 후손을 남기지 않고 18세에 사망했다. 

총사령관이며 ‘왕세자’의 칭호로 불리고 있던 호렘헵(Horemheb)이 그의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호렘헵은 아시아에 나가 있었고, 그사이 재상이었던 '아이'가 먼저 손을 썼다. 

아이는 투탕카멘 왕비인 안케 센 아멘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고 파라오 자리에 올랐으나 재위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호렘헴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음 파라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안케 센 아멘 왕비는 투탕카멘 왕의 이복누나로 당시 사회는 근친혼이 많았다.  

안케 센 아멘 왕비도 아이 사후, 호렘헵에 의해 숙청당했다고도 전해지지만, 아이와 결혼한 이후 모든 기록이 사라져 그 사실을 알 순 없다.

유능한 왕이었던 아이도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죽기 전 그의 오른팔로 일해온 재상 파람 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파람세 스는 람세스 1세로, 이집트 제19왕조 시조다.(호렘헵을 19 왕조 시조로 보기도 한다)


람세스 1세는 이집트가 지중해와 만나는 나일 삼각주 중, 옛날 힉소스(Hyksos) 족이 점령했던 지역 출신이다. 아시아계의 핏줄이 섞인 것으로 보이며, 군인 가문 자손이었는데 귀족, 또는 평민이었다고 전해진다. 

람세스 1세는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죽지만, 아이나 호렘헵과는 달리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가 세티 1세이며, 세티 1세도 다시 10여 년 뒤 아들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죽는다. 

그 아들이 바로 유명한 람세스 2세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파라오를 꼽으라면 투탕카멘 클레오파트라, 람세스 2세다.

람세스 2세는 위풍당당한 왕의 이미지로 명성을 누렸다.


람세스 2세 왕비, 네페르타리 18 왕조 파라오 아이의 증손녀, 또는 파라오 아크나톤 왕비 네페르티티의 방계 혈족으로 추정되며, 람세스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그녀가 왕 재위 40년경에 죽자, 람세스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무덤을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다. 

람세스의 수많은 왕자들은 군대 지휘관이 되거나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 사제로 일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그가 수립한 종교 질서 상 최고의 권위를 갖는 카르나크 신전 제사장직은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평생 스스로 겸임했다. 

오랜 재위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난 흔적은 보이지 않다. 이는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리더십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람세스는  90을 넘긴 나이에, 노령으로 숨졌다.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미라를 보면 매부리코에 강한 턱을 가졌으며, 이집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붉은 머리였다. 

부왕이 60여 년이나 재위하다 보니 아들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으며, 왕위는 열세 번째 아들인 메네프타에게 돌아갔다.


사진 출처: 나무위키 - 룩소르 신전 / 람세스 2세


룩소르 신전 

룩소르 신전은 나일강 동안에 있는, 정교하고 거대한 예술품이다.

4천 년이 지난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신전에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곳은 현재 룩소르라 불리는 고대 도시 테베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전 단지다. 

아문 신에게 바치는 보다 작은 규모의 중왕국 시대 구조물이 있던 자리 위에 세워졌다.


'스핑크스의 길' 룩소르 신전에서 시작하여 북부의 카르낙 신전까지 3킬로 미터가량 뻗어 있다. 높이가 24미터에 달하는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00년, 제19왕조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세운 것이다. 

신전 입구 '스핑크스의 길'이 끝나는 곳에 서 있다. 

원래 두 개였으나, 하나는 1829년 프랑스 왕 루이-필립에게 주어져 지금은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 그 입구는 역시 람세스 2세가 건축한 열주식 안뜰로 이어진 뛰어난 건축물이다.



아부 심벨 대신전 

람세스 2세의 웅장한 석조 신전들이며, 람세스가 영광을 떨치기도 했던 곳이다.

1813년 스위스의 동양학자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되었을 때, 신전은 거의 모래에 뒤덮여 있었다. 


사진출처: 나무위기 - 아부 심벨 대신전

이탈리아 도굴꾼 조반니 벨초니가 1817년 무덤 안에 들어가, 갖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다 가져갔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에게 바쳐진 두 번째 신전이자 좀 더 작은 신전이, 람세스 2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라고까지 일컬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한 건축물이다.

1960년대 초,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고 있을 무렵, 유네스코는 세계적인 캠페인을 통해, 자금과 전문적인 기술을 동원하여 아부 심벨 신전들이 나세르 호수 물에 잠기지 않도록 더 높은 지대로 옮겼다.


신비한 고대 미술

이집트 찬란한 문화는 인류의 소중한 미술사이기도 하다. 

이집트 미술품은 이집트가 아닌 영국 박물관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신라, 고려 시대 유산이 모두 사라진 것도 몽골군이 불사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집트 유산을 불사라 버리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지만, 승자만의 역사가 많이 아쉽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능력은 창조적으로도 폭력적으로도 참 대단하다. 




파르테논 신전(그리스 아테네)

태양 문명의 핵심 국가인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46년까지의 시대를 거쳤다. 언어, 정치, 교육 제도, 철학, 과학, 예술에 큰

업적을 남겼고,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상공업 발달로 평민의 권력이 신장되면서 민주주의가 발달하였고, 이는 다른 고대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만의 특색이다. 

그리스 문명은 후에 알렉산더에 의해 오리엔트 문명에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로 로마제국을 비롯하여 각지에 전파된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아크로 펠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이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 신전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아크 폴리스에 건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도리스식 기둥 양식의 정점을 이룬 건물이며, 신전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파르테논 신전(Pre-Parthenon)이 있었으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침공으로 파괴됐다.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했다. 


기원후 6세기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1460년 초,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됐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튀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 군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 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 7대 백작, 토머스 프루스(엘긴 경)가 오스만 제국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 물은 엘긴 대리석 조각 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 군으로 불리며, 1816년 런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 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다. 한 번 반출된 귀중한 미술품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무척 힘들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무료 이미지

사모트라케의 니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220년에서 19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적이고 조화로움을 추구해 온 그리스 미술은 점차 인간적인 자유분방한 시도를 한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헬레니즘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190년 로도스 섬 주민들이 에게해 해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사모트라키섬에 세웠던 조각상으로 추정된다. 니케상은 1863년 프랑스 영사겸 고고학자인 '샤를 샴푸 아소'가 발견했다. 에게해 사모트라케 섬에서 수백 개의 조각으로 발견된 승리의 여신 니케는 머리와 두 팔, 오른쪽 발이 없다. 뱃머리에 서서 해전의 승리를 만끽하며 바닷바람에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형상이 아름답다.  



그리스 신화 

신화로만 알려졌던 그리스 역사는 1876년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리이만(1822~1890)이 터키 바닷가인 트로이 고대 유적지에서 BC 2000년대 번영했던 청동기 문명을 발굴하면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쉴리이만의 발굴 동기는 황금을 캐려는 야욕 때문이었지만, 모두 8개 층으로 형성된 트로이 유적 맨 아래 1 기층은 BC 3000~2500년 전, 중간인 제5기층은 BC 1250~1180년 등으로 폭넓게 분포된 것이 밝혀졌다. 황금으로 만든 아가 메논 가면과 많은 금화들도 이곳에서 발굴됐다.

그리스 신화는 신과 영웅, 우주관, 고유 종교 기원과 의미에 대한 신화와 전설이며,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한 부분을 이기도 하다. 현대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신화의 생성 원리, 당시 종교 및 정치 제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레초 키메라상

키메라는 반인반수 괴물 티폰과 에키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 또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나의 몸에 사자와 염소·뱀의 형상을 한 3개의 머리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날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 날개와 상관없이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입에서 불을 내뿜는다. 


키메라 / 아우구스투스 로마황제상


아우구스투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정에 충실을 기하여, 41년 통치기간 중 평화로운 로마시대가 열렸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로마제국은 왕정시대, 공화정 시대, 제정시대를 거친다.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다. 

공화정 시대에는 엘리트들이 공화제를 운영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의 중앙부, 도시국가로 후에 대제국을 구축한 고대국가다. 

역사상으로 나타난 많은 국가나 제국 중에서 로마는 특별한 세계사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세상일이 모두 우주적 이성, 로고스에 따라 결정된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명상록>을 남겼다. 그는 로마가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 부동심을 찾으려 노력하고, 관용의 태도로 통치했다. 그는 플라톤이 강조했던 ‘철인왕’에 가장 부합하는 황제였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론’에서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철학과 성찰, 명상과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서기 161년부터 약 20년간 군림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자리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또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로도 유명했다.

그는 철학적 반성을 거듭하는 성숙한 개인이 어떻게 훌륭한 사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두상 / 아우렐리우스 황제상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년)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나라 중흥을 위해 밀라노 칙령을 공포, 신앙의 자유와 교회 사법권 및 재산권 등을 인정했다.

서기 3세기경, 로마 제국은 외적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혼란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어, 각각 두 명의 황제를 두어 네 명의 황제가 사두 통치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네 명의 황제 중 한 명인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두 개로 나누어져 있던 서로마 제국을 312년 통합하고 이어 동로마 지역을 공격하여 324년에는 로마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로마 신화

로마의 신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부분은 그리스 신화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후기에 지어지고 기록으로 전해졌다.

다른 한 부분은 종교적인 성격이 더 강했고, 그리스 신화와 다른 기능을 수행했다. 로마인들에게는 의식(儀式), 사제 집단, 서로 관계가 있는 신들 집단 등에 대해 발달된 체계를 갖고 있었다. 로마의 건설과 성장에는 인간이 주인공이었고, 때로 신이 개입했다. 로마는 풍부한  역사 신화를 지닌 고대 국가이다. 



콘스탄티노 개선문 (Arco di Costantino)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서로마제국을 통합했다. 곧이어 동로마 지역을 공격, 324년에는 로마 전역을 지배한다. 이 콘스탄티노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로마 통일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이다.

로마에는 콘스탄티노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Arco di Tito),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h of Septimius Severus) 3개의 개선문이 있다. 

티투스 개선문은 서기 81년 티투스 사망 직후,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건설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o)

거대한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이다. 우리에게 콜로세움은 역사적 배경보다 먼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유명한 검투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콜로세움은 약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바깥 둘레 527m, 높이 57m에 이른다. 웅장한 콜로세움 외벽은 아래층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원기둥이 80개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건축물 일지 상상만 해도 움찔한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연 인원 4만여 명을 투입시켜 80년에 완성한 원형 경기장(Flavia Amphithetre)이다.

이곳은 네로 황제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에서 내려다보이던 인공 연못이었다. 흙으로 메꿔 기반을 다지고 이런 거대한 경기장을 건설한 것이다. 2000여 년 세월 동안 지진과 수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아직도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니, 고대 로마의 뛰어난 건축 기술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견고한지 놀라울 뿐이다.

이 위대한 건축물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며 위대한 업적이지만, 이곳도 승자의 역사 유물이다.

전쟁 포로였던 수많은 검투사,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은 물론 동물들까지 동원된 피로 얼룩진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콜로세움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우리 한반도는 고구려 6대 태조왕(AD 53∼146년), 백제 2대 다루왕 (AD 53∼146년), 신라  4대 탈해왕( 57~80년)이 다스리던 시대였다. 고구려 태조왕은 영토 확장에 힘썼으며 연맹왕국 단계에 있던 고구려를 고대 국가로 발전시켰다.


중국 후한은 신나라 멸망 후, 혼란기를 거쳐 광무제 유수가 건국했다. 수도 '낙양' 위치가 전한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어 동한이라고도 불린다. 후한은 효명 황제(AD57 ~ 75년)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세기 경,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남유다 왕국은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됐다. BC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BC 3세기 알렉산더 제국에게 다시 점령당한다. AD 70년 로마군은 유대 민족을 이스라엘 땅에서 완전히 쫓아냈고, 이들은 1947년까지 나라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



찬란하게 꽃 피운 인류문화사에서 고대조각과 건축물을 아우른 미술사는 위대하며, 그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여,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는 세상의 이치는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남겨진 미술작품은 인류의 보물이 아닐 수 없다. 


고대 서양 미술사를 돌아보면서, 동양 미술사도 함께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리스 아테네가 서양 민주주의를 대표한다면, 페르시아는 동양 전제주의를 보여준다.

그리스 통일 후, 헬레니즘 미술은 동쪽으로 인도까지 이어지고, 한국 불상의 섬세한 옷자락에서도 헬레니즘 미술이 엿보인다.

헤라클레스가 부처를 지키고 있는 조각상을 보면, 불교와 그리스 로마 신화가 파키스탄에서 만난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 헤라클레스는 나중에도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 중 한 명이 된다.


사진출처: 아트조선 - 붓다의 호위무사 헤라클레스 / 부처를 지키고 있는 헤라클레스


다음 주 금요일에는 중세미술에 관해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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