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재고택의 아름다운 정원은 외암마을의 대표적인 정원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은 약 500년 전부터 부락이 형성된 곳으로, 반가의 고택, 초가 돌담(총 5.3㎞)과 한국적인 정원 등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외암 마을은 앞쪽으로 넓은 농경지가, 뒤로는 설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구룡지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외암민속마을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 외암(巍巖) 이간 선생이 살던 곳으로 이곳 아름다운 풍경과 옛집들은 영화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그 진가를 널리 알린 바 있다.
'외암'이라는 마을 명칭은 외암리의 서쪽에 있는 '역말'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역말에는 조선 초부터 시흥역이 있었다. 예안 이 씨 중심인 외암마을은 시흥역의 말들을 거두어 먹이던 곳으로 '오양골'이라고 불렀다.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시민(신분증 지참)
보호자가 동반한 7세 이하의 어린이
주민등록증 또는 경로우대증을 소지한 65세 이상의 노인은 입장료 면제
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 위로 놓인 반석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널따란 습지의 연꽃 군락지가 펼쳐 있다. 연꽃은 이미 거의 졌지만 아직 지지 않은 몇 송이 연꽃이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고운 미소를 지어 보냈다.
연꽃 군락지 뒤로 펼쳐진 야트막한 구릉지에 한옥들이 모여있다.
아름다운 구릉지 마을 풍경은 두 눈에 담아두고, 관리사무소가 있는 왼쪽 사잇길로 들어섰다.
다양한 표정의 장승들이 외암 민속관으로 향하는 내게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 세월 마을의 재액을 막아내기 위한 장승 가족의 기원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8월 14일, 오전엔 변덕스러운 날씨로 소낙비도 오락가락했고, 오후엔 극성스러운 무더위도 여전했다.
이런 날씨 탓인지, 외암민속마을에도 내방객이 많지 않았다.
외암 민속관을 둘러볼 때는 하도 한적해서 나 혼자 5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듯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입구 물레방아도 멈춰있었지만, 외암 민속관 내 공연장, 떡 메치기장, 모유 수유실, 전통 혼례장도 텅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풍성한 가을에 다녀가면 더 좋았겠다'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홍보관 문은 잠겨있었고, 둘러보는 사람도 없었다.
건축물과 탈곡기, 베틀, 지게 등만 쓱 둘러보고 상류층 가옥 쪽으로 향했다.
상류층 가옥과 고풍스러운 정자가 돌담 뒤, 소나무 군락 사이로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상류층 가옥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문간채 가운데 정면에 있고, 안채와 사당으로 직접 이어지는 문은 오른쪽에 따로 있다.
안채와 사당은 사랑채를 지나서도 갈 수 있다.
오른쪽 문 앞, 옆쪽으로는 고풍스러운 정자도 보다.
정자 아래, 우거진 수풀 사이로 살짝 보이는 연못의 정원수는 마을 뒷산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끌어들인 물은 외암민속마을 방화수로도 쓰인다.
상류층 가옥 구조를 살펴보고, 문간채 한가운데 있는 대문을 통해 가옥으로 들어간다.
문간채는 대문을 포함하는 건물로,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과 창고, 외양간 등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다.
방과 마루로 구성되는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글을 익히고 손님 맞는 예절을 배운다.
안채는 집터 내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로 외부인의 출입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놓여있는 대청마루가 상류층 가옥답게 널찍하다.
안채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고, 안채 왼쪽 뒤로 장독대도 보인다.
사당은 조상의 신주(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가묘라고도 한다. 사당에는 4대 조상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신주를 봉안한다.
사당이 없을 경우에는 사랑 대청 위에 벽감을 만들어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도 한다.
상류층 가옥의 뒤뜰,
장독대 위 항아리들도 찌는듯한 무더위를 잘 견디고 있고, 저장창고로 보이는 볏짚으로 만든 움집도 있다.
상류층 가옥엔 땔감(장작)도 많이 비축되어 있어, 넉넉한 경제 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상류층 가옥 바로 곁으로 서민층 가옥들도 중류층, 일반적인 서민층, 초가삼간 서민 가옥이 있어, 자연스럽게 상류층 가옥과 서민층 가옥을 비교해 보게 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옥의 크기와 구조, 세간살이 등으로 경제적 풍요가 단번에 느껴진다. 물론 삶의 질과 행복의 척도를 부유함 만으로 딱 가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최고의 입지, 똘똘한 아파트 한 채 열풍에 온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으니,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중류층 가옥의 문간채도 집으로 들어오는 대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은 수장 공간과 거주 공간이 연결되어 있으며, 일부 가옥에서는 문간채가 사랑채의 역할을 함께 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생활 도구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근면함을 느끼게 한다.
중류층 가옥의 곳간채에는 농기구나 생활 용구 등을 보관한다.
바닥에 마루를 깐 곳에는 습기를 피해야 하는 곡물이나 저장 음식의 수장 공간으로 사용했다.
곳간채 오른쪽에는 장독대와 움집이 있고, 왼쪽에는 뒷간이 있다.
중류층 가옥 안채 안방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혹은 어머니와 딸)가 정담을 나누고 있다.
부엌을 들여다보니, 제법 가득 찬 부엌가구와 소반 등이 넉넉한 살림살이를 보여주고 있다.
중류층 가옥은 보통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곳간채, 문간채로 나누어져 있다. 상류층 가옥의 구조보다 그 규모가 작았지만, 경제적으로 꽤 여유 있어 보였다.
서민층 가옥 2에는 안방, 건넌방, 대청, 부엌, 헛간이 있다.
제법 규모가 큰 서민층 가옥으로 중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인 'ㄱ'자 집이다.
안방은 크게 두 칸을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집은 안방과 윗방으로 나누어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건넌방은 남성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이 집에는 안방과 건넌방 문 앞에 댓돌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대청이 있어야 할 공간(사진 가운데)이 텅 비어 있다.
헛간은 저장 공간으로 따로 세워진 건물이다.
곡물이나 농기구, 생활 용구 등을 보관하며, 일부에서는 외양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뒷간의 크기는 중류층 가옥과 비슷하다.
활짝 열려있는 초가삼간의 사립문으로 들어선다.
서민층 가옥 초가삼간이 그림 같다.
보기엔 이렇듯 포근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런 초가삼간에서 살아간 서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집 크기로 신분을 나타낸 옛날이나 아파트 평수로 삶의 질을 평가받는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규모가 작은 서민 가옥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방 2칸과 부엌이 있다. 부엌 옆에 붙은 방이 안방(큰 방)이고, 그 옆방은 윗방이라 불린다.
집이 작아서 방을 사용할 때, 남녀의 구분이 아닌 세대별 거주가 일반적이다.
이 집 안채는 안방과 작은방이 나란히 붙어있다. 더 이상 줄일 것도 더 할 것도 없었을 고단한 삶이 느껴진다.
초가삼간집을 나서서 바라본 마을 풍경이 무척 고즈넉해 보였다.
관람객들이 없으니, 더욱 조용하고 평화롭기까지 했으려나!
멀리, 설화산도 무더위를 이겨내고 더 진한 초록빛을 드러냈고,
외암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 근처 수풀과 무궁화나무도 짙은 초록색으로 빛났다.
다시 상류층 가옥 장독대 근처로 가서, 마을(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서면 마을은 오른쪽으로 가나, 먼저 왼쪽에 있는 이간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 선생은 ‘인간과 동물은 같다’고 해석한 17세기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술 논쟁이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을 이끌었던 중심인물이다. 저서로는 ‘외암 유고’ 등 16권이 있다.
마을로 향하는 길,
정자와 정원, 물길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무더위 속에서도 기운차게 걸을 수 있었다.
외암마을 주민들은 각자 개성 넘치는 이름을 달고, 민박 스테이 촌을 운영하고 있다.
외암마을에는 가옥 주인의 관직 명이나 출신 지명을 따서 참판 댁, 병사 댁, 감찰 댁, 참봉 댁, 종손 댁, 송화 댁, 영암댁, 신창댁 등의 택호가 정해져 있으며, 이들 가옥에서는 대부분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민박은 외암민속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된다.
마을은 안 길을 중심으로 샛길들이 이어지면서 돌담과 집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담장은 거의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옥들은 모두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의 사랑마당에 정원을 꾸며 놓았다.
집집마다 각각 특색 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건재고택의 아름다운 정원은 마을의 대표적인 정원인 만큼 원래의 모습이 계속 잘 보존되길 바란다.
감자수확, 강정 만들기, 고구마 캐기, 고추장 체험, 화톳불 체험(고구마, 밤), 도자기 냄비받침 액자, 도자기 풍경 이야기, 떡메치기, 미션! 문화재를 찾아서, 방문걸이, 솜사탕 만들기, 엿 만들기, 옥수수 수확, 외암마을 로고 연필꽂이, 원형 나무 등, 율무 팔찌 외 16가지의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하늘에 드리운 무거운 구름 사이로 간간이 한 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내렸고, 땅 위엔 겸손하게 고개 숙인 벼가 아직 누렇게 익지 못한 초록 초록 잎으로 깊은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
점차 영글어 가는 농작물들은 활기차 보이나,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외암마을은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영역이다. 농사도 짓겠지만, 주로 민박을 운영하는 듯 보인다.
외암마을은 동북쪽에 위치한 주산인 설화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봉수산을 잇는 축선에 만들어진 일정한 영역 안에 가옥들을 배치하여,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타원형이다.
설화산 자락이 완만하게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이어져 내려와,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을 이룬다.
마을의 가옥들은 자연스레 이런 지형을 따라 서남향을 향하고 있다.
외암마을을 돌아보며, 500여 년 전 시공간 여행을 마쳤다.
무척 무덥긴 했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산바람 강바람에 오히려 더 뜨거운 여름을 즐기고 간다.
반석교를 나서니, 500여 년 시간을 훅 넘어와 2025년 8월 14일 늦은 오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