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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un 07. 2024

로코코, 18세기 프랑스 귀족계급이 추구한 예술  

색과 선이 융합된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 로코코 예술

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으로 루이 15세 시대에 유행했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 유행 등을 말한다. 로코코 미술은 바로크 시대 양식이 수정 또는 약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화려하고 장식성 강한 여성적 경향의 미술양식이다.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닌 귀족과 부르주아 사교계 예술이다. 유희와 쾌락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망 후, 18세기 프랑스 사회 귀족계급이 추구한 예술은 사치스럽고 우아하고, 유희적이며 변덕스러운 매력을 드러냈다. 귀족들은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로 아늑함과 감미로움을 추구했고, 개인의 감성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들이 많이 제작된 시기다. 색과 선이 융합된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 로코코 예술에는 중국 양식도 함께 유행했다.



장 앙투안 바토(Jean-Antoine Watteau,1684~1721)

바토는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파리로 건너가 루벤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세밀한 자연주의를 화풍을 터득했다. 바토는 파리에서 이탈리아 희극과 귀족적 환락을 결부시켜 페트 갈랑(fetes galantes:雅宴)라는 주제로 상류사회 남녀가 숲과 정원에서 우아한 복장으로 즐기던 향연장면을 풍요한 색채로 그렸다.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궁에서 벌였던 귀족들의 연회 명칭이 실제 페트 갈랑트였다. 는 그늘진 공원과 환희에 찬 풍경을 배경으로 자그마한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가볍게 반짝이는 붓질로 인해 인물들은 더 우아해 보였다. 

바토는 로코코 양식의 페트갈랑트를 그린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 1717

키테라섬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의 고향이다.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조각상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로,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불륜으로 태어났다. 이름도 둘의 이름을 합해서 지어졌다. 자웅동체인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완벽한 사랑을 의미하고, 키테라 섬은 열렬한 사랑만이 인생의 목적인 곳이다. 

헤르메스 - 사진촬영: 2019년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티탄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산의 님페) 사이에서 태어난, 전령의 신이자 여행 신, 상업 신, 도둑의 신이다. 그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고, 두 마리 뱀이 감겨 있는 독수리 날개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다. 헤르메스는 지상에서부터 지하까지 가지 못할 곳이 없었고, 신과 인간의 세계, 지하 세계를 자유자재로 오갔다. 

그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 '헤르메스'로 재탄생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그리스 로마시대 비너스 곁에 등장하던 큐피드도 로코코 시대 비너스 그림에서는 아기천사바뀌어 등장하고 있다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 ~ 1770년)

프랑수아 부셰는 18세기 로코코 양식으로 작업한 프랑스의 화가, 소묘가, 판화가이다. 그는 고전적인 주제의 전원적이고 관능적인 그림과 장식적인 알레고리(allegory) 표현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로코코의 창시자라고 불리던 바토 그림을 판화로 옮기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부셰는 궁정화가로서 루이 15세 제2부인인 퐁파두르부인의 총애를 받으며, 프랑스 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장식적 재능도 발휘하여 고블랭공장의 많은 태피스트리(Tapestries)의 밑그림을 그렸고, 삽화나 만화분야에서도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Putti with Birds, c.', 1730-1733 / 'The Toilet of Venus', 1751

부셰의 작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감각적이고 밝은 분위기가 드러난다. 그는 목가적인 자연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는 18세기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전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근세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고야의 파괴적이고 주관적인 화풍과 대담한 붓터치는 훗날,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카룰로스 4세의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후기 로코코 풍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등을 겪으며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사회의식 담긴 작품들을 제작한 기록화가로도 알려졌다. 


'마하연작'은 고야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고야는 1800년 '옷 벗은 마하'를 그렸고 1803년에는 '옷 입은 마하'를 그렸다. 

'옷 벗은 마하는 현실 여성을 대상으로 그린 '서양 예술 최초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다. 

두 작품은 같은 여인이 같은 포즈로 그려져 있다.  



고야의 대표작인 '옷 벗은 마하'는 역사와 신화의 비유 없이 현실 여인의 누드화로 외설 논란을 불러왔다. 화면 속 마하는 노골적인 자세, 도전적인 눈동자, 신체의 적나라한 표현 등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옷 벗은 마하'는 신성 모독 논란을 가져왔고, 고야는 이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고야는 그림에 옷 입히기를 거절했고,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1813년 종교재판소에서 그의 그림을 압수해 갔다. 

고야는 1815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그의 재능을 아끼던 유력자들의 보호로 재판을 겨우 면할 수 있었지만, 궁정화가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고야의 전기 작품은 궁정화가로서 그린 왕족과 귀족 초상화들과 여러 테피스트리(Tapestries)들로 화려하고 밝은 느낌이 주류를 이룬다. 

고야의 작품은 그가 콜레라를 앓고 청각을 잃은 1792년을 기점으로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으로 뚜렷이 나뉜다. 1792년 이후 고야 그림은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검은 그림'연작 중 2편 -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반도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고야의 그림은 무거운 주제와 어두운 색조를 담게 된다. 

말년에 부인을 잃은 고야는 퀸타 델 소르도에서 '검은 그림'연작을 그렸다. 그는 이 그림들 속에서 이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연작 가운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가 특히 유명하다. 


'1808년 5월 3일의 처형'

반도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스페인 전역은 프랑스군에 의한 학살과 죽음의 공포에 치를 떨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고야는 전쟁의 참상을 담은 판화집 '전쟁의 재난'도 제작했다. 전쟁을 기록한 이 판화 연작에서 프랑스 군인의 만행과 동시에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에 협력한 사람들에게 벌인 만행 역시 똑같이 담았다. 

전쟁이 끝나고 스페인 왕정이 복귀하였으나 고야는 이미 왕가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반도 전쟁(Peninsular War)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나폴레옹 지배에 대항해서 일으킨 전쟁이다. 각 참전국에 따라 스페인 독립 전쟁(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ñola), 프랑스 침공(Invasões francesas), 프랑스 전쟁(Guerra del Francés)이라고 부른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대륙제패체제에 가입시켰다. 1808년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위에 즉위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두 나라의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스페인 게릴라활동을 촉발시켰다. 게릴라들은 적극적인 활동으로 전성기의 나폴레옹 군대를 교란시켰고, 해방 전쟁의 발단을 열었으며, 이것은 곧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됐다.

1812년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 스페인 연합군은 살라망카에서 승리를 거둬 마드리드를 점령한 다음, 프랑스인을 축출했다. - 참고자료: 위키백과

  

전쟁과 그 후유증은 인류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질 않을 심각한 검은 연작(?)이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50만 년 전까지 거슬러 간다. 원시사회가 의사를 교환하게 될 무렵부터 집단투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인간의 DNA 속에는 무력을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전쟁의 유혹이 깊숙이 담겨있는 것만 같다. 권력자들은 전쟁터로 나가 싸우라고 명령하지만, 정작 그들은 시민과 병사들의 죽음을 방패막이로 세워둔 채 저만치 아주 먼 곳에서 명령할 뿐이다. 당장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만 봐도 그렇다. 

지구 곳곳에는 내전 중인 나라들도 참 많다. 

콜롬비아, 소말리아, 시리아, 예멘, 수단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마스까지 어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 지속적으로 무력 투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현실을 겨우 버텨내고 있다. 매일매일 참혹한 상황이 뉴스로 전해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힘들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 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지 않길 바랄 뿐. 전쟁을 멈추게 할 방법도 힘도 없는 사람으로서 비애를 느낀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6.25 전쟁 종전국이 아닌 휴전국이다. 

총성만 멎었지, 지금도 남북 간 대립과 긴장은 항상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한다. 

최근엔 북으로부터 날아온 기막힌 '오물 풍선' 선물로 온 나라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고, 6월 5일엔 이번 북한 도발에 대한 조치로 *'9·19 군사합의 전부 효력정지안'이 국무회의 통과했다. 

앞으로 북으로부터의 위협과 위험을 점점 더 강하게 마주하며 살아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후손을 위해서라도 안전하고 부강한 대한민국이 더 이상 흔들려선 안 되는데...


*9·19 군사 분야 합의서: 2018년 9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에서 열린 2018년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해 9.19 공동선언을 하였다. 9·19 군사분야 남북합의서는 9.19 공동선언의 군사분야 부속합의서이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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