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미술은 16세기말부터 18세기 초, 유럽에 유행한 미술 양식으로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 화풍을 바꿔, 현재 보이는 것들을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고자 했다. 이런 화풍의 가장 큰 수요자는 교황청이었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가 그림이었다. 카라바조의 '그리스도를 내리심'과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그림에는 배경이 없다. 설명하고자 하는 것만 강조하여 표현했다. 사선 구도로 명암 대비를 확실하게 한 바로크 시대 그림은 웅장하고 담대해 보인다.
르네상스 미술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대로 작품을 구현한 것이 바로크 미술사조였다. 독일·프랑스·에스파냐 등에서도 유행했던 화풍이다.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강렬한 움직임의 표현으로 과격해진 운동감과 극적 연출효과가 나타났고, 원근과 명암으로 표현이 더욱 정교해졌다. 현실적·감각적 표현, 화려한 장식 등으로 회화적인 성격이 강한 바로크 미술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했다.
바로크 미술의 시작은 로마이며, 모든 장르와 한 시대를 한꺼번에 담은 양식이기도 했다. 과장된 절대 왕권을 역동적인 형태로 포착했다.
대표작가로는 조각 베르니니, 회화 카라바조·루벤스·벨라스케스·렘브란트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 - 바로크 미술의 개척자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르네상스 회화 양식을 마감하고 바로크 회화 시대를 개척한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고약한 술버릇과 잦은 폭행사건을 자주 일으키며 살았고, 결국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의 삶은 일상이 막가파식이었다고 전해진다. 로마를 빠져나간 카라바조는 죽는 날까지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쫓겨 다니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막장 인생은 천부적인 재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카라바조는 루벤스와 베르메르로 이어지는 바로크 미술 개척자로 명암을 대비시킨 화풍으로 유명하다.
카라바조는 화가 미켈란젤로로 통용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동명이인이나 1세기 후에 태어났다. 인지도에서는 부오나로티에게 뒤지지만 미술사적으로는 부오나로티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부오나로티도 무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평생 검소하고 깨끗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번 돈도 거의 다 가족한테 보냈고, 자기를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 1598년, 로마 국립 회화 박물관
작품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는 성서 속 인물인 '유디트'가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검으로 치는 장면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홀로페르네스 얼굴과 찡그렸지만 아름다운 '유디트' 얼굴이 대조적이다. 주름진 늙은 하녀의 모습은 유디트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욱 강조시킨다.
칼을 쥔 유디트의 손은 굳어있고, 목에서 칼을 빼내는 데 많은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젊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홀로페르네스 장군은 젊고 아름다운 유디트 모습에 현혹되어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카라바조는 이 같은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미술사에서 조차 지나친 음주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사건 시작이 되는 걸 보면, 현대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주사고와도 다르지 않다. 척추동물의 뇌 속에 쾌락을 관장하는 중추기능은 계속 쾌락을 느끼도록 해서 후손 번식을 위해 진화한 능력이라고 하지만, 인류가 건전한 문화를 지속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각자 자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전국 하수도에 필로폰이 흐른다"… 마약 성분 4년째 검출(머니투데이 5월 30일)이란 기사를 보면,우리나라 전국 하수도에서 필로폰(메스암페타민) 등 여러 마약성분이 섞여 흐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이성이 쾌락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알코올과 마약 취해 사는 좀비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떤 인류사가 이어질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구약성서, '유디트 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기원전 2세기경 아시리아 군의 대장인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을 침략, 베툴리아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이때 홀로페르네스는 남편이 죽어 상중에 있던 신앙심 깊은 아름다운 여인 유디트에게 반하여 저녁 만찬에 초대한다, 그녀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하녀와 함께 적군 기지로 들어간다.
유디트는 그녀를 탐하려던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권하여 만취하게 한 후, 그가 잠든 사이 목을 쳐버린다.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음식 바구니에 넣고 하녀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와 그 목을 베툴리아 성벽에 매단다.
다음날 그 장면을 본 아시리아 군대는 서둘러 퇴각하니, 유디트가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유디트 서'는 루터가 종교개혁할 때, 새로운 성서에서 제외했다.
어떤 기록에서도 베툴리아나 홀로페르네스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어서 유디트는 유대인을, 베툴리아는 여호와의 집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르케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 1630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
젠틸레스키는 19세 때, 아버지 친구이자 그녀의 미술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1578~1644)에게 당한 성폭행을 고발하나 재판 과정에서 2차 가해까지 당한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당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고,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경험한다. 이미 성범죄기록이 두 번이나 있던 타시는 제기된 모든 의혹을 부인했고, 고작 8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은 이후 젠틸레스키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삶의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성품이 온화했다. 그녀 자신도 걸출한 화가였지만, 네 명의 딸들도 훌륭한 화가로 키워냈다.
그녀의 '자화상'을 보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그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붓을 들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서 당당한 프로 기질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사실주의에 충실하면서 우의적인 느낌을 주는 아르테미시아의 모습은 400여 년 전 한 사람의 화가로서 우뚝 서기까지 그녀의 강인했던 남다른 모습을 느끼게 한다.
사진출처: 여성신문 https://www.womennews.co.kr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4-1620
이전까지 그림에선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기 위해 노파를 추하게 묘사했고 유디트도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선 두 여성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유디트와 하녀의 중년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홀로페르네스는 아고스티노 타시를 닮았다고 알려져 있고, 유디트 손에 쥔 십자가 모양의 칼은 이 행위가 신의 뜻임을 암시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그림과 달리 젠틸레스키는 '유디트'를 매우 힘 있고 독립적인 여인상으로 그렸다. 그녀가 그린 유디트는 젊고 유혹적이며 연약해 보이는 여자가 아니다. 그림 속 유디트는 작심한 듯 힘을 주어 단숨에 홀로페르네스를 해치운다. 칼 다루는 법도 능숙해 보이며 빠른 동작으로 처리한다. 옆에서 유디트를 돕는 젊은 하녀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유디트를 돕고 있다. 세 사람 얼굴은 삼각형을 이루고, 그들이 서로 힘을 다해 밀치고 당기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여섯 개 팔도 삼각형 안에서 서로 교차한다.
결국 유디트와 하녀는 하나가 되어 홀로페르네스의 저항을 물리친다.
젠틸레스키 그림이 카라바조 그림보다 힘과 대항력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카라바조는 홀로페르네스를 유혹의 제물로 보았다면, 젠틸레스키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폭행자로서 직시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루벤스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로 어린 시절 독일을 떠나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14살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 작품을 모작하며,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화풍을, 라파엘로와 틴토레토의 색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작을 그려낸 화가로도 유명하다.
루벤스는 주로 성경, 신화, 인물 등을 소재로 그렸으며, 스페인 펠리페 4세, 잉글랜드 찰스 1세, 프랑스 마리 드 메디시스와 같은 왕족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왕실로부터는 왕실 화가로 임명되기도 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외교관으로서 두 나라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유명한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처럼 든든한 후원자들 지원 아래, 자신 화실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작품과 활동 내역에 관한 계약과 저작권 관리도 철저했다. 유럽 곳곳에 여러 그림 공장을 두고 많은 문하생들을 시켜, 비슷비슷한 다작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그렸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역동적인 묘사와 구도, 화려한 색채이다. 세밀함이 떨어진다는 평도 있지만, 여인들을 풍만하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53살 때 16살 소녀와 결혼, 아내 초상화도 그렸는데, 이 그림도 풍만하게 그려졌다.
'헬레네 포먼트 의 초상화' 1630년 /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시리즈 작품 중 하나, 1625
어린 아내 헬레네는 1630년대 이후 루벤스 작품 속에 관능미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내의 초상화 Helene Fourment in a Fur Wrap(Het Pelsken이라고도 불림))에서 루벤스는 그의 아내를 고전 조각상인 "푸디카의 비너스(Venus Pudica)"나 "메디치의 비너스(Medici Venus)"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그려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사냥꾼과 함께하는 샤토 드 스틴' 1635~8
1635년, 루벤스는 안트베르펜 밖에 있는 the Château de Steen (Het Steen)에 사유지를 구입,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는 'Château de Steen with Hunter', 'Farmers Returning from the Fields' 등의 풍경화를 남겼으며, 그의 후기 작품들은 화가 자신의 내면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이며,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굳은 신념은 두터운 신앙심에서 우러나와 많은 종교화 걸작을 남겼다.
'야간순찰' '해부도' '자화상' 등 유화, 수채화, 동판화, 데생 2천여 점을 남겼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렘브란트 '자화상' 1659 / '야간순찰' 1642
'야간순찰(야경)'은 네덜란드 황금시대 정점에 있던 1642년에 완성했다. 당시 민병대(총병대)를 자연스럽게 묘사한 작품으로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사용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시선은 중요한 세 곳을 향하게 된다. 배경이 되는 군중, 중앙에 있는 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와 중위 빌럼 반 루에텐부르크, 중앙 좌측에 있는 소녀에게로. 이 사람들 뒤에는 민병대 상징을 들고 있는 소위 얀 비셔 코넬리센이 서있다.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의 초상화, 자화상, 성경 장면 삽화는 그의 가장 위대한 창조적 업적이다.
'수산나의 목욕' 1647
'수산나의 목욕'은 수산나의 순결을 극명한 명암의 대비로 더 빛나게 표현하고 있는 렘브란트의 작품이다. 그림 음영은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 작품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구약성서 외경인 『다니엘서』 13장에 나오는 수산나와 나이 든 원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는 성서·신화·역사·풍경·풍속·위인 등 각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소재를 구하였다. 작품 속 대상에 대해 사실적 수법을 쓴 다른 네덜란드 파 화가들과 다름없으나,빛의 효과에 있어서는 색채 및 명암 대조를 강조,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다.
그는 '근대적 명암의 시조'라 불린다.
북부 유럽 동판화 대가로서 약 300점 걸작을 남겼으며, 이 동판화만으로도 그는 세계 미술 사상 최대 화가다. 벨기에 루벤스,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함께 17세기 최대 화가로 손꼽히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졌다.
렘브란트 그림은 시대 관행을 뛰어넘어 개성을 발휘했다.
작품 '야경'을 보면, 얼굴이 모두 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는데, 이는 모두 얼굴이 나오게 하는 단체 인물화가들의 관행을 뛰어넘은 것이다.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한 일반적인 성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거룩한 느낌 대신, 그만의 인물 심리묘사가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틴토레토의 '수산나의 목욕' 1560∼1562
틴토레토(Tintoretto:1518∼1594)의 '수산나의 목욕'과 함께 감상해 보면 좋다.
틴토레토는 인체 묘사를 중요시하던 피렌체 화풍과 색채 묘사를 중시하던 베네치아 화풍을 접목한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화가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경향이 묻어나는 그의 대표작이다. '수산나의 목욕'에는 당시, 종교화에 처음으로 거울이 등장한다. 수산나는 한쪽 발을 샘물에 담그고 있으며 노인이 화면 뒤쪽에 몸을 숨긴 채 수산나의 알몸을 훔쳐보고 있다. 향유가 든 은합과 장신구, 거울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수산나에게 드리우는 빛과 장미 울타리 늘어진 그림자는 효과적으로 대비된다.
베르사유 궁전 -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베르사유궁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본격적으로 베르사유궁전을 만든 절대왕정의 루이 14세는 태양신 아폴론을 베르사유궁에 배치했다. 이 궁전은 바로크 건축의 대표건축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에 1,400개의 분수,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프랑스식 정원 / 거울의 방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는 다시 파리로 궁전을 옮겨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 베르니니가 개축
성 베드로 성당(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 총본산이다.
이 성당은 67년 순교한 예수 12제자 중 한 사람이자, 로마 초대 주교인 교황 성 베드로 무덤 위에 4세기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지어졌다.
성 베드로 광장은 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 조성된 광장으로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 명령으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6~1667년에 걸쳐 설계했다. 베르니니는 광장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포용의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 교황이 대성전 중앙이나 바티칸 궁전 창문에서 군중에게 보내는 강복 모습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앞마당으로 설계한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 돔을 머리로 두고 두 개의 반원형 회랑을 팔로 삼아, 대성전이 두 팔 벌려 사람들을 모아 품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베르니니는 광장 설계에만 11년을 보냈고, 유명한 열주 회랑 통해 공간에 질서를 주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
베르니니는 뛰어난 바로크 조각가이자 17세기 로마의 건축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고전적 엄격성을 지키면서, 유동적 선과 통일적인 중량감이 드러난다. 우아하면서도 생명감이 넘치며 건축 자체와 작품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원근법의 효과는 보는 이에게 원근에 대한 착각을 넘어 환각까지 느끼도록 해준다. 성당, 궁정 건축, 조각, 묘묘(墓廟), 분수, 장식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사진촬영: 2019, 베르니니가 설계한 열주랑과 카를로 마데르나가 만든 분수
마데르노가 만든 화강암 분수는 광장 한쪽에 치우쳐 있다. 이 분수는 베르니니가 설계한 열주랑에 삥 둘러싸여 있는 듯 보인다. 베르니니는 분수가 타원의 초점처럼 보이도록 했다.
결국, 1675년 광장엔 분수가 하나 더 생긴다.
베르니니가 사망하기 5년 전이다. 지금처럼 오벨리스크 좌우에 카를로 마데르나(Carlo Maderna)와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가 만든 2개의 아름다운 분수가 생기게 됐다.
이곳은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며 베르니니의 대표 걸작 가운데 하나다.
베르니니,'페르세포네의 납치'
사진 출처: 위키백과 - The Rape of Proserpina (1621–22), by Gian Lorenzo Bernini / 프로세르피나의 허벅지 디테일
저승의 신 하데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한다.
신화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베르니니의 작품 '페르세포네의 납치'를 감상하면, 살아 숨 쉬는 듯한 아름다운 조각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신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단단하고 차가운 대리석에 살아있는 사람의 형상을 빚어 극적인 상황과 미묘한 감성까지 모두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데스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남신으로 플루톤이라고도 불렸다. 하데스는 지하세계와 저승을 가리키는 그리스어이기도 하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서 태어난 봄과 씨앗의 여신이다. 그녀는 어머니 데메테르를 도와 들판에 꽃을 피우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데스는 이 여신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를 명부(사람이 죽은 뒤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로 납치한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는 큰 충격을 받아 곡물에 열매 맺게 하는 일을 중단했고, 이 때문에 지상이 황폐해지자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딸을 애타게 찾던 데메테르는 결국 페르세포네와 재회하지만, 지하 세계의 석류를 먹은 페르세포네는 매년 일정 기간 지하에서 지내게 되어 결국 하데스의 아내가 된다.
명부에서는 음식 한 조각, 물 한 방울이라도 입에 대는 순간 그곳에서 삶을 산 것이 되고.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제우스 신도 어길 수 없다고 한다.
하나의 시대를 대충 둘러보았을 뿐인데, 세월은 다시 백 년 넘게 쓱 흘렀다.
미술 감상은 주관적이지만, 그 시대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면 관심과 흥미는 배가 된다.
직접 내 손으로 그리지 못하고 빚지 못해도, 한 시대의 명화를 오감으로 감상할 수 있다면, 나도 예술가가 된다. 직접 연주하지 못해도 가슴 저리도록 파고드는 감미로운 '파헬벨의 카논 라장조' 선율에 빠져들면, 나는 리듬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는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370여 년 전 바로크 시대를 살다 간 독일인 파헬벨(1653.9.1 ~ 1706.3.3)의 감미로운 서정과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