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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un 28. 2024

원색을 즐겨 사용한 표현주의 화가들 - 현대미술 2

20세기 인류는 제1차(1914~1918) 2차(1939~1945) 세계대전 겪었다.

우리도 36년간의 일제통치를 끝냈지만, 6.25 전쟁(1950~1953)과 베트남 전쟁(1946~1954)도 치렀다. 참혹한 전쟁과 이념의 혼란 속에서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했다.

20세기 미술사의 변천 과정을 보면, 다양하고도 획기적인 미술 운동들이 일어났다.

야수파를 필두로 독일 표현주의, 프랑스 입체파, 이탈리아 미래파, 소련 쉬프레마티슴(절대주의)과 구성주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 다시 프랑스 순수주의와 절대주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까지 표방하고 나선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은 자유로운 토론, 저마다의 감상과 비판까지 더해져 개성과 독특함이 다양하게 드러났다.

표현주의는 정서적 효과를 위하여 색채와 형태를 과장하고 왜곡하는 미술사조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의 한 양식이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주의도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표현적 측면이 미학적, 객관적인 측면에 비해서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다.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

에밀 놀데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판화가와 수채화가이며, 특히 성경 내용을 격정적인 붓 터치와 열정적인 원색으로 마음껏 표현한 종교화가로 유명하다.  

'최후의 만찬', 1909

표현주의 화가들은 태양 빛에 그대로 드러나는 원색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그림은 성경 이야기 속 뜨거운 환희와 열정을 원색물감으로 마음껏 표현했다.

1909년 그의 종교화 '성령강림제'가 인상파적인 베를린 분리파 미술전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공개적인 질의문장을 제출하여 이에 반론을 펴고 분리파와 인연을 끊었다. 이보다 먼저 드레스덴에서 개최한 그의 개인전에 찬사를 보냈던 브뤼케 파의 화가들과 분리파 가운데서도 혁신적인 신세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놀데를 표현주의의 맹장(猛將)으로 추앙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놀데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양을 여행했고, 동남아시아의 원시예술을 접하였다. 그는 원시예술의 단순 소박한 형식 가운데에 화려하고 기괴한 생명력의 표현을 흡수하여, 그것을 그의 주요한 모티프인 가면과 인형에 관한 제작의 영양분으로 삼았다. 1937년 놀데의 작품은 나치스에 의해 퇴폐예술이란 낙인이 찍힌다. 그는 북독일의 제뷔르에 은신하여 1956년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기 작품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1958)

조르주 루오는 프랑스 화가, 판화가이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했다.

루오의 그림 소재는 법관, 창녀, 어릿광대, 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작품으로 '교외의 크리스트' '재판'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등이 있고,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루오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로, 어두운 밤 속에서도 빛나는 별을 인정했다. 루오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끝을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진출처: Internet Archive Digtal Libary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에른스트 키르히너 등이 결성한 다리파(1905~1913)는 청기사파(1911~1914)와  함께 유럽에서 표현주의의 정착에 기여했다.

키르히너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로, 다리파의 창립 회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01년 드레스덴 기술 전문학교에서 건축학으로 대학공부를 시작했고, 1905년 건축사 학위를 땄지만, 건축사 대신 화가의 길을 택했다. 1905년 6월 그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다리파' 집단을 결성했다. 이 시기에 키르히너는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화가에서 벗어나 표현주의 화가로 발전했다. 초기엔 주로 나체화, 초상화, 서커스와 무대 장면을 제작했다. 그는 미술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1912년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한다.

처음, 베를린에서도 그의 사정이 개선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반려자인 에르나 실링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서도 변화가 감지다. 둥근 형태는 좀 더 날카로워졌고, 선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색채가 지닌 광채가 줄어들었고, 거리의 풍경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1920년대 이후부터 현대 미술에 개방적인 무리들 사이에서 확고한 인정을 누렸지만, 키르히너 자신은 미술 비평가들로부터 충분하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루이 드 마르살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의 미술에 대한 글을 썼다. 그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간주된 또 다른 이유는 병적일 정도의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 키르히너는 자세한 내용을 담은 계약서가 작성되었을 때에만 전시회나 책 출간을 인정했다. 계약서는 그의 동업자에게는 구속을 부여했던 반면, 그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자유를 남겨두었다.

그를 두고 이전에 '다리파'에 속했던 사정을 언급하거나, 그를 표현주의자로 지칭하는 선배작가들과 연관시키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키르히너는 분노를 터트렸다고 한다.


'베를린 거리풍경', 1913

'베를린 거리풍경'은 제목과 달리 거리 풍경은 최소화하고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 들 중, 각 지고 긴 얼굴은 사창가 여성들이다.

중앙에 있는 코트 깃을 세우고 깃털을 장식한 독특한 모자를 쓴, 날씬하고 키가 큰 두 여인은 그녀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을 압도한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 1916) - 표현주의 청기사파

마르크는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표현주의 화가다.  

그는 푸른 말을 좋아했으며, 그런 성향은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1910년 이후 동물을 유일한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한 마르크는 물질주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동물들의 삶에 대한 순진무구한 감각이 내 안의 선한 것을 깨운다.'라며 말을 자주 그렸다.


'푸른 말', 1911

마르크는 현실의 말을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푸른 말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마르크의 그림 속에서는 살아 있다.

말이 서있는 공간의 배경도 빨간 하늘, 파란색과 보라색 산으로 화려하게 그렸다.

그는 비자연적인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동물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푀힐라른 출신 표현주의 화가이며 극작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고, 전후 1918년부터 6년간 드레스텐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후 유럽, 아프리카, 서남 아시아인 아나톨리아 등을 돌아본 편력 시대에는 광대한 시야에 근거한 바로크적인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나치의 정치적인 압박을 받아 1938년 런던으로 망명했다.

'바람의 신부(폭풍우)', 1914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전란의 유럽을 비판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려 했다.

그의 작품에는 '예술은 언어와 같아 자아로부터 타아에 사자(使者)다'라는 신념이 드러냈다.

초기 환상화로 '바람의 신부', 초상화 '포렐 박사 상'이 있고, 편력 시대 풍경화 '몬타나', 풍자적 작품 '테레모피레'가 유명하다.     

코코슈카는 표현주의 시인이며 희곡작가로도 주목할만한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 표현주의 개척자로서 '불타는 가시밭'(1911)은 극장의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은 '살인자, 희망, 여성'과 함께 적나라한 인간 남녀의 존재적 본질을 파헤쳤다. 그는 회화도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쓰고 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샤갈은 러시아 제국(현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화가로 유대계 러시아인인 그의 그림은 농촌적이고, 친근하고 평화롭고 온화하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린다.

그는 모든 색 중에서 특히 청색을 잘 표현한 화가이자 색채의 마술사로 알려져 있다.

샤갈은 러시아 사람이었지만 대부분 예술 활동은 프랑스에서 했다.

파리에서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등을 고루 접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 냈다.

샤갈은 아름다운 시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꿈꾸던 그는 사회적 천대 속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샤갈의 '마을과 나', 1911  / '푸른 배경 속의 커플'(Couple in a Blue Landscape), 1969-1971


샤갈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비테프스크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간의 우애, 러시아의 민속적 주제, *하시디즘 등 유대인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마을과 나'에는 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중시하는 하시디즘이 담겨있다. 샤갈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에서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이 담겨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이다. 특히, 농부·산양·닭과 같은 소재를 작품 속 많이 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가 등장하고 기하학적 구도, 그림 중앙에 그려진 원 등이 특징적이다.

샤갈은 대상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입체파' 미술사조를 화폭에 가득 담고 있다.

* 하시디즘(Hasidism) : 히브리어 하시드(경건한 자)에서 유래, 죽은 사람 영혼이 동물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믿는 신앙


'샤갈의 사랑' / 'mission' - 사랑하는 연인들을 주제로 그린 샤갈의 작품 2점


마르크 샤갈은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한 가지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라고 했다.

그는 22살 때, 벨라 로젠 펠트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세계 1차 대전 전운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인 28살, 벨라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벨라는 그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인이기도 하다. 샤갈도 전쟁의 암울한 시기를 피해 갈 순 없었지만, 사랑의 힘이었는지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사랑의 색'을 잃지 않았다.

샤갈 57세 되던 해, 벨라는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는 한동안 붓도 들지 못할 정도로 상심이 컸다.

60세 되던 해, 샤갈의 딸은 아버지에게 유대계 러시아인 바바를 소개한다.

두 사람은 민족적 정서와 종교를 공유하면서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고, 바바는 샤갈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샤갈은 세상을 뜰 때까지 다시 얻게 된 '사랑의 색'으로 생폴 드 방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샤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랑이란 주제는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샤갈과 벨라의 행복했던 모습 / 샤갈이 그린 '바바의 초상화', 1953~1956


'바바의 초상화'는 벨라와 사별 후, 재혼한 샤갈이 자신감과 마음의 평화를 찾으며 다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심리상태가 잘 표현되어 있다. 아름다운 꽃다발 옆, 하얗고 차분한 바바의 모습은 어둡고 검붉은 배경과 대비를 이루며 부활과 어둠 후 찾아오는 아침을 연상케 한다.

샤갈은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거처를 옮기며 안정된 생활을 한다.

그 결과 작품은 다시 밝아졌고 색채도 화려해졌다.

샤갈은 살아서도 명성을 얻었던 화가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파울 클레(Paul Klee, 1879 ~ 1940)

클레는 스위스 화가로, 국적은 독일이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예술형태의 영향을 받았다.

클레는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와 예술과 건축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클레는 1906년 뮌헨 '분리파전'에 동판화를 출품했고, 1910년에는 베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칸딘스키, 마르크 등과의 '청기사전'은 제2회부터 참가하였다.

1914년 튀니지와 카이루안을 여행하면서 선명한 색채를 자각하고, 화풍이 바뀌게 된다. "빛깔이 나를 갖는다. 나와 색은 일체이다. 나는 화가이다"라고 자각한 바를 일기에 적은 것도 그때의 일이며, 파울 클레의 색채가 풍부한 작품은 대부분 이 여행 이후의 것이다.

1916~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다. 1919년 이후 색채에 대한 자각은 독특하게 실현되어 간다. 일찍이 아동화의 모방이라 냉소받던 클레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몰락의 위기에 허덕이던 유럽문화의 전통에 색다른 숨결을 불어넣어 주게 된다. "화가는 일찍이 현상계에서 정신계로 가지고 가버린 것을 반대로 정신계에서 현상계로 돌이키려고 한다"라는 클레의 독특한 추상에 대한 사고가 시대의 지지를 받았다.


'Sumpflegende', 1919 / '지저귀는 기계', 1922

작품 '지저귀는 기계(Twittering Machine)'새의 지저귐과 달리 기계가 제공하는 소리로 속도와 음폭이 한정되어 있다. 높은 창공을 날지 못한 채, 기계 속에 일체화된 새들은 단조로운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수히 반복되는 지저귐은 소음일 뿐이다.

클레는 주위 배경색에 중점을 둔 작가다.

대상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중시했다.



그랜트 우드(Grant DeVolson Wood,1891~1942) - 당시 대중문화의 아이콘

그랜트 대볼슨 우드는 미국의 화가이다. 1930년대 미국에서 전개된 중서부 지방주의 미술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 '아메리칸 고딕'은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아메리칸 고딕', 1930

우드는 아이오와 남부 작은 마을 엘돈에 있는 고딕 첨탑 하얀 집을 배경으로 여동생 낸과 전담 치과의사이자 친구인 맥키비 박사를 모델로 '아메리칸 고딕'을 그렸다.

그림 속 남자는 농부인 듯 건초용 갈퀴를 들고 있다. 손으로 세워 들고 있는 갈퀴가 방어적인 자세를 강조한다. 옆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뿐이다.

긴 목 부분  곱슬하게 삐져나온 머리카락과 목 부분 브로치는 엄격하게 억눌린 관능을 암시한다.

겉보기에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풍부한 시각적 반향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미국 중서부 지방, 보수적 가치를 풍자한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작가 본인은 이런 주장을 부인했다. 진의는 제목만큼이나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이 작품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미지 중 하나다.

우드는 화가로 잘 알려졌지만, 석판, 먹, 목탄, 도자기, 금속, 나무, 그리고 물건을 찾는 것을 포함한 많은 매체에서 일했다. 그는 평생 동안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아이오와에 본사를 둔 여러 사업체를 통해 그림 광고, 홍보 전단지를 위한 빈소 스케치 방, 호텔 식당용으로 옥수수를 테마로 한 장식품(샹들리에 포함) 디자인 등을 포함, 다양한 사업을 했다.



1920년대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미국은 발전과 호황을 이어갔다.

대공황은 1929년 주가 폭락 사태에서 비롯된 미국 경제 공황이 단기간에 전 세계로 확대, 광범위한 경기 침체 원인이 지속된 사상 최대 세계경제 공황이다.

1931년 5월 1일 개관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미국 대공황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건물 내 사무 공간 대부분이 임대되지 못하고 텅 빈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엠프티 스테이트(empty state 텅 빈 상태) 빌딩'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미국은 유럽 제국에 채무이행을 촉구하게 되었고, 1931~1933년 사이 경제공황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각국은 자본주의의 자동적 회복력을 상실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타격 입은 상황에서 치명타를 맞았고, 더 커다란 혼란을 겪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국과 미국은 자국 통화의 금본위제를 폐지한다. 미국은 경제 기조를 자유방임주의에서 정부 간섭으로 전환했으며, 케인즈 주의 영향을 받게 된다.



오토 딕스(Wilhelm Heinrich Otto Dix, 1891~1969)

제1차 세계대전 후, 비참했던 사회상은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토 딕스의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빌헬름 하인리히 오토 딕스는 사실주의 기법으로 전쟁의 참상을 화폭에 남겼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독일제국 몰락,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과 붕괴, 나치 독일 등장,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조국의 동서분단까지 잔혹한 격동기를 직접 겪었다. 오토 딕스는 혼란스럽던 독일 근현대사의 실상과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이면서도 기괴하게 표현했다.

그는 조지 그로스, 막스 베크만과 함께 표현주의에서 파생된 미술사조 운동인 *'신즉물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The War', 1929~1932 / 'The Skat Players', 1920


1937년 나치가 열었던 뮌헨 *'퇴폐미술전'에는 딕스 작품들도 많이 전시됐다. 나치는 오토 딕스의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취급했고, 당시 드레스덴 미술학교의 교수였던 그를 강제 파면하기도 했다.


'Salon', 1927 / '저널리스트 실비아 폰 하덴의 초상', 1926


1939년 오토 딕스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는 해당 사건과 연관이 없었다. 나치는 그들의 눈엣가시에 든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이들을 탄압하려 했고, 딕스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국민돌격대로 강제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부대에 잡혀 포로로 지냈고, 1946년에 풀려났다.

'파이 센 출신의 선원 프리츠 뮐러', 1919

딕스는 포로에서 해방되자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1966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전쟁 경험과 억압된 사회 속에서 보냈던 삶을 바탕으로 종교적 알레고리와 전쟁 *PTSD에 관련된 표현주위적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는 서독에서 여생을 보내며 미술계 평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화가 활동을 이어갔으나, 동독에서도 그를 독일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을 정도로 잘 알려졌다.


*신즉물주의: 표현주의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나머지 대상의 실재 파악을 벗어나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데 반대하여 실제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 실재감의 회복을 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퇴폐미술전: 독일 국민들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으로 퇴폐미술로 분류된 당시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걸어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전시회였다.

*PTSD: 전쟁, 테러,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성폭력, 교통사고, 트라우마 등 생명이나 신체를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을 동반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뒤 정신적인 성장을 보이는 것을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고 한다. - 자료출처: 나무위키



표현주의 청기사파는 독일 뮌헨지역에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활동한 표현주의 화풍 중 하나다.

대표적인 화가는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파울 클레 등이 있다.

다리파(1905~1913)와  함께 유럽에서 표현주의의 정착에 기여했다.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은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산업화의 폐해와 전쟁 징조를 그린 화풍이 독일 표현주의의 시작이다.

독일 표현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불안한 도시의 모습을 그리거나, 현실에서 주제를 찾지 않고 정신성을 강조하고 표현하는 식으로.

청기사파는 제1차 세계대전 시작과 함께 칸딘스키(19세기말 미술 1에서 미리 언급됨)가 러시아로 압송되고 마르크가 살해당하면서 종말을 맞는다.



에곤실레(Egon Schiele,1890~1918) - 표현주의 청기사파

실레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로, 1906년 클림트도 다녔던 비엔나의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실레는 그 해, 몇 명의 교수들의 주장에 의해 더 전통적인 학교인 비엔나에 있는 Akademie der Bildenden Kuenste로 보내졌다. 여기서 그는 매우 고집스러운 견해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선생을 만나, 이에 반발하여 몇몇 동료들과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고 3년 만에 학교를 그만둔다. 그는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구스타프 클림트와 많은 교류를 했다.


'가족', 1918 / '에곤실레 자화상', 1912

에곤 실레는 그림에서 외곽선을 강조해서 그렸다.

그의 작품은 성적 표현이 직설적이고 외설적이다.

안타깝게도 임신한 아내와 실레 본인 모두 젊은 나이에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세계경제공황은 1930년대 후반부터 기세가 꺾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군수물자 생산이 늘어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참혹한 전쟁이 세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쌓아 올렸던 경제적 발전은, 혹독한 파괴의 과정을 겪어야 다시 성장한다는 아이러니한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게 된다. 왠지 지금의 어려운 경제상황도 돌고 돌아 다시 꺾인 상태는 아닌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남북 간 긴장감도 점점 더 고조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  


현대 미술사를 빛낸 화가들은 차고 넘치는데, 평소 부족했던 관심과 정보로 아직 만나지 못한 화가들이 더 많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작가의 작품들을 이 브런치 북에 추가해 넣으면서 완성도를 높여가고 싶다.  

다음 주, 현대미술 3에서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만나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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