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day Jun 14. 2024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견고했던 고전주의에 대한 새로운 발견, 구도 윤곽 형태의 합리주의적 미학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신고전주의는 18세기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발전한 미술 사조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적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은 장식, 시각예술, 문학, 연극, 음악, 건축을 이른다. 

18세기 계몽주의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 19세기 초까지 이어졌으며, 후엔 낭만주의와 대립한다. 

고대 모티브를 많이 사용했고 고고학적인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두었다.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 완성 등의 특징이 나타난다. 

왕족과 귀족 중심의 바로크와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고전주의 대표 화가로는 '자크 후이 다비드'가 있다. 신고전주의 작가들은 프랑스혁명(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이 발발하자 정권을 미화하는 예술 작품들을 그리게 된다.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다비드는 베네치아적인 색채 사용으로 유명한 앙피르 양식(Empire style)을 발전시켰다. 많은 학생을 거느렸던 다비드는 19세기 프랑스 예술, 특히 아카데미적인 파리 살롱 회화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화가였다. 

다비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였을 뿐 아니라 장 폴 마라,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자코뱅 당 산악파 일원이었다. 국민공회 미술관부 부관으로 왕의 죽음에 한 표를 던지기도 했다. 

다비드는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으로 많은 사람들을 선고하고, 징역에 처하는 심문부를 총괄했으며, 공교육 위원회 일원이기도 했다.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를 부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3편이나 그렸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 그림 속나무상자(탁자) 옆면에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를 부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써넣었다.  

다비드와 마라의 관계는 '가재는 게 편',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인간관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좋아하는 사람을 잘 표현하고 싶은 것은 화가인 다비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출처: 부산일보 그림·사진으로 읽는 역사 중 -  '마라의 죽음', 1973 /프랑스 랭스 미술관 


 '다비드가 마라에게 바침' 

다른 작품 같은 탁자 옆면에는 '다비드가 마라에게 바침'이라고 쓰여있다. 

마라는 피부염을 앓고 있어 치료를 위해 오트밀 담근 욕조를 자주 이용했고, 그곳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그림 속 마라 모습에는 피부병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라 피부는 깨끗하고 흠결이 없이 그려졌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 모습은 이상화되어 있다. 

마라의 피부가 아닌 초록색 카펫, 종이 속 글씨, 펜 등 다른 세부 사항은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비드는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된 친구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글을 쓰는 것“으로 그렸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마라의 죽음', 1793 / 벨기에 왕립 미술관, 브뤼셀


작품에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은 '마라의 죽음'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에서 마라를  매력적인 영웅으로 묘사했다. 

마라 왼손에 쥐어진 종이에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이름이 보이지만 그 살인자는 보이질 않는다. 

이 장면은 코르데와 다른 사람이 아직 마라 곁에 있을 때, 마라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한다. 

다비드는 마라를 거룩한 순교자 모습으로 표현했다. 당시 '마라의 죽음'은 널리 찬양받았고, 공포 정치 시대 지도자들은 오리지널 작품 복제품을 몇 점씩 주문했다. 선전선동을 위한 복제품은 1793년부터 1794년까지 다비드의 제자가 제작했다. 


'마라의 죽음', 1793 -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 


로베스피에르 실각과 처형 이후 ‘마라의 죽음’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다비드 요청에 따라 작품은 1795년 반환되지만, 공포 정치시대에 일반 치안위원회에 소속된 관련자였던 다비드도 기소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 등장으로 다시 활발한 활동하게 되지만, 나폴레옹 실각한 후엔 망명 화가로 여생을 보낸다. 파벌 간 충돌이 심각해지기 이전에는 장 폴 마라,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앙 드로 베르스피에르 세 명을 가리켜 “자코뱅 세 거두”라고 불렀다.


* 장 폴 마라는 프랑스혁명 시기 자코뱅의 중심에서 활약한 혁명가 3인 중 한 사람(나머지는 조르주 당통로베스피에르)이다. 개인적으로 부르봉 왕조에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저돌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왕당파에게는 잔인했지만 국민들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모습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에서도 잔혹한 사형집행자와 혁명의 투사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마라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다. - 자료 출처: 나무위키


사진출처: 위키백과 - 뭉크의 '마라의 죽음' 2 점 중 한 작품, 1907 / 폴보드리 '샤를로트 코프테', 1860 - 프랑스 낭트 미술관


폴 보드리(Paul-Jacques-Aimé Baudry 1828 ~1886) 

프랑스 화가인 폴 보드리는 프랑스 제2제국 시대이던 1860년에 '샤를로트 코르데' 그렸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라가 피에 굶주린 무서운 괴물, ‘어두운 전설’로 알려져 있었다. 

폴 보드리는 이 작품에서 '샤를로트 코르데'를 프랑스를 구하는 당찬 인물로 그렸다. 

오른쪽 폴 보드리가 그린, 사망한 마라 모습은 다비드가 그렸던 그런 숭고한 모습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가난한 귀족 출신 ‘샤를로트 코르데’는 지롱드 당원이다. 9월 학살을 이유로 마라를 정적으로 비판했다. 그녀는 캉 반혁명적 조직 세부 사항을 적은 메모를 갖고 마라 방에 들어갈 허가를 얻어낸다. 그녀는 오트밀 담근 욕조에 있던 마라를 죽이고, 살인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된다.

'마라의 죽음'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많은 화가들이 다시 그렸다. 


19세기 중반, 비평가에 의해 '마라의 죽음'은 재발견된다. 

특히, 샤를 보들레르(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시인)의 유명한 1846년 논평으로 예술가와 학자들은 이 작 품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됐다. 20세기 피카소와 뭉크도 '마라의 죽음'을 테마로 자신만의 작품을 그렸다. 

뭉크의 '마라의 죽음'은 다비드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요소는 없다. 뭉크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작품은 현대미술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낭만주의(romanticism)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서유럽에서 발생한 미술, 문학, 철학의 지적 사조로 1800년~1850년 사이에 정점을 찍는다. 낭만주의는 형식과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사조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생동감을 열정적으로 표현했다. 

예술뿐 아니라 철학에서도 개성을 존중했고 자아 해방을 주장했다. 상상과 무한한 것을 동경하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태도가 그 특징이다.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헌신하던 시대 상황과 정신적 교감을 했고, 이를 화폭과 글에 생생하게 담았다. 



테오 드로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제리코는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 시초라고 불리는 화가다. 고전주의에서 해방된 낭만파의 선구자인 그는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다. 제리코는 1816년 이탈리아에 유학했으며, 들라크루아에게 영향을 주었다. 제리코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당대를 회오리바람처럼 치달아 살며 마치 바람처럼 바삐 사라져 갔다. 


'메두사 호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은 당시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그린 대작으로 제리코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정치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제리코가 1819년에 제작한 걸작으로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메두사 호의 뗏목', 1818-19

제리코는 사람들이 아르고스 호를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는 실낱같은 희망의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평면적 전개가 아닌, 피라미드형 구도로 그려, 비극 속에서도 희망이 느껴진다. 


이 대작은 1816년 7월 2일 일어난 사건이다.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절, 프랑스 함대는 군함 3척에 군인과 이주민들을 싣고 아프리카 세네갈 방면으로 출항한다. 그중 한 척이 메두사 호다. 

약 400여 명 군인과 이주민이 타고 있었고 선장은 귀족인 뒤루아 드 쇼마레였다. 

선장은 임명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그는 루이 18세 측근으로, 항해 경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2주 항해 끝에, 아프리카 연안에 도착한 메두사 호는 암초에 좌초된다. 침몰될 위험이 없었는데도 당황한 쇼마레는 배를 버리고 탈출할 것을 명령한다. 구명보트 정원은 250명 정도에 불과, 계급 낮은 장교들과 하층민 150여 명은 급조한 뗏목에 옮겨 탈 수밖에 없었다. 쇼마레는 처음엔 구명정과 뗏목을 밧줄로 연결해서 갔으나, 얼마 안 가 그 빗줄마저도 끊어버린다. 파도가 치자, 뗏목 위에 있던 사람들은 바다로 휩쓸려가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뗏목 중심으로 몰리던 하층민 사람들을 향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장교들은 총을 난사했다. 

65명 사망, 28명이 살아남지만 이마저도 불안전한 뗏목 위에서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진다. 건강한 15명이 다른 13명을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다. 세네갈 해안을 떠돌며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던 이들 15명은 12일 만에 아르고스 함대에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조되지만 이들 중 4명은 당일, 한 명은 며칠 후에 죽고, 결국 10명만 살아남는다.  

구조된 10명 중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사람이 프랑스로 돌아와 당시 상황을 글로 발표하면서 이 비극적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다. 난파된 이틀 만에 폭동이 일어나 수십 명이 죽고, 사흘째 날엔 굶주림으로 동료 시체를 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 비극 단초를 제공한 쇼마레는 자격정지와 금고 3년의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프랑스를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리려고 시도했던 이 사건의 또 다른 원인 제공자인 루이 18세도 역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하게 된 제리코는 당시 생존자들을 만나 생생했던 현장 이야기를 듣고, 그와 비슷한 뗏목을 만들어 상황을 재현하기도 했다. 병원 시신들까지 찾아다니며 8개월 동안 진실 밝히는 작업을 하여, 사건 발생 3년 후인 1819년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은 메두사 호 뗏목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신과 핏자국이 보여주는 처절한 비극의 순간, 시신을 안고 있는 노인의 절망, 돛대를 붙잡고 헝겊을 흔들며 구조 순간을 기다리는 희망,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불굴의지까지 이 그림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어둡게 그려진 뗏목과 먹구름, 사람들 모습엔 슬픔과 고통이 담겨있다. 그러나 생존자들이 바라보는 수평선 노란빛은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중요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왼쪽 하단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시체 모델은 프랑스혁명정신을 그림에 담은 화가 들라크루아라고도 한다. 들라크루아는 선배 제리코 작품 활동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는 미담도 전해지고, 시신을 안고 있는 노인 모습은 로댕 작품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고도 했다. 

1816년 실제 ‘메두사 호’ 침몰에 영감을 받은 제리코는 문헌 자료와 증언 기록 등을 모아 그림을 계획적으로 그렸다. 당시 프랑스 사회적 배경과 제리코가 보인 회화적 특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을 통해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권력자나 지도자가 무능력할 때, 고통을 당하는 건 힘없는 민중들이다. 극한 상황에 처한 비극적인 인간의의 모습, 마지막 순간 살아남은 자들이 느낀 희망과 환희 그리고 평생 따라다닐 후회와 죄책감까지... 

이 작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

들라크루아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꼽히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다. 그의 붓놀림 표현과 색의 광학적 효과는 인상주의자들의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친구였고, 그의 정신적인 화법을 물려받기도 했다. 들라크루아의 이국적 취미에 대한 열정은 상징주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리스나 로마 예술을 고전적으로 모방하기보다 이국성을 찾아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훌륭한 석판 인쇄공으로서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코틀랜드의 월터 스콧, 독일 작가 괴테 등의 많은 작품을 묘사하기도 했다. 

들라크루아는 신고전주의의 완벽주의와는 다른 화법으로 그린 화가다. 루벤스와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로부터는 그들의 외곽선의 명료함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다는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표현은 들라크루아의 왕성한 활동시기, 주된 테마의 특징이었다. 라크루아는 과격함을 보였던 바이런의 '장엄의 힘'으로부터 강한 영감을 받기도 했다. 


1824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공감했던 들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 인들이 투르크 인들에게 무차별로 학살당한 사건을 그린 것으로 1824년에 파리 살롱전에 출품작이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키오스 섬의 학살', 1824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그림 가운데 여성은 자유를 상징하며,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를 다른 손에는 총검을 들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사실주의(Realism)

낭만주의와 함께 19세기 후반에 성행한 예술 사조다. 근대미술(19세기 후반~ 20세기)은 회화, 조각, 건축, 그래픽 아트 등에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으로 전개되었다.  

사실주의는 상상력에 따른 이상을 거부했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관찰했다.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는 다양한 문화의 예술적 경향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중 하류층 서민들의 꾸밈없는 삶의 모습과 문제, 관습, 도덕관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오르낭의 매장', 1850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1819~1877)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미학을 최초로 실천한 화가이다. 

1850년 쿠르베가 그린 대작 명화 '오르낭의 매장'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더럽고 괴상한 것을 추악하게 표현했다며 혹평을 받기도 했다. 

서양화 묘사는 예전부터 사실을 기본으로 했으나, 사실주의는 더 철저하게 사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쿠르베는 사물을 깨끗하게 미화해서 그리는 고전파나 정열이나 문학적 매력을 추구한 낭만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1855년 쿠르베는 특설 개인전 화랑에서 그의 '아틀리에'를 공개했고, 회장 입구에 '리얼리즘'이라고 써 붙였다. 쿠르베는 우리 눈에 천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천사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고의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고, 형상도 색채도 정확한 관찰로 현실 재현을 철저하게 했다. 그림의 소재도 불합리한 사회와 가난한 일면, 노동의 가혹한 실체를 당면한 그대로 표현했다. 

현실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표현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도 나타났지만, 쿠르베 작품은 박진력이 돋보인다. 쿠르베와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표현이 자연을 추하게 만든다고까지 비평했지만, 사회적으로 점점 더 민중의 입장이 강화되는 시대였다. 귀스타브 쿠르베는 사회사상가로서 투쟁 형식까지 취하며, 사실주의 회화를 발전시켰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사실주의의 아버지’ 귀스타프 쿠르베의 '돌을 깨는 사람들', 1849 - 베를린 국립회화관

쿠르베는 고전적인 세련미나 이상화가 주류였던 당대 흐름에서 벗어나 하층민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그는 눈에 담기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았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인상파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 미술 사조로,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인상주의와 이전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인상주의는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시간의 변화에 따른 색채 변화와 자연의 세밀하고 찰나적인 인상을 표현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커다란 공통점은 자연의 빛에 대한 관심이었다. 같은 풍경이라도 햇빛의 강도와 각도에 따라 세상은 천차만별의 느낌으로 그려졌다. 대지 위해 작렬하는 빛의 흐름은 인간의 신체를 애무하듯, 간지럽히듯 빛이 향연을 표현했다.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 

모네는 프랑스 화가로 '인상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상파의 창시자이자 개척자다.

그의 작품은 생동감 넘치고 인상적인 화풍으로 유명하다. 모네는 자연, 풍경, 정원뿐만 아니라 수련과 지베르니의 풍경을 연작으로 묘사했다. 모네는 주변 세상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붓과 물감의 획으로 색상 변화의 효과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모네의 작품은 서양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인상, 해돋이', 1872

'인상, 해돋이'는 르아브르 항구 아침 풍경을 그린 유화다. 

'인상주의' 작품의 유래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Claude Monet - Stacks of Wheat (End of Summer), 1985

‘건초더미’ 시리즈는 모네가 1890~1891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자택에 머물며 그린 작품으로 모두 25점이다. 작품마다 기본적인 배경은 동일하되 계절, 날씨, 시점 등이 다르다. 

건초더미 시리즈 25점 중 개인 컬렉터가 보유한 것은 이 작품을 포함해 8점이며, 나머지 17점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시카고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모네의 '건초더미(Meules)'는 2019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1억 1070만 달러(한화 약 1,318억)에 낙찰, 모네의 건초더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건초더미가 됐다. 

경매에서 팔린 작품은 황혼 무렵 수확을 마친 들판에 원뿔 모양으로 쌓인 건초더미를 선명한 색상으로 묘사했다. 인상적인 사선식 붓놀림과 독특한 원근법 등이 다른 작품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19세기 삶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마네의 그림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 '올랭피아', 1863

그의 초기작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나, 수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 모으는 힘이 되었고,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창조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1487년경~1576년) '우르비노의 비너스' 모티브가 된 작품은 숲 속에 누워 있는 여인을 모델로 한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이다.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정적인 분위기로 바꾸고 미술사 최초로 실내에 누워 있는 여성 누드 작품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전형이 되었다. 같은 시대 베네치아 화가들뿐만 아니라, 앵그르와 마네에 이르는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마네가 패러디한 문제작 '파리스의 심판', 1863 / 루벤스의 그림 '파리스의 심판', 1636 - 런던 내셔널 갤러리

파리스의 심판은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다. 파리스가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고르게 되었는데 아프로디테를 고르게 되어 발생하였다.

1863년 살롱 낙선전(落選展)에 출품된 이 작품은 마네 대표 문제작이다. 

파격은 고전주의 작품에서 차용한 것들로 작품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도는 라이몬디가 제작한 동판화, 라파엘로 ‘파리스의 심판’(라이몬디 판화, 라파엘로 파리스의 심판의 부분)의 일부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벗은 여인과 옷을 입은 남성의 대칭적 배치는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조르조네 전원의 합주)에서 빌려왔다. 

고전 작품에서 차용한 것들을 자신 작품에 배치함과 동시에 당시 풍경들을 고전 구조에 덧입히는 방식을 채택했다. 현재가 고전이 되고, 고전이 현재가 되는 것. 이 작품에서 마네가 실현하고자 한 한 축의 의도다. 

현대미술에서 패러디(Parody)가 언급될 때 대표적 원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또한 이 작품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르누아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출 난 표현을 선보였다. 풍경화에도 뛰어났지만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한 화풍에 대비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화려한 멋을 보인 화가는 르누아르이다. 세잔이 풍경 속에 자연의 정신을 품듯이 르누아르는 여인을 그려서 미의 도취를 자아내고 있다.

'뱃놀이 점심', 1881

르누아르의 '뱃놀이 점심'은 초여름 따사로운 햇볕과 미풍을 느끼게 한다. 

그는 모파상이 묘사했던 '샤투 시아르' 섬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 ‘푸르네즈’ 테라스에서 뱃놀이 온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즐기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등장인물들은 르누아르 친구들로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르누아르 자신 친구들을 그려서인지, 화면 가득 따스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는 젊은 여자는 르누아르 전속모델이자 양재사인 알린 샤리고이다. 훗날 그녀는 결혼을 주저했던 르누아르의 18살 연하 부인이 된다. 그녀는 그림에서 보이듯 활기 넘치고, 분위기 잘 맞춰주는 재주 있는 사람이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소녀는 르누아르가 즐겨 그린 모델 앙젤르다. 그녀는 드가 작품 ‘압생트’ 모델이기도 하다. 바로 옆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멋쟁이 남자는 카유보트인데, 재산가답게 인상주의 그림을 일찍이 사들이기 시작한 컬렉터였고, 화가이기도 했다. 르누아르 아들 '피에르' 대부가 될 정도로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 난간에 기댄 남자는 노잡이로, 이 카페 주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서 있는 사람은 여배우 잔 사마리다. 

이 작품은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견고했던 고전주의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그려진 걸작이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두자매', 1881 / 세느 강변의 유명한 행락지인 '라 그르누예르', 1869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 사실주의 -> 인상주의 미술을 살펴보면서 근세 서양미술사를 접는다. 

무 자르듯 경계가 딱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다음 주엔 현대미술로 접근한다. 

서양 미술사에 드리워진 당시 사건 사고까지 명화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슴은 뛰고, 영혼은 흔들리면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지 않다는 것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는 역사가 그 증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