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에는 중세와 근세를 이어주는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르네상스는 14세기~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문예 부흥운동으로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문학, 사상, 예술 등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 신성과 새로운 지성이 인본주의 감성과 조화를 이룬 르네상스 미술에는 중세와 근세를 이어주는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비잔틴과 서유럽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고,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은 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회화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이고, 건축에서는 피렌체 대성당의 커다란 돔을 완성한 브루넬레스키이다.
1348년 유럽에는 흑사병 창궐과 여러 정치적 격변이 있었고, 르네상스는 15세기가 되어 다시 꽃피었다.
치마부에는 중세 초기에 이탈리아 회화인 비잔틴 양식의 최후를 지킨 거장으로 단테(1265~1321)는 치마부에를 가장 뛰어난 이탈리아 화가로 인정했다. 치마부에의 화풍은 피렌체 파의 조토에게 영향을 준다.
이탈리아 화가이자 건축가다. 조토는 당대의 유명 화가인 치마부에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했다. 조토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파도바, 아시시, 로마, 나폴리. 밀라노 등을 여행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1334년, 피렌체 대성당인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의 전신인 산타 레파라타 건설 책임자이기도 했다. 조토는 이 교회 종탑을 설계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피렌체 대성당 가까이 있던, 한 건축물 입구에는 2개의 조각상이 있다. 브루넬레스키(사진 오른쪽)는 자신이 완성한 피렌체 대성당 붉은 돔을 자랑스럽게 올려다보고 있고,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설계도면을 끼고 있는 듯하다.
는 이탈리아 건축가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공간 깊이를 표현하는 미술 원근법을 발견했고, 피렌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웅장한 돔을 건축 설계했다.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조각가다.
니콜라 피사노의 제자이며, 시에나 대성당 설교단, 페루자 분수조각 등 걸작을 남겼다. 피렌체 고딕식 궁전인 팔라초 베키오도 그의 작품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이다. 내부 장식은 조토가 맡았다. 세례당 청동문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디자인한 유명한 작품으로 르네상스와 고딕 장식이 섬세하고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3차원을 완벽한 원근법으로 표현해 낸 초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다.
짧은 생을 마감한 마사초(Masaccio · 1401~1428)는 '회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그는 건축학적인 원근법을 통해 그림에서도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그렸다. 1420년대 중반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 '성삼위일체'는 실제로 평행하는 직선이지만 투시도상에서 멀리 연장했을 때 하나로 만나는 점이 있어,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 속에 빠져들게 한다.
산타마리아 성당의 벽화 '성전세(聖殿稅)'도 마사초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은 1420년대 피렌체의 거부, 브란카치 가문의 주문을 받아 가족 예배당에 수호성인 성 베드로의 일생을 그린 벽화다. 이 벽화는 '봉헌금'이라고도 불린다.
그리스도가 로마의 세리에게 세금을 내기 위해 사도 베드로를 통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이 프레스코화에 베드로는 세 번 등장한다. 중앙엔 사도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가 있고, 그 앞에서 세리(반바지 입은 사람)가 세금을 요구하자 반발하는 사도들 속에 베드로도 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강가로 가 물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는 동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한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화면 왼쪽 강가에서 겉옷을 벗고 물고기를 잡고, 오른쪽 베드로는 퉁명스럽게 세리에게 돈을 건넨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피렌체의 주요 성당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성스러운 일화 주인공들을 당시 귀족 가문 구성원들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노인과 아이'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이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노인 코에 있는 사마귀가 대조를 이룬다. 노인의 거뭇한 살결이나 얼굴의 세부 묘사에서 추함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정확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노인은 프란체스코 사세티(Francesco Sasseti)(1421-1490) 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세티는 메디치 가문 부유한 은행가로 기를란다요에게 성삼위일체 성당 돔 장식을 위탁했다. 기를란다요는 이 시기부터 사람의 일상, 개인의 중요성을 그림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대표작품으로는 '성프란체소코전', '베드로와 안드레의 소명' '사도들의 부름' 등이 있다.
'사도들의 부름'은 시스티나 예배당을 위해 의뢰된 그리스도의 생애 시리즈 중 하나이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서양미술은 자연과학과 더불어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극적인 발전과 변화를 맞는다. 이는 훗날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시한 근대미술 발전에 발판이 된다.
네덜란드, 벨기에 화가로 플랑드르의 화파의 대표적인 선구자이다. 15세기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유화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술가이다. 형인 휴베르트 반 에이크와 함께 에이크 형제로 불린다. 에이크 형제를 기점으로 유화가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오크 화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이다. 초상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얀 반 에이크 자신의 자화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림은 세밀하다. 청동 레이스 주름, 모피의 털, 강아지 털 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촛불은 한 개만 켜져 있고, 창문 밖 풍경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 볼록거울 속에 두 사람 외 얀 반 에이크와 성혼문을 읽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당시 북유럽 그림은 정밀했다.
현재 영국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사실적이고 정밀한 세부 표현과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고, 수학적 원근법이 아닌 경험에 의한 공간적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네덜란드 화가 제라르 다비드의 ‘캄비세스 왕의 심판’은 고대 페르시아의 정의로운 왕 캄비세스의 이야기를 옮긴 작품이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전제군주였던 캄비세스 왕은 판관 시삼네스가 뇌물을 받고 부패한 판결을 내렸음을 알자 그의 가죽을 벗겨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오타네스에게 아버지의 벗긴 가죽 위에 앉아 송사를 보라고 명령한다. 산 사람 생피부를 벗겨내는 것만으로도 잔인한데 그것을 가죽으로 만들어 의자에 깔게 하고, 그 아들을 그곳에 앉게 하였다니, 잔인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이를 교훈 삼아 다시는 부패한 행위 하지 말라는 엄격하고 단호한 통치자의 결의를 보여준 명화다. 부패한 공직자의 죄는 일반 범죄보다도 더 큰 범죄이며 그 죄는 매우 무겁고 가혹한 형벌로 다스려 바른 정치의 표상으로 삼겠다는 군주의 뜻이 담겨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 끔찍한 그림을 법정에 걸어두고, 판사들로 하여금 '항상 경계하고 바르게 처신하라' 경고하고 있다.
https://youtu.be/dW4vz07dYho '어떤 의자에 앉아 판결하고 있는지 명심하라'
브라반트 공국(현, 네덜란드) 대표적 르네상스 화가다. 그는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농민의 브뤼겔'이라고 불리었다. 피터르 브뤼헐의 풍경 묘사는 풍경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의 두 아들도 유명한 화가다. 큰아들 피터르 브뤼헐 더 용어는 환상적·악마적 화면을 즐겨 그려 '지옥의 브뤼헐'이라고 불리었고, 작은 아들 얀 브뤼헐 더 아우더는 화초나 풍경을 잘 그려 '꽃의 브뤼헐', '천국의 브뤼헐'이라 알려졌다.
보티첼리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본명인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이지보다, '작은 술통'이라는 뜻의 보티첼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보티첼리의 초상화는 메디치 가문과 그 가문의 추종자들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그렸다. 그의 후기 작품은 고딕 양식을 재수용하면서 감정적으로 강한 표현을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보티첼리는 아름다우려면 사랑과 순수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15세기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대표 작인 '봄'은 섬세하고 매끄러운 선과 가벼운 느낌의 옷, 여리고 서정적인 선율로 화가의 독특한 스타일을 표현하고 있다.
'베누스의 탄생'은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 베누스(비너스)가 성숙한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했다. 사실적 수법에서 벗어나, 상징과 장식을 강조한 작품이다.
비너스 탄생은 중세 이후 여성의 누드를 그린 첫 작품이다. 예전과 다른 관념을 파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작품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 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르네상스시대 다빈치가 지구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 형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한 인간에게 이렇게 많은 능력이 천부적으로 내려져도 되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 경지에 도달했던 인물을 이렇게 기록과 작품으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다빈치는 호기심 많은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스케치하곤 했다. 그림과 라틴어는 물론, 운하 설계까지 한 과학자였다. 67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랑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다빈치의 모든 유산을 상속했다. 1570년 멜지 사망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다빈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났다.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해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모나리자 미소는 오늘날까지도 보는 사람에게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오묘한 감정표현의 극치를 보여주는 다빈치의 대표작이다.
최후의 만찬(Ultima Cena)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벽화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기 하루 전날 '최후의 만찬' 모습이다. 12명의 제자가 흰 테이블에 예수를 중심으로 양쪽에 6명씩 앉아있다. 뒤 3개의 창문은 성자, 성령, 성부의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 원근법으로 그려져, 그림이 안정되고 균형 잡혀있다.
이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성당 수도원 식당 벽화로 그려진 420 x 910cm의 거대한 작품이다.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그의 그림 중 몇 안 되는 완성된 작품 중 하나지만, 가장 손상이 심하다. 프레스코가 아닌 유화기법에다, 수도원 식당이라는 환경, 건축된 건물 벽체 자체의 부실함 등으로 이 명화는 다빈치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이미 손상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 벽화의 생존은 예수의 삶처럼 고난의 역사였다고나 할까!
홍수와 침수, 전쟁, 서투른 보수 작업 등을 거치면서 '최후의 만찬'은 원래의 모습을 거의 잃었고, 현재 우리가 보는 벽화는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1999년 전체적인 복원을 마친 결과물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 그림을 그렸다.
'피에타'상 작품 중 최초의 것으로, 당시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 의뢰로 만든 것이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이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했다. 진품은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다.
'다비드상'은 적의 대장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인 소년 영웅으로 뿐 아니라,
정의로운 개혁 왕으로서 피렌체 개혁정부 상징이 되었다.
5.49m의 거대한 다비드 누드상은 자유 수호의 상징으로 시청인 팔라조 베키오 앞에 세워졌다.
당시 시민들은 도전적인 시선과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진 순수한 다비드 상을 보며, 자기들 미덕이 구현되었다고 믿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작업대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힘든 자세로 4년간이나 작업했다.
프레스코화 밑바탕이 될 회반죽을 천장에 바르거나 그림에 사용할 물감을 배합하는 일은 고용된 조수들이 작업했지만, 천장화를 창조적으로 그려 완성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섬세하고 위대한 예술작업 결과물이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으나, 그의 재능을 시기한 도나토 브라만테가 교황 유리오 2세에게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에게 그리도록 추천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림 그릴 것을 요청했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받아들였다.
작업은 엄청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목과 눈에 심한 이상이 생기기도 했고, 교황과의 이견도 잦아, 그는 이 위대한 작업을 매우 힘들게 진행했다.
그러나 고생 끝에 완성된 그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하며 찬양하고 감탄했다. 그를 시기했던 경쟁자 건축가 브라만테도 결국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와 함께 서양 고전 미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라파엘로의 사망은 르네상스 절정기 끝즈음으로 이후 *마니에리즈모를 거쳐 바로크 시대로 이어진다.
라파엘로는 인간적으로 성실했고, 사교적인 성품도 지녔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 의뢰를 받았다. 라파엘로는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가 완성된 그림을 그렸다. 그는 고전 미술 최고 덕목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여긴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을 표현했다. 라파엘로는 초상화뿐 아니라, '역사화'에서도 최고로 추앙받았다.
*마니에리즈모: 서구회화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 나타난 기이하게 변형 ·왜곡된 화풍을 르네상스 이상미의 잘못된 모방이란 의미에서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이라고 부른다. - 출처: 두산백과
'검은 방울새 성모'는 가시덤불에서 사는 새로, 예수의 앞으로 고난을 표현하고 있다. 가사 나무숲에서 산다는 검은 방울새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를 때 그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부리로 떼어내면서 피가 한 방울 튀어, 검은 방울새 날개에 붉은 반점이 생겨있다. 검은 방울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한다. 그림은 성모의 좌우에 예수와 세례요한이 함께 있는 그림으로 검은 방울새와 함께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갖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로 1510 ~ 1511년 바티칸 사도 궁전 내부 방들 가운데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에 교황 율리오 2세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림 속에는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예술가 등 당대 지성인 54명의 인물을 그려 넣었다.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들 완벽한 원근법을 통해 조화를 이룬 라파엘로 대표작이다. '아테네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주의 정신을 가장 완벽히 구현한 작품이다.
중심에 붉은 옷을 걸친 플라톤과 하늘색 옷을 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두 사람은 각자 저서인 티마이오스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있다. 플라톤의 손은 관념 세계인 이데아를 주장, 하늘을 향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지상 실천을 중요시하여, 지상을 가리키고 있다. 스승과 제자사이면서도 대비되는 두 사람의 사상이 그림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두 사람은 동시대 인물이 아니지만, 라파엘로 명화 덕분에 한 공간에서 자연스레 만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이며,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 불린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목판화, 동판화 및 수채화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아담과 이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대형 누드화 작품으로 사람을 기술적으로 표현했다.
단순한 인체의 모습이 아닌 수치와 완벽한 비율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묘사, 인간 중심의 문화인 르네상스 화풍을 잘 나타내고 있다.
누드화가 금기시되던 르네상스 시대 성경의 인물 중 옷을 입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들인 아담과 이브를 모델로 그렸다.
티치아노는 북이탈리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출생한,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 활약했던 화가다.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별 가운데 있는 태양'이라고 불렸던 티치아노는 646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그림은 시대에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화법과 색채 처리는 동시대 화가들만이 아니라 페터 파울 루벤스, 앙투만 와도를 거쳐 외젠 들라크루아 등 후세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분명한 색채주의로, 그는 일생 동안 이런 특징을 유지하며 작업했다. 그러나 티치아노는 생의 마지막 무렵, 극적인 양식의 흐름과 끊어졌으며 이미 바로크적 특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렌체 출신의 화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화가다. 티치아노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목표로 했다. 인공적인 빛과 그림자, 과장된 단축법을 써서 극적이고 순간적인 효과로 화면을 채웠다. 1550년대 후반부터 공간 효과와 극적 효과가 한층 더 뚜렷이 전개됐다.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극단의 대조를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만찬 식탁은 평행을 이루고, 가운데 예수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양쪽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반해, 틴토레토의 만찬 식탁은 대각선으로 길게 놓였고, 예수는 식탁 3분의 2 지점에 서 있다. 예수의 오른쪽에 있는 제자들은 크게, 왼쪽 제자들은 작게 그려졌다. 예수와 제자들의 머리 위로 후광도 보인다. 천장에 기름 램프가 매달려 있으나 천사들의 모습은 희미하게 보인다. 제자들 간의 교류도 없어 보인다. 만찬 식탁 앞으로는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의 무질서한 모습이 주요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천국'은 등장인물 700명이 넘는 대벽화이다.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목표로 했던 그는 인공적인 빛과 그림자, 과장된 단축법을 써서 극적이고도 순간적인 효과를 화면 속에 가득 채웠다. '인간은 고통을 극복하고서 천국에 이르는 것일까?' 이 벽화 들여다볼수록 더 혼란스러웠다.
피테르 브뤼겔은 브라반트 공국(현, 네덜란드)의 화가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 1551년 안트베르펀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그는 '죽음의 승리'라는 작품을 통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한 인간세계의 파멸 상황을 그렸다.
1562년경에 완성된 이 그림은 사자(死者)들에 의해 살육되거나 죽음의 문으로 내몰리는 인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산 너머 화염에 싸인 하늘은 대재앙 규모를 말해주며, 곳곳에 자리 잡은 십자가들은 이 그림의 주제가 종교적 사건임을 암시한다.
우측 하단에는 죽음과 대적하려는 인물과 그 아래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쌍의 연인들은 다가올 죽음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나약함과 무지를 드러낸다.
고대 로마의 승리를 기독교에 맞게 해석하고 고쳐진 '승리'라는 주제는 중세 시대에 일반적인 것이었다.
르네상스에도 십자가 승리, 사랑 승리, 인내 승리와 같은 여러 성인의 승리는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의 참혹한 화폭에서는 오싹함이 느껴진다.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에는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시공간이 달라도 인간의 삶은 여전히 녹녹지 않고, 바라는 것은 많다.
'바벨탑'은 영원히 닿지 않는 인간의 바람과 욕망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고 탑을 높게 세워 그 한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길 바랐다. 우리는 지금도 도달하지 못하는 소망을 지닌 채 살아가고.
‘캄비세스 왕의 심판’은 정의와 공정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변치 않고 지켜져야 할 덕목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심리(審理)와 재판(裁判)을 하는 사람들의 잣대가 항상 공정하길 바라는 것은 바벨탑을 세웠던 심정보다 더 확고한 현실적인 요청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했던 르네상스는 그 시대의 정신 운동이었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당시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신과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희망을 주었던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