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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ul 12. 2024

시대정신을 비판하며 도약과 발전을 멈추지 않은 현대미술

다다이즘, 구축주의, 추상표현주의의 예술세계

다다이즘 

1915년부터 1924년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실존주의, 반 문명, 반전통 예술운동이다.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해서 독일을 거쳐 중부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 1920년과 1923년 사이 프랑스 파리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다다이즘은 무의미함을 표현하는 사조로 무의식이나 허무주의를 나타냈다.

다다이즘을 신봉하는 이들을 다다이스트(dadaist)라고 한다.

어원은 '까까', '빠빠', '쬬쬬'처럼 애들이 쓰는 의미 없는 말을 정설로 꼽는다. 서양 아이들이 다다다 하고 옹알이를 하는 소리와 같다.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거나, 작가들의 태도 그 자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예술가인 백남준과 작가 이상도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1887~1968)

뒤샹은 프랑스 예술가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1995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마르셀 뒤샹은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과 화가인 쟈크 비용의 아우이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근대 미술 수집가에게 한 조언은 수집가들이 서양 미술 세계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뒤샹은 1917년 뉴욕의 앙데 팡당 미술전에 흰 변기를 보내 반예술의 자세를 취하게 됐다. 결국 그는 보편적인 낯익은 기성품에 새로운 시점(視點)을 제공한 셈이다. '나는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전개적인 사상의 소유주인 뒤샹은 이후 완전히 제작을 단념했다. 그러나 그가 피카비아나 만 레이와 더불어 추진한 반예술의 경향은 다다이즘의 선구자로서 다다 부활에 새로운 재평가를 받고 있다.


'샘'은 뒤상이 세심하게 만든 도자기가 아니다. 당시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소변기였다.

뒤샹이 한 것은 단 하나, 소변기에 제작사(R.Mutt)의 서명을 한 것뿐이다.

당연히 작품이 나오자마자 평론가들은 '이게 무슨 예술이냐!'라고 했고, 전시회 큐레이터는 한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결국 당시 전시된 작품은 쓰레기로 버려져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남아있는 건 뒤샹이 나중에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뒤샹의 작품 '샘'은 Objet Art이다.


* 오브제 미술: 오브제(obzet)는 프랑스어로 물건, 물체, 객체 등을 말한다.

미술에서는 어떤 주제에 맞춰 추상적인 '물체'의 모양으로 표현된 작품들을 일컫는다. 원래의 용도나 기능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 '샘', 1917 / 'L.H.O.O.Q', 1919

특히, 191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붙인 'L.H.O.O.Q'라는 작품을 제작, 많은 놀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뒤샹은 오늘날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현대미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가이다. 현대미술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물질과 개념의 ‘엥프라망스(극도로 얇고 예민한 것, 미묘함을 뜻함)’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자전거 바퀴 의자', 1913 / '에땅 돈네', 1946~1966

대표작으로 '샘', '큰 유리', '자전거 바퀴 의자, '에땅 돈네' 등이 있고, 텍스트 작업, 이동식 작품상자, 체스판, 로즈 셀라비 연작 등의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뒤샹 사후에, 그의 집에서 '에땅 돈네 (혹은 에탕 도네, 말 자체는 '주어진'이라는 뜻 /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 : 가 주어졌다고 할 때) Étant donnés (Given: 1 The Waterfall, 2. The Illuminating Gas)'라는 작품이 발견되어 많은 사람이 놀라며 황당해했다. '에땅 돈네'는 크고 두꺼운 목재 문의 열쇠구멍 위치의 엿보기 구멍을 통해서  작품을 보게 되어 있었다.

'에땅 돈네'초현실주의 시작이란 평을 듣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구멍을 통해 실제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구멍을 통해서 보는 이 작품은 사람들의 관음증을 자극했다. 뒤샹은 20년간 '에땅 돈네 Etant donne(주어진)'를 그렸다고 하는데, 뒤샹의 성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

하우스만은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이자 작가이다.

베를린 다다(Berlin Dada)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그의 실험적인 사진 콜라주, 건전한 시 및 제도적 비평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유럽 전위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라울 하우스만의 작품 '기계적인 머리'의 두 눈엔 눈동자가 없다.

시대정신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

그로스는 독일 베를린 출신으로 베를린 다다의 중심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로스의 작품 'Remember Uncle August The Unhappy Inventor'(불행한 발명가 어거스트 삼촌을 기억하세요, 1919)머리에 단추가 달려있고, 짝짝이 눈, 무엇인가 달린 코 아래 입이 덩그러니 달려있다. 입은 말만 잘한다는 의미를 주고 있지만, 누군가 그 입을 망치로 한 방 먹이고 있는 그림이다.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이런 그림이 당시 독일에서 유행했다.


현대미술은, 기존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혼란한 시기를 보냈지만, 도약과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다다이즘은 근대적 기존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구축주의

구축주의는 회화, 조각, 건축, 문학까지 폭넓게 진행된 러시아 예술운동이다.

말레비치, 타틀린, 로드첸코, 긴즈버그 등은 사회학자이자 혁명가, 정치가, 기술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건축물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했다. 건축 형식은 대중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사회 구축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기능주의적 구조는 생활공간 디자인과 구성을 통해 대중의 신체에 각인되고 체득된다. 구축 주의자들에게 혁명은 무의식 건축적 구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1930년대 전후 사회가 스탈린주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1879~1935) 

말레비치는 러시아 화가로 키예프에서 출생, 초기엔 인상파 및 포디즘(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에서 출발했으나, 1912년 파리로 나와 큐비즘(입체파 브라크의 작품에 큐브(cube; 입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서 비롯된 명칭)을 접하면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말레비치는 타틀린 함께 1920년대 러시아 전위예술운동과 구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단기간 독일에 머물다 귀국했으나, 문화정책을 변경한 당국에 의하여 공직서 추방당했다.

이후 말레비치는 오직 실용미술(제도·직물·벽지)의 분야에만 종사했다.


1915년 첫 번째 작품인 '검은 사각형'을 발표한 말레비치는 이것이야말로 획기적인 이정표이며 절대주의 미술 운동(1915년~1919년)의 시작을 알리는 단초라고 선언했다. 절대주의 운동에 대한 선언문에서 말레비치는 이들 작품이 오로지 순수한 형태에 집중하게 된 것은, "객관적 세계라는 지반으로부터 미술을 해방시키려는 필사적 투쟁"을 의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종교화에 버금가는 감정적 영향을 미칠 그림을 그려내고자 노력했다.


'절대추상주의', 1916 / 검은 사각형, 1915

'절대추상주의(Suprematist Composition)' 작품을 보면, 그는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 제한적인 도형만 사용했으며, 흰색 바탕을 고집했다. 말레비치는 흰색을 '무한 공간의 진정한 색'이라 생각했고, 그 위에 그려진 사각형에도 삼원색과 흑백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 1920

타틀린(Владимир Евграфович Татлин,1885~1953)

블라디미르 예브그라포비치 타틀린은 러시아 제국 출신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디자이너, 무대미술가이다.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적인, '삶으로 다가가는 미술'을 표방했다. 

구성주의 기수였던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활약이 혁명 전후의 러시아 본국에 한정되어 있어서인지 그의 전기적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초기 작품은 평범한 평면 회화 작업들이나, 1913년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적 부조 '기타'를 본 후 회화 작업을 포기하고 부조와 역부조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잘리고, 구부러지고, 깨지는 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나타내는 역부조는 관념적인 사상이 아니라 물질적, 현실적 세계를 중시하는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기존의 물질을 중시하는 예술을 바탕 삼아 의자, 노동자 의복, 우유 용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등을 디자인하는 실용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러시아 전위예술운동과 구성주의 운동을 전개한 예술가이다.

타틀린은 거대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 The 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 설립을 시도했지만, 현실화되진 못했다.

그러나 타틀린의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도시 환경미술의 한 요소인 공공 설치물과 기념탑 제작에 있어 중요한 논제를 제공하고 있다. 조형물들은 시각문화 환경 조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추상표현주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았다.

세계 영향을 미친 미술 운동에서 뉴욕이 파리 대신 예술 중심지가 된다.

20세기 산업화 발전은 다양한 예술 사조를 가져왔다.

19세기말에 시작된 모더니즘 현상으로 입체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탄생했고,

1940년 이후 모더니즘에 한계를 느낀 예술가들은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포스트모던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구조주의 예술가들을 탄생시켰다.



'No.61(Rust And Bule)', 1953

마크 로스코 (1903~1970)

로스는 러시아계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다.

현대 추상미술의 대가로 불리는 로스코는 '색면 추상'이라 불리는 추상표현주의 대표주자다.


그는 추상회화의 본질과 형상에 혁명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전원 풍경화, 실내화, 도시 풍경화, 정물화, 뉴욕 지하철 그림들을 그렸다,

2차 대전 및 전쟁 직후에 그린 작품들은 상징적으로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적 모티브에 기반을 두기도 했다.

로스코는 순수 추상회화로 옮겨가던 과도기 시절, 소위 ‘멀티폼’이란 것을 만들어,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한, 직사각형의 색과 면을 표현했다.

작품 'No.61(Rust And Bule)'는 흐릿한 색조로 묘사된 고르지 않은 단색상 변형인 미세한 색조들을 사용, 넓은 범위로 채우고 있다. 색채를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계층화된 색으로 칠했다. 때로는 표면을 가로질러 위쪽으로 흐르는 페인트 방식도 보인다. 작품 마지막 단계로 그림을 뒤집어 표현했다. 'No.61' 작품에서 이런 효과가 잘 드러난다.



아쉴 고리키(Archile Gorky,1904~1948)

고리키는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 아르메니아 출신의 미국 화가로,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예레반으로 이주했다가 192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고르키를 20세기 미국 미술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그의 섬세한 감수성은 1940년대 초부터 그린 그의 그림에서 잘 드러나단. 고리키는 자유로운 필법으로 솔직하고 적나라한 내면의 고백을 표현했다.

이는 선에 의한 자동기술법으로 잎, 곤충 등 자연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형상들이 조화롭게 융합되어 마치 풍부한 형태들이 흐르는 우주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독창적인 그림들이었다.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선구적 업적이었다.

초현실주의 영역에서는 이념의 또 다른 확산을 의미했고, 고리키의 작품은 점차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불행한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46년 화실 화재, 암 선고와 수술, 48년 자동차 사고로 그는 왕성했던 작품활동마저 꺾이고, 이어진 아내의 부정과 성 불능 등 감내해 내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절망과 우울증을 견뎌내지 못한 고리키는 44세의 젊은 생을 자살로 마감했다.


'Agony', 1947 / Water of The Flower Mill, 1944

'Agony(고통)'은 고리키가 자살하기 전 해인 1947년에 그려진 말년 작품이다.

그가 전하려 했던 고통을 제대로 느껴보려던 노력은 난해한 현대미술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지만, 어렴풋이 무겁게 느껴지는 혼돈이 '고통'을 전한다.  

'Water of The Flower Mill(꽃방앗간의 물)'은 코네티컷주의 오래된 방앗간과 다리를 바탕으로, 고향 아르메니아의 대한 향수를 담은 작품이다.

초크 리얼리즘 영향을 받은 고리키는 유동적인 생태와 풍경을 평평하게 겹치는 색채 등으로 1950년대 등장한 추상표현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1904~1980)

스틸은 미국 화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회화에 대한 새롭고 강력한 접근 방식을 개발한 1세대 추상 표현주의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스틸은 1940년대 중반부터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빌럼 데 쿠닝 그리고 바넷 뉴먼과 함께 대형캔버스를 사용하여 가장 미국적인 회화로서 순수 색면추상까지 이룩해 낸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화가로서 성공이 보장됐던 뉴욕 페기 구겐하임 금세기 갤러리에서 1946년 첫 개인전을 개최했으나, 갤러리와의 전시계약을 일종의 노예 계약처럼 여겼다.

스틸은 자신의 창의성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느꼈던 갤러리, 큐레이터, 비평가의 위상이 어떤 때는 그보다 더 상승하는 것에 분개했다. 미술품이 상업적으로 거래되고 힘과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증오했던 그의 작가 정신은 순수하고 숭고해야 하는 작품을 돈으로 값을 매기는 행위에 반발했다. 결국 그는 베티파슨스 갤러리에서 1951년 세 번째 성공적인 쇼를 마친 후 상업적 갤러리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이후 스틸은 1952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15명의 미국인들" 전시에서 마크 로스코와 함께 자신 작품만을 위한 별도의 개인 전시실을 조건으로 참여했다. 버펄로의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1959),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1975),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1979)에서 주요 개인전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을 뿐 대부분의 삶에서 스스로 은둔 생활을 택했다.

스틸은 초기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뉴욕미술계와 교류를 끊고 예술의 상업적 거래를 혐오하며 자신 작품의 도덕적 순수성을 위해 198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품을 직접 관리하며 살다 갔으며, 스틸의 통제는 사망 이후에도 이어졌다.


'1957-D No.1',   / 'PH 76', 1935

'1957-D No.1'은 검정과 노란색을 사용했다. 흰색 패치는 빨간색이 거의 없다. 4가지 색상은 다양한 색상의 다양한 변형인 puples, dark blues를 기본색으로 사용했다.

두껍고 질감 있는 도료가 세로로, 여러 색상의 고르지 않은 레이어로 칠해져 그만의 '추상화가' 됐다.

그의 회화 스타일은 대칭과 균형을 거부하면서도 독특한 구도를 지녔다. 색상 집합을 다양하고 불규칙한 패턴으로 구성, 페인트의 모든 레이어가 고르지 않게 보이는 특징을 보였다. 스틸의 그림은 대부눈 어두운 색조로 그려졌다.     



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쿠닝은 20세기 네덜란드 출신 화가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 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별하다. 쿠닝은 잭슨 폴락과 함께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작가다.

추상표현주의 창시자의 한 명으로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Woman V , 1961 / Woman V, 1953

작품 'Woman V'(1953)는 자신의 어머니를 표현한 작품이다.

1940년대 들어 쿠닝은 인물 표현에 관심을 갖는다.

1950년 초반부터 시작된 "여자" 시리즈가 잘 알려져 있다.

쿠닝이 그린 '여자'는 캔버스에 붓으로 그린 것이지만, 감정이 향하는 대로, 붓을 놀린 것처럼 보여, 화면은 거의 추상에 접근한다.

그 후 화면에서 쿠닝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배제한 추상적인 작품을 그렸던 시기도 있었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여자'를 테마로 한 작품을 그렸다.



잭슨 폴록(1912~1956)

잭슨 폴록은 추상 표현주의 운동 기수인 미국의 화가다.

그의 부인은 추상화가 리 크래스너다.

그는 와이오밍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했다. 1930년대부터 표현주의를 탈피하고, 초현실주의의 작품을 그렸다. 44세 나이로 음주운전 관련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라벤더 안개', 1950 / '초상화의 꿈', 1953

'라벤더 안개(Lavender Mist Number1)'는 이야기 없이 형태와 색채로만 표현한 작품이다.

그의 그림은 일정하게 정해진 화면이란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공간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폴록은 "드립핑"(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회화를 즐겨 그렸다.


'초상화와 꿈'에는 자아 분열의 이미지가 담겼다.

폴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성장했고,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결혼 후에도 동성애를 즐겼다. 그에게서 일어난 자아분열이 '초상화의 꿈'에서 드러나고 있다.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1915~1991)

마더웰은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표현주의 1세대를 주도한 예술가이다.

1940년대 미국이 세계 미술계의 주류로 대두하는 전환기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로버트 마더웰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미술의 주요 흐름의 화가이자 저술가, 기획자, 비평가로 크게 기여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2차 대전 발발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어울렸다.

1941년 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고, *쉬르레알리슴에 감화되어 *오토마티슴의 실험을 꾀하였다. 그는 오토마티즘에 매료되어, 우연한 붓질에 의한 자발적이며 무의식적인 감정 표현에 빠져들었다. 일정하지 않은 추상 형태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그렸다.


*쉬르레알리슴(프랑스어 surréalisme)은 1920년대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진 문예·예술사조의 하나인 초현실주의(영어 surrealism)를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다다이즘의 예술 형식 파괴 운동을 수정, 발전시키고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이다.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여러 작품들이 있다. - 참고 자료: 위키백과


*오토마티슴(Automatisme)은 우연을 이용하여, 만인에게 가능한 쉬르레알리슴의 방법으로 이성이나 의식에 지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화필을 자유롭게 움직여 그린다. 오토마티슴은 원초적이며 문명의 냄새가 묻지 않은 무의식의 메시지에 가깝다.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 No.110', 1971 /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 No.110E',  1968

마더웰은 1948년, 그의 대표작인 '스페인 공화국에의 비가(Elegy to the Spanish Republic)'의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이론가로서도 활약했다.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 No.110'은 스페인 내전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마더웰의 추상미술은 외적 세계의 묘사보다 주관의 감수성과 추상적 구조에 대한 감각을 더 중시했고, 인간의 시각이 지닌 우월성보다 회화 언어 자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작품 'Elegy to theSpanish Republic No.110E' 인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강렬한 붓질과 흑백의 대비로 이루어진 원형과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성으로 표현됐다.



윌리엄 어터몰렌(William Utermohlen,1933~2007)

어터몰렌은 미국 출신의 영국 화가로, 1995년 63세에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2007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알츠하이머병 진단 전, 어터몰렌은 신화, 전쟁, 자기 아내 등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고흐와 비견될 만큼 인상적인 색채를 사용했던 화가였다.

그가 치매 진단 후 남긴 작품들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의 내면을 전하는 소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어터몰렌은 5년 동안 자기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때까지 자화상을 그렸다.


어터몰렌은 치매에 걸리면서 화풍까지 달라지기 시작했다.

치매에 걸리면 기억력과 언어 능력이 감퇴된다는 사실이 연도별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도 치매에 걸린 후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터몰렌의 그림이 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치매에 걸린 노년의 삶에 대해 진한 안타까움과 회의감이 교차했다.   


치매에 걸린 월리엄 어터몰렌 자화상의 안타까운 년도 별 변화


그의 그림들은 알츠하이머병이 사람의 뇌를 어떻게 잠식해 가는지를 시각적으로 밝혀 준 소중한 작품이다. 어터몰렌은 1996년까지만 해도 뚜렷한 개성의 화풍을 가진 뛰어난 예술가였다. 알츠하이머병이 진행되면서 그림에서 색채가 사라지고 스케치 선이 뭉개진다.

결국 2001년 이후 캔버스에 낙서만 남겼고 더는 종이 위에 선을 그을 수 없게 되면서 투병에 전념했지만 어터몰렌이 남긴 그림은 예술로서뿐만 아니라 의학, 심리학 분야에서 의미 있는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인지신경학 및 알츠하이머병 센터는 로욜라 대학교 미술관(2016년 2월~7월)에서 윌리엄 어터몰렌의 전시회를 열어 알츠하이머병을 대중에게 알렸다.


'윌리엄 어터몰렌과 그의 아내 패트리시아', 1990~1991

발병 후 화풍이 거칠어졌고 자주 활용하던 색채의 느낌도 달라졌다. 그림의 주제도 아내, 친구, 환경, 자기 삶, 애착을 느끼는 물건, 책 등에 중점을 둔다. 공간 인식 변화로 작품 속 묘사된 공간이 뒤죽박죽 됐고 혼란스러운 배치를 보여주었다. 강렬한 빨간색과 녹색 문과 침대 등 불길하고 불안한 정서가 그림에 담겼다.


어터몰렌의 자화상, 1967 / 'Blue Skies(푸른하늘)', 1995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181043



20세기 후반 미술은 더 과격한 미학 모험과 실험을 거듭했다.

*앵포르멜 미술과 액션 페인팅 등장으로 전쟁이전 고전적 추상 미학에 종지부를 찍는다. 전후 동향은 전전 '이즘' 중심 미술 운동과 달리 '아트(art)'를 앞세운다.

팝 아트, 옵 아트,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정크 아트까지 오늘날 개념미술(conceptual art) 등이다.

20세기 전반기 미술은 조형(造形)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반면, 전후 미술은 조형조차 거부한 채, 창조나 행위 자체 본질을 규명하려 했다. 조형 문제를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집약한 것이 바로 추상미술 표현 형태다. 창조 행위의 미술 형태인 '오브제 미술'을 거쳐 오늘날, ‘개념미술’인 콘셉트튜얼 아트(conceptual art)가 등장했다.


*앵포르멜(Informel): 타시즘(Tachism), 다른 미술(Art autre),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으로도 불린다.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을 말한다. 앵포르멜의 선례는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폴 클레(Paul Klee)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실질적인 선구자는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볼스(Wols), 한스 아르퉁(Hans Hartung)과 같이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한 미술가였다. - 자료출처: 나무위키


*콘셉트 아트(Concept Art): 콘텐츠를 창작하기 이전, 아이디어 전개와 상황 연출을 하기 위한 사전 예술 단계를 아우르는 용어이며, 콘셉트튜얼 아트(conceptual art)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개념미술이다.

현대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 설정을 글과 말로 정리하는 것에 멈추지 않았고 시각화해서 전달하기 위한 콘셉트 아트를 만들었다. 서양권에서는 Entertainment design이라고 불린다.

로잉(drawing), 채색화(painting)와 같은 일러스트레이션 (Illustration) 등의 형식으로 콘셉트 아트는 단순 콘텐츠 제작의 사전단계뿐 아니라 출판, 영상, 음악 등의 다양한 매체와 어우러져 본 콘텐츠보다 콘셉트 아트의 인기가 더 많은 사례도 있다.

콘셉트 아트는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프로세스에서 제작되는 아트웍이므로 개략적인 창작자의 생각이 드러나 그들이 정한 법칙과 논리, 고민을 알아차릴 수 있다.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 ~1964)

포트리에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 앵포르멜미술의 중요한 확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출생 후, 얼마 뒤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포트리에는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항전(抗戰)과 미술로 표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1920년부터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려 회화에 전념했다. 이 무렵의 제작한 작품들을 '새우갈색의 시대'라고 한다.

1927년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포트리에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 앙드레 말로와 인연을 맺고, 단테의 지옥편에 삽화 그리는 일을 주선받았다. 이 무렵을 '흑의 시대'라 한다.

이어 포트리에의 '그레이의 시대'가 열린다.  그의 작품에는 더욱 강하게 비구상으로 향하는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포트리에는 스키 강사를 하면서 그의 '청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에 그는 앵포르멜풍의 양식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1940년 파리에 있던 그의 집은 레지스탕스의 본거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재료의 물질감을 이용해 인간 본질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진 장 포트리에의 연작 '인질' 작품들

포트리에는 1942년에서 1944년까지 그의 유명한 연작 '인질'을 제작했다. 1940년대 초 대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그가 보여준 ‘인질’ 시리즈는 인간을 물질로 해석한다. 석고나 시멘트를 두껍게 발라 무슨 형상인지 알 수 없는 화면이다. 한데 엉겨 붙은 시체의 끔찍한 충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인간을 물질로 취급하는 극한 전쟁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 기억은 그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았다.


'Sanza titolo', 1960 / 'Piccolo fantasia cromatica', 1959


엥포르멜 화풍의 작가들 - 잭슨 폴록과 볼스

아래 왼쪽,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록의 작품 '무제'다.

앵포르멜은 '추상표현주의'와 더불어 표현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다. 이는 큐비즘의 전통과 기하학적 추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Jackson Pollock의 'Untitled', 1942-1944 / Wols의 'unknown title', 1940

오른쪽 작품은 앵포르멜의 대표적인 화가 볼스(Wols)'unknown title'이란 작품이다.

강렬하고 거침없는 드로잉과 비정형적인 구조가 담긴 그림이다.

볼스는 앵포르멜의 부정형 또는 비정형, 그대로 형태를 거부하고, 격정적 주관적인 표현주의적 추상회화를 그렸다.

 


엥포르멜 화풍으로 그린 우리나라 작가 - 윤명로와 김종학

윤명로의 '문신 64-1', 1964 / 김종학의 '작품 603', 1963

서로 전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화가들이 그린 작품이지만, 엥포르멜 화풍이 강하게 느껴진다.

모두 우연성을 존중하면서 자발성과 본능의 풍요로운 자유를 추구하면서 무정형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그 자유분방한 붓질에 감탄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화풍의 그림을 내 집 거실에 걸어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런 현대그림은 난해할 뿐 아니라, 무겁고 복잡하고 어둡다.

내 감성과 취향은 19세기 화풍의 화가들에 멈춰있는 것 같다. 밀레, 고흐, 쇠라, 무하, 마티스의 그림이라면 이곳저곳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고 싶다.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1965 ~ )

쿠시1965년 러시아(당시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여 소련해체 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보석 디자이너, 조각가이다.

카메라와 각종 기록 영상장비의 기술향상으로 그림 테크닉보다는 사실상 아이디어로 승부가 옮겨간 현대 미술계에서 쿠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주목받는 예술가이다.


'해돋이 해변', 1990년경/ '이별의 키스(farewell kiss)'

'해돋이 해변'의 붉은빛은 저녁노을이 아니라, 아침노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려는 자는 반드시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하니까.

'이별의 키스'노을 지는 바닷가 구름이 여성의 붉은 입술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입술 사이로 눈부신 빛이 흐른다. 그림 한 구석에 실제 키스하고 있는 연인이 모습도 보인다. 쿠쉬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명화다.

지구(바다)와 하늘(천국)이 맞닿아 있는 작품의 주제는 낭만적인 '이별의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묽게 물든 하늘과 바다 배경이 오래된 신화같이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는 이별 후에도 계속 신화처럼 전해질 것만 같다.  

이제 이별을 해야 하는 건 두 사람뿐이 아니다. 노을빛도 지고 나면, 곧 온 세상에 어둠이 깃들고 세상 빛도 이별을 고할 것이다.


현대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20세기 후반기 미술을 가리키지만, 전후 미술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근대미술은 19세기 미술을 포함한 20세기 전반기까지를 일컫지만, 이런 연대에 의한 구분은 종종 혼란을 준다.  현대미술이 전후에 갑자기 태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미술은 이미 20세기 전반기, 전위적(前衛的)인 미술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추상미술의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의 그림으로 이어진 *바우하우스 운동 등이 그 예이다. 보다 포괄적으로 20세기 미술을 현대미술로 보고 감상하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부족한 대로 서양미술사를 쭉 둘러보았지만, 마지막 회를 써 내려가는 마음은 가뿐하기보단 무겁다. 너무 방대한 서양미술사를 들여다보면서 수박 겉핥기식이지 않았는지...


*바우하우스: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했다.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려는 것이었다. - 자료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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