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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un 21. 2024

'밀레'부터 '리베라'까지 - 현대미술 1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현대미술은 근대미술 다음 시기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인상주의 시기인 19세기말부터 보기도 한다.

현대 미술사로 접어들면 많은 화가들의 이름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구축주의, 표현주의, 추상표현주의, 상징주의, 미래주의 등 화풍에 따른 분류도 많고, 세분해서 들어가면 딱 구분 짓는 정확한 판단조차 쉽지 않다.

그나마 나 같은 비전문가가 접근하기 쉬운 방법은, 화가들이 살아생전 활동한 시기별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다. 단 한 명도 놓치고 싶지 않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그들의 출생 순서대로 들여다보면서 당시 추구했던 화풍을 살펴보려 한다.  

19세기 서양미술사는 2회에 걸쳐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날 생각이며, 오늘은 현대 서양미술사의 첫 장을 열고, 들어간다. 작품 속에 담긴 시대상이 이제는 많이 가깝게 느껴진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 사실주의

밀레는 노르망디 그레빌 아구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 삶을 관찰하며 자랐으며, 농부였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농촌의 고단하고 열악한 일상 삶을 관찰자 입장에서 그렸다. 그는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밀레는 1837년 파리로 가 들라로슈 제자가 됐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 작품을 연구하기도 했다.

1848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들'이 살롱에 당선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듬해 바르비종으로 옮겨가 농민들 생활 모습을 그렸는데, 밀레는 농부의 일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그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밀레는 살아생전 생활고에 시달리며 싸구려 누드화를 그려 팔아야 하던 시절도 겪었다.

친구인 테오도르 루소가 모처럼 그림을 비싸게 한 점 사간 사람이 있다고 하여 밀레는 무척 기뻐했다.

나중에 밀레는 루소가 직접 그 그림을 샀고, 루소는 친구인 밀레의 자존심이 상처을까 봐, 거짓말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밀레가 사망할 때까지 친하게 지내며 우정을 나눴다.

밀레 대표작으로는 '씨 뿌리는 사람'과 '이삭 줍는 사람들', '만종'등이 있다.


사진촬영 2019, 작품출처: <더 뮤즈 : 드가 to 가우디> 서울 숲 갤러리아 포레 - '이삭 줍는 사람들', 1857


사진출처: 위키백과 -  '망종', 1857~1859


장프랑수아 밀레빈센트 반 고흐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 작품들도 밀레 풍경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밀레 작품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 박수근도 밀레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1865 /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 1888


밀레 작품 '괭이 든 남자'(L'homme a la houe)는 에드윈 마컴(1852년 4월~1940년 3월)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시 'The Man With the Hoe' (1898년)가 탄생한다. 이 작품은 "다음 1000년의 전투 외침"이라고 불렸고, 33년 동안 25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시가 출판 된 후 사람들은 노동 착취 같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밀레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마컴(Markham)은 대중 연설가로 유명인이 됐고,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누리게 된다.


밀레의 '괭이 든 남자', 1860년~1862

괭이 든 남자

                             에드윈 마컴

그가 몇 세기에 걸쳐 몸을 숙인다.

그의 괭이와 땅에 바라보는 시선들에,

그의 얼굴에 있는 나이의 공허,

그리고 그의 등에 세계의 부담.

.....

그와 성(聖) 천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노동의 노예, 그에게 무엇

플라톤과 플레이아데스의 스윙인가?

노래의 봉우리가 길게 뻗은 곳,

새벽의 균열, 장미의 붉어지는 것?

이 두려운 모양을 통해 고난의 시대가 보인다.

시간의 비극은 아프다.

.....


사진촬영 2019년, 작품출처: <더 뮤즈 : 드가 to 가우디> 서울 숲 갤러리아 포레 전시회


장 프랑수아 밀레는 마크 트웨인 연극 'Is He Dead?'(1898년 작)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극에서 그는 명예와 부를 위해 죽음을 가장하는 젊은 화가로 등장하지만, 극에서 묘사된 밀레는 대부분 허구다.


밀레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주로 농부 모습 그린 것을 두고, 보수 우파로부터 '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밀레는 사회주의 등 정치사상에는 관심 없다며 일축했다.  

살아생전 몇몇 그림은 해외로 팔려나갔는데, 밀레 사후 세월이 흘러 밀레가 재평가를 받게 되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측은 거액을 들여 그의 그림들을 해외에서 다시 사 오기도 했다.

'나는 농부로 태어났고, 농부로 남을 것이다' - 장 프랑수아 밀레와

- '밀레 그림 '만종'은 시다' - 빈센트 반 고흐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  인상주의

드가는 프랑스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다.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인상주의로 분류되나,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색채를 띠고 낭만주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전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을 그렸으나 후기 그림은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을 그림을 그렸다.

초기엔 <보나의 초상> <꽃을 든 여인> <이오 부인> 등 초상화에서 출발했으나, 차츰 무용, 극장 등의 근대적 민중 생활의 묘사를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그리는 독자적인 수법을 썼다. 특히, 보는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정확한 데생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했다. 무희를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아 '무용의 화가'로 불린다.


리틀 댄서


'14살 소녀 발레리나', 1881

드가의 눈에는 모든 움직이는 것이 아름다웠다.

그는 다양한 상황에서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선과 율동감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무대 위 발레리나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지만, 드가의 그림은 전형적이지 않았다.

발레리라는 드가에게  이상적인 미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동작을 만들어내는 사실적인 피사체였다. 마치 극장의 스탭이 우연히 찍은 스냅사진, 혹은 메이킹 필름 같다. 정지된 화면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의 공기까지도 완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작품을 우연히 그린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들여 자연스럽게 연출한 덕분이다.


'14살 소녀 발레리나'는 1881년 제6회 '인상파 전' 출품작이다.

어린 소녀의 유연한 몸은 청동으로 주물 제작되었지만,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앞으로 내민 오른발, 등뒤로 모은 두 손, 약간 치켜든 머리는 곧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듯한 긴장감도 보인다.



'오페라 무용교실', 1874 / '발레수업', 1871~1874

'춤추라! 날개 달린 악동이여!' - 에드가 드가


폴 세잔(Paul Cézanne1839 ~ 1906) - 후기인상파 

세잔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난다.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피사로는 세잔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Louveciennes와 Pontoise에서 10년이 넘게 함께 풍경화를 그리면서 둘의 관계는 합작하는 평등한 관계로 발전한다.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상상으로 그려진 중후하고 큰 풍경화도 있었다. 나중 그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된다.

그는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화가였다. 그는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색채를 사용했다. 

세잔은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가 Poussin의 “After Nature”를 재구성한 것은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 관찰을 통합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담긴 것이다. 


'붉은 조끼를 입은 진느 가르송', 1888 ~1889 / 'Bathers', 1898-1905

폴 고갱(Paul Gauguin, 1848 ~ 1903) - 후기인상파 

'꽃을 든 여인', 1891

고갱은 프랑스 탈인상주의 화가다. 

생전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난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들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고갱은 유럽 전통 화풍인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렸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1889년 벨기에의 화가 스무 명이 결성한 레베(Les XX, 20)를 통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이 시기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 후기인상파

고흐는 네덜란드인으로 서양 미술 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작품 전부(900여 점 그림, 1100여 점 습작)를 정신질환(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 10년 동안에 그려냈다. 고흐 작품은 1890년 그가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후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담긴 2권의 책

고흐의 초기 작품은 밀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흐와 밀레 작품은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들 편지 내용을 담은 책으로는 '반고흐, 영혼의 편지' 2005년 개정판과 2008년 초판 '반고흐 영혼의 편지 2'가 있다. 고흐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영혼의 편지' 2권을 권하고 싶다.


2019년 서울 숲 갤러리아 포레 <더 뮤즈 : 드가 to 가우디> 전시회에서는 고흐와 밀레의 예술적 영감과 정신적 연결고리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22년간 동시대를 함께 살기도 했다.

밀레는 따스한 눈길로 농부들의 노동을 바라보았고, 그런 밀레 작품을 보며 정신적 교류를 한 고흐도 마냥 따스하고 섬세한 사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곤 했다.


* 밀레와 고흐의 예술적 연결고리가 담긴 작품들

사진촬영 2019년, 서울 숲 갤러리아 포레 <더 뮤즈 : 드가 to 가우디> 전시회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경탄해마지 않았던 옛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중 몇 개의 작품들을 모사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지식과 재주를 독학으로 익혔다.

그가 홀랜드에서 보낸 1880~1885에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프란스 할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들로부터 그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를,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으로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을, 그만큼 더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것 등을 스스로 습득했다.

그는 옛 거장들이 그림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경탄해마지 않았고, 빈센트 자신도 평생 이 원칙을 고수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감자먹는 사람들', 1885 / '밤의 카페 풍경', 1888


고흐 작품은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 '미드나이트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에서 주제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고흐는 지금도 끊임없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


전해오는 이야기로, 반 고흐는 살아생전 평생 한 개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고, 미술계에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다고 한다. 고흐는 인생에 대한 회의감, 다양한 심리적 문제, 병마와 생활고 등으로 무척 힘든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였다.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Placid Gaudí i Cornet,1852~1926)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 네트는 스페인 카탈루냐 건축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카사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가우디는 자연의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독창적이라 생각했다.

자연이 지닌 곡선만을 이용해 지은 '까사 밀라', 동물 뼈 형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구조, 자연 순환 원리를 그대로 담은 생태 도시 '구엘 공원'은 가우디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882 / '까사 바트요', 1912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바르셀로나의 성당으로 성 가족 성당이다. 동쪽에는 예수의 탄생, 서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정문 파사드에는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가우디는 40여 년을 이 대성당에 바쳤고, 전재산을 성당 건설에 써줄 것을 당부하고 떠났다.


'까사 바트요'는 바르셀로나 그라시아 거리 '까사 밀라'와 마주 보고 있다. 이 저택은 직물업자 바트요를 위해 가우디가 바다를 모티브로 설계한 저택이다. 곡선비를 강조했고, 벽면에는 색유리 파편과 원형타일로 모자이크를 더 했다. 이는 마치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파도와 해초, 작은 바다 생물들처럼 보이면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발코니와 기둥이 마치 사람의 해골과 뼈를 연상시킨다.


'구엘공원' 모자이크 타일

19세기말 카탈루냐 지역에는 사회 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벗어던졌다.

가우디 가장 큰 스승은 바로 자연이었다.

문명과 기술을 동력 삼아 앞으로 전진만 했던 사람들에게, 가우디 건축물은 근원적인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것은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 가능성에 관해 고민했다. 그는 기하학적 형태 외 곡선을 많이 사용했고,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직선은 인간의 선, 곡선은 신의 선이다'  - 안토니오 가우디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1859~1891) - 신인상주의

조르주 쇠라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인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신인상주의의 시작으로 현대 예술의 방향을 바꾸었고, 19세기 회화의 한 상징이 되었다.   

쇠라는 '점묘법'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세기 광학이론을 바탕으로 이를 캔버스에서 실험했다. 서로 다른 색점을 나란히 배치하여 멀리서 보았을 때 두 가지가 혼합된 하나의 색으로 보이는 '병치혼합'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했을 때 보이는 픽셀 구조와 비슷하다. 캔버스 위에서 섞인 색채는 팔레트에서 섞은 색채보다 훨씬 선명하고 순수한 빛을 냈다.      

쇠라는 즐거운 정서는 선을 위로 향하고, 따뜻한 색상을 사용, 밝은 색조들을 지배적으로 만들었다.      

고요함은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사용하여 밝음과 어둠을 균형 있게 썼고, 선을 수평적으로 그렸다.      

슬픔은 어둡고 차가운 색상을 이용, 아래로 향하는 선을 사용했다.     


'A Sunday on La Grande Jatte', 1884~1886
'그랑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 습작, 1884

'그랑드 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는 쇠라의 가장 유명한 대작으로 19세기 회화의 상징이 됐다.      

각기 다른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공원에서 쉬거나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여러 색으로 칠해진 병치된 작은 점들은 감상자 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된다. 물감 안료가 원래 갖고 있는 색과는 다른 색이다. 쇠라는 약 3m 너비인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쇠라의 '점묘법'은 험난한 작업과정을 거쳤다. 점 하나를 찍을 때마다 고민했고, 계속해서 수정 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쇠라는 작품 하나를 그리기 위해 야외에서 수많은 습작을 그렸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해 그가 그린 60여 개의 습작을 생각해 보면, 그의 완벽주의를 짐작할 수 있다. 쇠라의 작품은 예술인 동시에 과학이었으며, 고된 노동이기도 했다.      

쇠라의 회화는 미술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지만, 바로 그 작업 방식 때문에 명성에 비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완성 작품을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다.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1884

이 작품에는 여름날 강에서 물놀이를 하며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겼다.

강에서 수영과 뱃놀이를 즐기거나 강가에서 편하게 쉬는 사람들의 모습 한가롭고 여유로워 보인다. 햇빛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색채를 물감 찍은 점으로 표현했다. 쇠라가 처음으로 점묘법을 실험한 작품이다.

'난 오직 과학만 보았다' - 조르주 쇠라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 - 아르누보 시대 대표적 일러스트레이터

모라비아 이반 차체에서 태어난 무하는 체코 화가이며 장식 예술가이자 상업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노래에도 재능이 있었고, 어릴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무하는 '황도 12궁'과 '사계'를 석판화로 그렸다.


사진출처: <더 뮤즈 : 드가 to 가우디> 서울 숲 갤러리아 포레 전시회 촬영 - '사계' 중 일부분


'잔다르크'(모델, 모데 애덤스), 1909  / 사진출처: 2019년 6월 <더 뮤즈 : 드가 to 가우디> 서울 숲 갤러리아 포레 전시회 촬영


무하는 1879년 빈으로 옮겨 무대 배경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1881년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모라비아로 돌아가서 프리랜스로 장식 예술과 초상화를 그린다.

1887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린다.

1894년 Théâtre de la Renaissance에서 배우 사라 베르나르 석판 포스터를 만든다.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고, 무하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된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삽화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 등을 제작한다.

무하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진다.

젊고 건강한 여성이 네오클래식 풍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그림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무하 아르누보 스타일흉내를 내며 따라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다. 무하는 보다 고상하고 위엄 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고 싶었다.


1906년, 미국서 초대를 받아 1910년까지 머문다.

다시 체코 공화국으로 돌아온 무하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즈비로 그 성, 크리스털로 된 큰 방에서 자신 작품에 몰두한다. 이후 18년 동안 20개 기념비적인 웅장한 작품이 나온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 변혁 단계를 묘사한 것으로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얀 후스의 설교' '그룬 반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는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과 같은 작품들이다. 이때,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인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도 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에서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 창조에 몰두한다.

그의 디자인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 등에서 아낌없이 발휘됐다.



'슬라브 대 서사시', 1926 - 애니메이션


1926년 그는 20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2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대서사시를 완성한다.      

필생 작업으로 슬라브 공통 유대와 이상적 평화를 향한 바람이 담겼다.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이던 1928년에 '슬라브 대 서사시' 전 작품을 조국에 기증한다.

나치가 프라하를 침공한 1939년, 무하는 불온 인물로 찍혀 자주 검문을 받았고,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심문을 당해 그해 7월 사망한다.

알폰스 무하가 조국 체코에 헌정한 '슬라브 대서사시'는 오늘날 다시 바라보는 우리 가슴을 더 크게 흔든다.

'사람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다' - 알폰스 무하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1863~1944) - 표현주의

뭉크는 노르웨이 출신 표현주의 화가, 판화 작가다.

노르웨이 국민 화가로, 그의 초상은 1000 크로네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신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 수법을 사용, 삶과 죽음의 극적이고 내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1892년 베를린으로 이주, 미술 협회에 출품했다.


뭉크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작품에도 그 영향이 드러나 있다.  

그는 불안, 사랑, 고통, 죽음 등을 주제로 내면세계를 시각화했다.

그의 그림은 미술사에 특별한 한 획을 남긴 독창적인 '영혼 고백'이기도 하다.

뭉크 작품은 19세기말 자연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역작용으로 상징주의, 아트 누보(Art-Nouveau)와 관계를 갖는 주관주의 한 표현방식을 보인다. 그는 고갱, 앵소르, 고흐, 호들러 등과 함께 표현주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표현주의 회화는 극적 테마, 요약, 강렬한 색채 등을 통해 자유분방한 자기표현을 드러낸다. 이는 주관주의 회화와 공통된다.      

나치는 그의 그림을 퇴폐예술이라는 이유로 몰수하기도 했다.      

     

뭉크 가족사는 병과 죽음의 그늘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평생, 생명과 죽음에 대한 불가사의한 상념에 쌓여 지내야 했다. 그가 관찰한 슬픔과 기쁨은 'The Frieze of Life' 시리즈와 '불안', '절규, 여러 편의 자화상, '입맞춤', '마돈나' 등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과 죽음 문제, 존재, 고독, 질투, 불안 등이 드러난 인물화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절규 (Der Schrei)', 1893 - 오슬로 뭉크 미술관

  

'불안(Die Angst)', 1894

'절규'는 뭉크의 유명한 연작이다.      

그는 총 4편(1893~1910) 표현주의 그림인 '절규'를 그렸다. 핏빛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했다. 배경의 풍경은 노르웨이 오슬로 (당시 크리스티아니아) 이케베르크 언덕에서 보이는 '오슬로피오르'이다.     

실제 당시,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영향으로 붉은빛 노을이 보였다는 설도 있다.      

저녁노을, 산, 들의 곡선까지 불안해 보인다. 뭉크 불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뭉크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 연애로 인한 갈등과 고민으로 분열증세를 보이기도 했고, 알코올 의존으로 한동안 신경 쇠약 상태가 계속되기도 했다.

'불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허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군상 표정은 뭉크가 자주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에 이길 수가 없었다."

뭉크가 말한 어린 시절이다. 죽음은 항상 그의 삶 가까이 있었고,  뭉크는 자신 속에 숨에 있는 죽음을 항시 의식하며 살았다.

뭉크는 19세기 노르웨이 상류계급에 속하는 존경받는 전통적 전형 집안사람이다.  

그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남 노르웨이 로이뎅 근처 엔젤호이크에서 태어났다.

1868년 뭉크 5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병원을 운영하던 아버지까지 성격이 거칠게 비정상으로 변한다.

14살 땐, 어머니 대신 가정을 맡아 돌봐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결핵으로 사망한다.

어린 뭉크는 이런 환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이 형성된다.


뭉크 자화상 6점 연도별로 감상하기 - 뭉크는 자신의 일생을 자화상 시리즈로 남겼다

뭉크는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초기에는 엄격한 양식에 낭만적 우울감이 가득한 자신을 그렸다.

자유로운 형태에서 자의식이 넘쳐나는 표현이다.

저승이라는 상황에서, 죽음을 상징화하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보이지만, 불안과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도 엿보인다.


1892-> 1895 3점 -> 1916-> 1943 순으로 사진 오른쪽부터 감상

3. '자화상', 1895 / 2. '저승에서, 자화상', 1895 / 1.'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1892


'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배경에는 붉은 벽 위에 침통한 표정의 커다란 여자 마스크가 걸려있다.

여자 마스크는 자화상을 내려다보며 곧 덮칠듯한 기세지만, 무표정한 자화상은  정면을 응시한다.

마스크는 압박과 고뇌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뭉크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빨간색은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혈액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저승에서, 자화상'은 거친 붓 터치로 붉은 배경, 누드, 왼쪽 검은 연기 같은 그림자 등이 대담하게 그려져 있다.


6. '자화상'1943 / 5. '베르겐의 자화상', 1916 / 4. '뼈가 있는 자화상', 1895


뭉크는 1880년 첫 자화상을  그린 이래, 많은 자화상을 남겨 내적 영혼과 정신 관계를 표현했다.

'뼈가 있는 자화상'은 자화상들 중 가장 유명하다.

검은 바탕에 소묘식으로 표현한 얼굴이다.

항상 죽음을 의식하고 응시해 온 뭉크에게 이 자화상은 죽음에 대한 '내적인 영상'이기도 했다.


'베르겐의 자화상'은 뭉크 53세 모습으로 예술가로서 명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을 때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인상파풍 속필로 묘사했다.

인물 뒤에는 노르웨이 서해안 도시인 베르겐 거리, 집들, 널따란 광장이 선명한 색채로 드러난다.

자화상 얼굴 속엔 고독감과 불안이 엿보인다.

풍경화에선 볼 수 없는 초조감이 드러난 표정이 불안감을 외적으로 투영한다.

뭉크는 자화상을 통해 불안을 극복하려 했다.

인생 시리즈로 자기 변천과 자아의식을 찾았다.

"자화상에는 자아를 그리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 이미지 표현의 진실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엄격한 양식에 자기 애적 경향과 자의식에 찬 인물로 자신을 표현했다.


뭉크 예술에 대한 지지와 평가는 만년에 더 높아진다.

1912년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 대 전람회에서 세잔, 고흐, 고갱과 더불어 방이 하나씩 배당되고,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도 초대받아 출품하는 등 국제적 명성을 누린다.

1922년 취리히 미술관,

1927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 회고전,

1933년 70세 생일에는 대작가로서 유럽 각지로부터 축사를 받는다.

1937년 한때, 나치에 의해 '퇴폐적인 예술'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하나, 격동하는 제2차 세계대전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제작에 몰두했다.

1943년에 그린 자화상은 파스텔로 소묘식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뭉크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뭉크는 평생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8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는 1944년 1월 23일 에케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바실리 칸딘스키(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 1866~1944) - 표현주의 청기사파

칸딘스키 러시아 화가, 판화 제작자, 예술이론가(art theorist)다.

'추상 미술의 아버지'인 칸딘스키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며, 피카소와 마티스와 비교되는 20세기 중요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노랑, 빨강, 파랑'
'최초 추상화', 1910

칸딘스키는 초기 추상미술 주요 인물로 최초 현대 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1910년에 그려진 무제 수채화 그림 뒤에 ‘추상 수채화’라는 문구가 있다.

20세기 현대 회화 주춧돌을 놓은 대표적인 추상 화가이자 추상 회화 선구자다.

몬드리안과 함께 추상 회화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추상 화가로서 업적도 대단하지만, 훗날 독일 건축학교 바우하우스에서 교수 활동을 하며 회화는 물론 디자인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 대표적인 이론서로는 '점, 선, 면'이 있다.     


'즉흥 인상 구성'시리즈                                          

칸딘스키의 그림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 파랑은 바이올린, 초록은 첼로...

그는 리듬과 음색을 색과 형상으로 표현한 화가다.


1913년에 그가 출간한 《회상록》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에는,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다.

원래 그는, 화가는 뚜렷한 윤곽을 잡아 그려야지 주제 없이 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화실에 거꾸로 세워놓은 자신 그림을 보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는 그날 곧장 노선을 전환했다고 쓰고 있다.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1954) - 야수파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 화가'로 꼽힌다. 1904년 무렵 피카소,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 그 중심인물로서 활약했다.


마티스는 '동 비중(同比重) 순일(純一) 절도(節度)'를 스스로 '표현 3원칙'이라 했다.

그의 감각은 자연법칙에서는 벗어났는지 모르지만, 그가 꿈꾼 '균형의 예술'은 형식 감정을 존중한 라틴적인 조형 정신을 보여준다.  


'춤', 1910 / '음악', 1910

마티스는 균형 잡힌 자연 그대로의 맑고 깨끗한 그림,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조용한 휴식을 전해주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붉은 방', 1908

'붉은 방'의 먼저 붉은 바탕색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른쪽 식탁을 차리는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 식탁 위 술과 과일, 그 앞뒤로 파란색 넝쿨무늬 장식이 빨간색 바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대비는 흥분을 불러오지만, 왼쪽 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초록색의 편안함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 준다.

잔디 위로 흰 나무와 살구색 집이 보인다. 그 아래 의자는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말년의 마티스는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을 했다.

손에 붓을 쥐기조차 힘들어지자 그는 손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는 이도 쉽지 않자,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작업에 몰두했다.

마티스는 색종이 작업을 하면서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이런 색종이 콜라주 작품을 하나의 '조각'같다고 느낀 듯했다.

조각가가 나무나 돌을 다듬고 깎듯, 종이에 과슈를 바르고 색종이 잘라 붙이는 행위를 마치 조각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느낀 것이다.


'이카로스', 1946 / '왕의 슬픔', 1952

마티스는 색종이를 이용해 형태를 단순화한 작품을 여러 점 남겼는데 '이카로스'도 그 작품 중 하나다. 이카스는 '끝없이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그 끝은 에개해 검푸른 물 속이었다.

이카로스(Icarus)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와 미노스 왕 여종인 나 우크 라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뛰어난 건축가이자 조각가·발명가이기도 한 다이달로스는 크레타 섬에서 미노스 왕의 시녀인 나 우크 라테와 사이에서 이카로스를 낳는다.

한편, 크레타섬 왕비 파시파에는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와 간음, 황소 머리에 사람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이 괴물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미궁(迷宮)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했다.

후에,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가 파시파에 간음을 방조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오히려 이 미궁에 가둔다.

다이달로스는 새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붙이고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라 탈출에 성공하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새처럼 나는 것이 신기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 경고를 잊은 채 계속 날아올랐다. 결국 이카로스는 태양열에 밀랍 날개가 다 녹아, 에게해에  떨어져 죽는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 시신을 건져 올려 섬에 묻었는데, 나중에 이 섬은 이카로스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아 섬이라 부르게 된다. 신화에서 비롯된 ‘이카로스 날개’는 지금도 미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을 상징한다.


'왕의 슬픔'은 마티스가 죽기 2년 전 작품이다. 색종이 그림의 기념비적인 대작으로 마티스의 자유분방한 색채 감각을 그대로 나타난다. 원색의 화려함과 경쾌한 단순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작품 안에 표현된 인물은 렘브란트가 그린 '사울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의 수금 켜는 다윗 왕이지만, 바로 마티스 자신이기도 하다. 6개의 꽃이 피어있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다윗왕은 실제로도 수금 연주가 뛰어나 사울 왕의 광기마저 다스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웅크린 모습은 건강 악화로 휠체어의 도움을 받던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의 모든 색은 노래해! 마치 음악의 화음처럼' - 앙리 마티스



피에트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 1872~1944) - 구성주의

피에트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은 몬드리안은 추상화 초화가로 네덜란드 구성주의 회화의 거장이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와 야수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몬드리안은 테오 판 두스뷔르흐가 만든 *데 스틸(De Stijl) 예술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고 부른 비구상적인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의 그림들은 가로와 세로의 검은 선의 격자(grid)와 삼원색을 사용한 것들이 많다.

*신조형주의 또는 데 스틸(De Stijl), The Style은 1917년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예술 운동이다. 좁은 의미에서 "De Stijl"이라는 단어는 1917~1931년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데 스틸"은 네덜란드의 화가와 디자이너, 작가, 비평가인 테오 판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 1883-1931) 등이 출판한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며, 이 모임의 이론을 전파시켰다. - 자료 출처: 위키백과


몬드리안은 몇 년 뒤 파리로 떠나면서 '데 스틸'과 결별했지만, 그들과 함께한 연구를 기초로 가장 단순한 형태의 회화를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몬드리안을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검은색 선과 직사각형 면, 빨강, 파랑, 노랑으로 이뤄진 안정과 균형 이미지다.

몬드리안은 균형과 질서 안에 담긴 긴장감과 동적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자신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다.

추상회화 고전으로 남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화면 위에서 실험을 거듭했다.

새로움을 찾아 나선 거리, 뉴욕에서 그는 놀라운 장면과 마주한다. 몬드리안은 외형적 형태 속에 숨어있는 '불변의 실재'를 보고자 했다.


뉴욕

직선이 교차하는 바둑판같은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 수직으로 뻗은 빌딩들이 이루는 도시의 조화에서 몬드리안은 그가 좋아했던 재즈 즉흥 연주와 같은 긴장감과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느낀다.

평생 캔버스 속에서 찾았던 이상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가 뉴욕에서 완성한 말기작 '뉴욕'은, 평생 추구해 온 회화의 본질적 요소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된 화면과 뉴욕에서 느껴지는 동적인 감성을 구현한 완성품이다.

몬드리안의 이런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이후 20세기 미술과 건축, 디자인, 패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

이 기쁨은 68세 거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활기찬 작업을 하도록 했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품을 '뉴욕'이라 불렀다. / 위에서 내려다 본 뉴욕

몬드리안이 그리면 '뉴욕'이 되는 직사각형들, 우리가 그리면 그냥 직사각형들이다.

나무를 볼 때 보이던 형태도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것처럼 도시의 계획선, 자동차 물결, 헤드라이트 불빛도 선과 점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남는 것을 표현했다.


몬드리안의 '붉은 나무'  /  '회색나무'

'오직 제대로 된 그림 하나를 그릴 것이다.' - 피에트 몬드리안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 입체파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 대표적 큐비즘 작가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어 다양한 시각으로 본질을 표현한 피카소도 초창기엔 사실주의 기법으로 작품을 그렸다.

그는 "나는 본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그린다."라고 밝혔다.

피카소는 입체파의 창시자이다. 입체파는 20세기 초 프랑스에 일어난 서양미술 표현 양식의 하나를 일컫는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발표된 1907년 이전까지, 입체주의라는 용어는 통용되지 않았다.


입체파의 선구적 그림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

피카소는 조각, 도자기,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창조와 혁신적인 스타일은 현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명 '게르니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게르니키는 1937년 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같은 해 열리기로 되었던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 관 벽화제작을 의뢰받았던 피카소는 조국의 비보를 듣고, 한 달 반 만에 벽화를 완성했고, 작품의 제목을 '게르니카'라고 붙였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게르니카', 1973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56세 때 완성한 반전과 평화의 상징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거대한 캔버스를 채운 강렬한 메시지는 '전쟁과 평화'다.

이 작품은 그 어떤 말보다도 강한 예술의 힘과 커다란 울림을 준다.


프랑스 발로리스에 있는 옛 수도원은 현재 피카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한반도의 6.25 전쟁 관련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과 평화를 기원한 <전쟁과 평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히틀러가 폴란드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공했을 당시 피카소는 코타쥐르 앙티브 해변에 머물며 평화를 갈구하는 그림을 그렸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에는 도자기 작업으로 유명한 도시 발로리스에서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피스 무브먼트(Peace Movement)'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목적에서였다.


'한국에서의 학살', 1952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1월 완성, 같은 해 5월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 전에서 공개된 작품이다.

임산부, 소녀 등 벌거벗은 여성들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이들을 총살하려 한다.

양민들과 학살자들의 모습이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반공법 등에 묶여 국내에선 전시되지 못하다가 2021년 5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인투 더 미스(Into the Myth)'라는 제목으로 비로소 전시됐다.


피카소는 자신의 재능으로 행동하는 예술가다.

그는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할 수 있습니까?

그림은 아파트나 치장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방어를 하는 하나의 무기입니다."  -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의 '기타를 든 여인', 1908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 입체파

조르주 브라크는 프랑스 화가로 파리미술학교에서 배우고, 1906년 앵데팡당 전에 입선했다.

처음에는 야수파의 대담하고 거친 붓놀림으로 선명한 색조의 그림을 그렸으나, 폴 세잔의 영향으로 인상파에 접근했고, 1907년 피카소와 친구가 되면서부터는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데 주력했다. 그는 피카소와 함께 프랑스 화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입체파란 그려진 대상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마치 입방체처럼 보인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조르주 브라크는 1908년 입체적인 첫 그림 묘사로 '기타를 든 여인'을 그렸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머리에 부상을 입어 1917년에 제대한 후 회화의 길에 복귀하여 예의 총합적 큐비즘을 완성하였다.

화면에 색채와 대상성을 회복, 나체와 풍경의 모티프도 받아들이면서 피카소와 별도의 길을 걷는 독자적 양식에 도달한다.

1920년 피카소가 고전주의로 전환하였을 때에 브라크는 최초로 조각에 손을 대어 형태애 관한 사고를 더욱 연마해 나갔다.

1930년대 재차 피카소와 가까워졌으나 브라크의 모뉴멘털 한 장식성의 추구는 벌써 피카소와 질적으로 다른 그만의 차분함과 세련미를 추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 1967) - 사실주의

에드워드 호퍼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미국의 화가다. 뉴욕에서 태어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뉴욕예술학교에서 로버트 헨리에게 그림을 배웠다. 1906년 24세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나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1910년까지 유럽을 여행했다.

호퍼가 그린 그림들은 도시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다. 이런 그림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주위 환경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 1942

밤새도록 여는 서정적인 찻집 분위기가 으스스 한 빛으로 그려졌다.

사람과 물건을 공간 속에 고립시키는 호퍼만의 독특한 빛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가라앉은 분위기, 지쳐 보이는 미국 사람들에게서 진한 고독함이 묻어난다.


호퍼는 1960, 1970년대 팝 아트와 신사실주의 미술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희미하게 음영이 그려진 평면적인 묘사법을 통해 그기 선보인 그림들은 대도시의 고독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사람도 건물도 사물까지도. 호퍼의 그림은 그만의 미국적인 특색이 드러난다.  


'미싱 하는 소녀' / '발레복 꿰매는 소녀', 1921

정적인 화면 속 두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면, 소녀들의 삶이 고달파 보인다.

소녀들의 고달픈 인생살이가 우울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미싱 돌리는 소녀의 옆모습을, 발레복 꿰매는 소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나, 아니 당신?

그럼 우리 모두인가!

현대 미국인들의 관음증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화폭에 담긴 사람들의 우울한 모습은 호퍼 자신의 실제 삶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호퍼는 그가 그린 그림 속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했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인들은 그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미국적인 정서를 교감했다. 호퍼는 미국인이 아끼고 사랑하는 화가다.



아이작 브로드스키(Isaak Brodsky 1884~1939) - 러시아 고전회화

브로드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 운동의 청사진을 제공한 소련의 유태인 화가다. 레닌의 상징적 묘사, 러시아 남북전쟁, 볼셰비키 혁명 등을 신중하고 섬세하게 그렸다.


'레닌', 1930 / 'The Execution of the Twenty Six Baku Commissars', 1925

'레닌'은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후계자, 국제 노동운동 지도자, 러시아 공산당 및 소비에트 연방 국가 창설자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전개 전망과 그 후 발전을 제시했다.

그는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을 발전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고, 그의 철학은 노동자 계급과 새로운 시대에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방침으로 되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 ~1957) - 멕시코 현대 회화의 아버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의 형태와 색채는 모국 멕시코의 전통과 국민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멕시코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리베라는 생전에는 멕시코 미술계 거장으로 유명했지만, 사후에는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 더 유명해졌다. 많은 여성편력으로 인해 아내와 사이가 좋았다고 할 수 없다. 리베라는 프리다와 결혼 후 남긴 많은 이야기만큼이나 다양한 작품도 남겼다.

1954년 7월 프리다 사망 후, 3년 4개월 뒤인 1957년 11월 리베라도 뇌일혈로 저택에서 사망한다. 화장되어 프리다 곁에 묻히고 싶어 했지만 그는 돌로레스 유명인사 묘지에 매장되었다.


'디트로이트 인더스트리(Detroit Industry)' 벽화 중 일부분 / 'Detroit Industry Murals(디트로이트 산업벽화)', 1932~1933
'꽃을 나르는 사람', 1935

'디트로이트 인더스트리(Detroit Industry)''꽃을 나르는 사람'의 그림은 미국 자동차 산업도시 디트로이트의 첨단 기계산업과 몸을 움직여 살아가는 멕시코 노동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리베라는 멕시코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해골로 표현된 멕시코 원주민 전통적 주술적 형상을 통해 고대 멕시코를 지배했던 원주민 문화를 새롭게 자각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에 의해 지배당했던 멕시코 민족의 고통을 주요 작품 대상으로 표현하고자 했지만, 당시 불안정했던 멕시코 정세와 민중 고통에 대한 디에고 인식은 피상적이었다.


1906년 주지사 장학금으로 에스파냐로 갔으며, 다음 해 예술 중심인 파리로 옮겼다.

디에고는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미술에 대해 보다 넓은 시야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모딜리니와 친교를 맺었고,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과 사귀면서 1910년대 큐비즘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파리의 화단에 남지 않고, 멕시코에서 참다운 민중화가로서 모든 계층이 이해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1910년 귀국, 멕시코혁명을 직접 겪게 되지만 대다수 민중처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사회적 혁명을 지향했던 농민·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고, 부르주아 지배체제에 종속 편입된다. 혁명시키고자 했던 주체세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멕시코 혁명은 신 질서를 구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 이전 구 질서를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치장하고 강화시킨 셈이 된 것이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진행된 듯한 안타까운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승자에게는 '합법적인 독재' 시스템 구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영혼을 흔들어 놓은 19기 예술가의 작품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변함없이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직 다 만나지 못한 19세기 화가들의 작품은 다음 주에 이어서 만나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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