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한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부여했다.
상징주의는 현실 생활 표현을 강조한 인상주의와는 다르다. 상징주의자들은 과거의 신화나 이국적, 신비적 요소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미카로 유스 콘스탄티노스 츄루료니스(Mikalojus Konstantinas Čiurlionis),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피에르 퓌비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가스통 뷔시에르(Gaston Bussière), 펠리시앙 롭(Félicien Rops) 등이 상징주의 화풍의 화가다.
지난 07차에서 표현주의 화가로 소개했던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도 상징주의 화풍을 보여주기도 했고, 분리파의 대표 예술가가 된 구스타프 클림트도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자였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작가다.
'키스'는 1907-1908년 그가 황금시기에 그린 황홀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여자는 동글동글한 무늬, 남자의 무늬는 직사각형을 사용, 부드러움과 강함을 황금색으로 담아냈다.
그는 도금하는 기법으로 다수의 그림을 남겼다.
실레가 클림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은 클림트의 '키스'와 비교되는 '추기경과 수녀'의 작품과 '다나에'라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린 것에서 드러난다.
클림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키스'를 보면, 성적 표현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화려한 금빛 가운과 생동하는 녹색, 분홍, 노랑꽃으로 가득한 배경들이 키스의 황홀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서로를 탐닉하는 두 사람의 모습 뒤에 남성의 성기 형상이 교묘하게 감춰져 있으며, 남자의 가운에 그려진 직사각형의 반복 패턴은 남성성을 암시하고, 여성의 꽃무늬 원형 문양 가운은 여성성을 상징한다.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 미술관'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는 오스트리아의 출신의 화가로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에서 만나 많은 교류를 한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도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끈 분리주의 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는 지난 08화에서 미리 소개한 바 있다.
고백하건대, 훌륭한 화가들은 많고, 그들의 영혼이 담긴 작품 또 얼마나 많은지, 함께 소개해야 할 작가들을 이렇게 따로 만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되짚어 볼수록 그 진가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니, 오히려 더 잘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은 오스트리아 빈 무제움스크바르티어에 있는 현대 미술관이다. 여기에는 에곤 실레,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스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의 작품이 있다. 에곤 실레의 컬렉션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50년 동안 엘리자베스와 루돌프 레오폴트 부부에 의해 수집된 5,000점 이상의 작품은 오스트리아 은행의 협력으로 레오폴트 박물관 재단이 관리하게 되었다. 레오폴트 박물관은 2001년 개관하였다. 주된 소장품은 20세기 전반의 오스트리아 미술 작품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10세기,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주요했던 예술의 흐름이 전시되어 있다. - 위키백과
키스 해링(1958~1990)은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그라피티를 예술로 인정받게 하고 뉴욕 미술계에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난 키스 해링은 1978년 뉴욕의 예술학교에 입학하고, 뉴욕 거리 곳곳에 그려진 낙서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자신의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를 바라며 지하철역 빈 광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공공시설물 훼손 혐으로 경찰에 수차례 잡혀가기도 했다. 1982년 개인전을 개최하며 미술계의 스타로 거듭난 해링은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이 고가로 거래되면서 대중과 멀어지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팝 숍’이라는 굿즈샵을 열고 누구나 마음껏 그의 작품을 관람하고 티셔츠나 장난감, 스티커 등 일상 속에서 예술품을 소장할 수 있도록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던 그는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낙서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고급 미술을 대중 미술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인정받으며 팝 아트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호프만은 독일 뮌헨 태생 미국 화가이자 교사였다.
19세기 초반 유럽 전위 예술에 적극 참여했다. 1932년 미국으로 이민했을 때, 상징주의, 신인상주의, 포디즘, 큐비즘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한스 호프만은 뮌헨미술학교를 다닐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1903년부터는 미술품 수집가 필립 프로이덴베르크의 후원을 받았다. 1904년 파리로 간 한스는 마티스에게서 야수파 회화를, 피카소로부터는 큐비즘 미학을 흡수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과 함께 필립의 후원이 중단된 후, 교육에 관심을 가진 그는 뮌헨 근교에 미술학교를 열어 세잔느, 입체주의, 칸딘스키의 추상에 관해 지도했다.
모더니즘에 관한 한 백과사전으로 불렸던 호프만은 1933년 학교를 뉴욕으로 진출시켰다. 그의 강의는 잭슨 폴록, 리 크래스너, 드쿠닝 같은 젊은 화가들과 그린버그, 로젠버그 등 평론가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는 1939년부터 추상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예술은 추상표현주의적 요소와, 색채로 모양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밀고 당김'(push and pull)이라 불린 색조들의 상대성 관계가 '캔버스의 평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깊이를 표현했다.
만년의 호프만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성으로 그려진다.
호프만은 교육자와 화가로 미국 회화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색들이 노래하게 하고,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려고 한 추상미술사의 선구자이다.
한스 호프만의 작품은 구조의 일치, 공간 환상, 대담한 색 표현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
미래파는 1912년 '미래주의 선언'을 한 이탈리아에서 전개된 전위예술운동이다.
혼란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적 세계관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자코모 발라는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미래주의 화가로서 초기에는 인상파 화풍을 따랐으나 미래주의 선언 이후 미래주의 화풍을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 전쟁에 참여한 작가들도 있고, 나중에 파시즘과도 연결되는 사상이다.
현대생활의 역동성을 그림 속에 감각적으로 담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기차, 경주용 자전거, 무희들의 동작, 움직이는 동물 등과 같은 대상을 선호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은 아름답고 훌륭하게 기리며 드러내고자 했다.
보초는 미래파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조각가, 화가다.
보초니는 1911년 피카소를 만난 후,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미래주의 형식으로 바뀐다.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연속성'은 보초니가 1913년 제작한 미래파 청동조각작품이다.
높이는 111.44cm이며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간의 단절 속에 있던 고정된 외형을 떠나 시공간을 초월한 피사체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유연함을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20유로 센트 주화 앞면에 새겨져 있다.
그의 입체주의 작품인 'Charge of the Lancers(돌격대)'에서는 달리는 말에 속도를 입혀 미래주의 형식이 엿보인다.
보초니는 미래주의 리더로 다양한 영역에 움직임을 도입, 미래주의를 작품으로 현실화하는 데 주력했다. 보초니는 마리네티 속도감을 중시하며 회화와 입체 움직임을 적용한 열성적인 화가였다.
'공간에 나타난 연속성 독특한 형태'를 완성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불의 낙마 사고로 34살에 사망한다. 그리고 미래주의가 추구했던 이념은 보초니 죽음과 함께 빠르게 사그라졌다.
속도를 중시했으나, 그 빠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쇠퇴해 버렸다.
세베리니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로, 그는 평생 동안 파리와 로마를 오가며 살았다.
주로 파리에서 생활했던 그는 큐비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초기엔 '발라'로부터 배운 분할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질서로의 복귀'로 불리는 구상화 복구 움직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 전통정신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전통미술, 상징주의 미술, 프리미티비즘, 순수파 미술 등 다양한 경향을 거쳤다. 세베리니의 그림은 수학적, 기하학적 기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세베리니는 춤추는 사람 모습을 소재로 형태를 역동적으로 분해, 움직임을 분할주의로 표현한 미래주의 탐구자다.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진 문예·예술 사조다.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여러 작품들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부여했다. 정신분석가 프로이트 학설의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지성을 초월한 꿈, 무의식(unconscious; 잠재의식 subconscious과 구별됨)의 세계를 해방시키려는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미술에서의 초현실주의는 추상미술과 함께 20세기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조이자 양식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작품 중 좋아하는 그림만 떠오려 봐도, 많은 유명 화가들의 얼굴이 계속 이어서 떠오른다.
데 키리코(1888~1978)는 이탈리아 화가이자 작가이다. 그는 초현실주의 초기 단계 중 형이상학적 회화(metaphysical art)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후기에는 꿈꾸는 듯한 사물들을 작품 구성에 포함시켜 비현실적인 구도로 배치했다. 키리코는 20대에 '거리의 신비와 우수'와 '사랑의 노래' 같은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작품들을 그리지 않고 라파엘로, 루벤스 같은 고전적인 화가의 작품들을 ‘모사’하는 평범한 화가로 전향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키리코를 가리켜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동시에 배신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데 키리코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1909-1919년 사이 그려진 그림들로, '사랑의 노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화면 오른쪽의 건축물은 지중해의 고대 도시정경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화면 왼쪽, 지붕 위의 연기 나는 굴뚝은 증기기관차가 달려가는 형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그림의 중심이 되는 화면 중앙 벽에는 무심하게 걸린 거대한 그리스인 두상의 초점 없는 두 눈과 붉게 번들거리는 빨간 장갑의 부자연스러운 조화가 이유 없이 불편하다. 어두운 바닥 위에 놓인 커다란 녹색 공은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이 작품은 바라볼수록 무언가에 사로잡힐 듯한 수수께끼 같은 상상의 장면 속 꿈길은 걷는 듯하다. 이러한 연출은 키리코의 작품을 통해 또 하나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모호한 상황이 멈춰 선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
'거리의 신비와 우수'는 틀어진 시공간, 몽환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소녀는 굴렁쇠를 굴린다. 그림자 속에 갇힌 채 언덕으로 향한다.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상각 건물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있다. 작품에는 아케이드 등 건물들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중앙을 비롯 다양한 시점에서 본 공간의 구조가 투영되어 있다.
맞붙어 있는 땅은 어둡지만, 그 옆은 눈부시다.
행인, 자동차, 개 짖는 소리까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적막한 한낮의 거리는 현실감을 상실한다.
'시인의 불안'이란 제목과 그림이 잘 연관되지 않는다.
텅 빈 광장에 석재 여인상 토르소와 바나나 다발은 여성과 남성의 에로스적 상징이라고 한다. 데 키리코에게는 신비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형이상학적 기호들이다.
그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깊게 이해하고 은유적 상징 이미지 기호들로 형이상학 회화를 구축했다.
초현실적 꿈을 화폭에 담아 예술로 발달시켰다.
호안 미로(1893~1983)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 화가, 조각가, 도예가다. 그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특유의 어두운 느낌이나 심리묘사는 적고 밝은 소박성이 특질이며 모두를 순수한 상징기호로 바꾸어 가는 매력이 있다.
미로는 세 점의 대형 그림 '블루 1~3'는 1961년 마요르카에 있는 새 작업실에서 그렸다. 1961년, 세 번의 미국 여행과 파리 갤러리 매이트와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의 전시회 이후, 그의 작품들은 더 깊어지고 정화되어 가는데, 이런 변화는 블루 1, 2, 3에서 예고되었다.
미로는 독특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물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코드들을 놀이하듯 그려냈다. 특정한 궤적은 점으로 끝나는 선, 얇은 것으로 나타냈고, 기호는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미로만의 방식으로 사용됐다.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방식으로 새로운 예술세계의 자유, 재료와 색상에 대한 자발적인 창조성을 보여 주었다.
'새한테 돌을 던지는 사람'은 거대한 발을 갖고 있다. 새는 단순화시켜 표현했다. 사람은 새에게 흰 돌을 던진다. 사람의 손은 하나의 선으로 돌이 날아간 흔적과 닿아있다. 미로는 이 작품에서 현실(도시)과 이상(자연)의 세계를 오가고 있다.
앙드레 마송은 20세기 미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프랑스 화가다. 파리에서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화가로 활동하면서 내면의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는 오토마티즘을 개척했다.
그의 회화는 새로운 재료적 실험으로 주목받았다.
1930년대 물감과 모래를 혼합하는 기법을 사용, 장 뒤뷔페의 ‘모래그림’ 완성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직관에 따른 자유분방한 붓질을 특징으로 하는 *타시즘과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영향을 끼쳤다. 마송은 광범위한 예술분야에서 활동한 20세기 미술의 주요 작가로 꼽힌다.
무의식을 예술로 표현한 마송의 작품이다.
붓 가는 대로 표현한 '오토마티즘'은 의식 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무의식 세계를 표현했다.
*타시즘: '얼룩' '자국'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타슈 tache'에서 유래한 말로 195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적인 경향에 대한 조소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엄격한 화면 구성을 거부하고 작가의 직관에 따른 자유분방한 붓놀림과 거친 터치를 특징으로 한다. - 두산백과 두피디아
달리는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영화 제작가이다.
그는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근대 미술, 다다이즘을 추구했다.
달리는 스페인 내전(1936~1939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다가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1948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가톨릭 신앙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고전주의, 신비주의, 당시 첨단 과학발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핵 신비주의' 스타일을 발전시킨 화가다. 달리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독특한 개성과 행동으로도 유명했다.
'기억의 지속'은 달리의 유명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계의 모습이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고, 녹아내리는 시계, 늘어진 시계 등으로도 널리 알려져 왔다. 녹아내린 시계를 보면서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지속'은 결국 시간과 공간까지 녹여(희미해져) 낸다,
초현실주의에 부드러움과 견고함 조합이 돋보인 작품이다.
달리의 작품은 프로이트 학설을 따르고 있지만, 1945년 원자폭탄 투하 후, 과학적인 측면을 표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작품에서도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의 왜곡'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 나무는 칼처럼 뾰족한 사물을 표현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다른 요소와 어울려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열망과 두려움, 테러, 전쟁에 대한 공포도 나타난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황금색 절벽은 달리의 모국인 스페인을 상징한다.
작품 '위대한 자위행위자'는 카탈로니아 해상에 있는 Cap de Creus의 자연 암석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아래쪽을 바라보는 형상은 외모가 왜곡된 인간의 얼굴이다.
이 작품은 성행위에 대한 달리의 심한 갈등을 나타낸다.
어린 시절 보았던 병든 생식기 사진은 젊은 달리를 황홀하게도 했지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마그리트는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다.
광고회사를 다니다 우연히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집을 보고 영향을 받아 화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키리코 풍의 괴상한 물체나 인간끼리의 만남 같은 풍경을 그리다가 1936년부터 고립된 물체 자체의 불가사의한 힘을 끄집어내는 듯한 독특한 세계를 조밀하게 그리기 시작했고 말과 이미지를 애매한 관계로 둠으로 양자의 괴리를 드러내 보이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연인들, The Lovers'는 열렬한 사랑을 나누는 얼굴이 가려진 두 사람의 모습이 기괴하고 싸늘한 느낌을 준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무언가로 얼굴을 대체하는 그림들이 많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것이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마그리트 본인은 이를 부정하며, '철저하게 사고를 하고 그린 것'이기 때문에 트라우마로 인한 형상표현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미지의 배반'은 마그리트의 대표작이자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 주는 작품이다.
흔한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마그리트는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림과 문장을 모순되게 표현했다.
화가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역설이다.
1948년부터 마그리트는 같은 주제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10개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마감했다.
모든 작품은 '빛의 제국'이라는 공통의 제목이 붙여져 있다.
소읍의 작고 평화스러운 한 채의 집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바라보면, 문득 생각에 잠겨버리게 된다. 문은 어둠에 싸였고 가로등이 켜졌으며 집도 마당도 그리고 나무도 밤의 정적 속에 잠겨 있는데 하늘만이 그렇게도 밝고 흰 구름마저 뚜렷이 떠 있다. 창문 안에서 발산되는 빛과 실외 빛은 하나다. 가로등 빛으로 조명된 잎 풍성한 나무, 그 사이로 집과 건물이 보인다. 밝고 부드러운 구름으로 덮인 낮의 푸르른 하늘이 화면을 덮고 있다.
전기 불빛이 주의를 끌고 있는 밤의 풍경과 함께 할 수 없는 푸른 대낮 풍경은 주의 깊게 살피지 못 한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마그리트는 이러한 연작으로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표현했다. 회화는 사고를 나타내고, 일상적인 삶의 경험에서 확실성을 갖지 못한 현실을 그려낸다.
데이즈망 기법은 마그리트가 되풀이하는 표현이다.
프랑스 말인 depaysement(사람을 다른 생활환경에 둔다)란 말은 어쩌면 프로이트가 '꿈'의 한 현상으로서 지적한 *전위(轉位)라 해도 무방하다.
꿈속에서는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꿈에서는 공간과 시간이동이 자유롭다. 마그리트의 '빛의 왕국'도 밤인 동시에 한낮이기도 하다. 그의 뛰어난 묘사기법이 돋보인 작품으로 그가 가진 역량이 자연스레 드러난 명작이다. 그의 묘사기량은 낮과 밤도 종이 한 장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 전위(轉位, 영 : displacement, 독 : Verschiebung)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로, 마음이 위험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원형 그대로 느끼는 목표(goal)를 대신하여 새로운 목표나 목적(object)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 위키백과
다음 주에는 러시아 구축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살펴보고, 혹시 빠진 귀한 작품이 있다면 추가로 더 올리면서 서양미술사 10화를 마무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