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라와 알렉산더는 마침내 뿌연 안갯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태오(테오드로스) 앙겔로폴로스 저 / 최운주 옮김
'마치 강기슭에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 속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듯한 추억을 더듬는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 되어 버린다.'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은 도서 출판 '숨은 책'에서 1996년 9월 초판 발행했다.
애잔한 그리움을 안고, 불안한 여행길을 떠나야 했던 오누이의 쓸쓸함과 슬픔이 한 폭 영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 책은 좀 특별하게 구성됐다. 알렉산더의 프롤로그로 시작되고, 화자가 알렉산더와 볼라로 계속 오가며 불안한 여정을 이어간다. 안갯속 세상은 잘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남매는 그 속에서 희망을 보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모두 다 들어 나는 현실. 우리는 한 때 안갯속을 걷는 것이 행복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속에서는 우리가 소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잘 드러나 보이지 않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감은 어쩜 본능적인 것일 수도 있다.
알렉산더와 볼라는 현실을 다 알 수 없는 4살, 12살 아이들이다. 그래서 본 적도 없는 아빠를 찾아, 독일(게르마니아)을 향해 출발하는 이 오누이를 뒤쫓아 가야 하는 내 마음은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 불안하고 불편했다. 이야기는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계속 아빠를 찾아 게르마니아로 향하는 아이들을 안갯속에 그대로 남겨 둔 채 끝난다.
한 그루 나무가 서있는 언덕 위로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래도 우린 희망을 본다. 이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이 될 것이다. 아빠와 엄마보다 더 책임감 있는 강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지금은 남매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수많은 잔상으로 남는다.
남매는 온전하게 쉴 수 없던 집, 남편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무심했던 엄마 품을 떠나, 험한 세상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볼라는 이루어질 수 없던 첫사랑의 아픔까지 알았다. 마침내 아이들은 뿌연 안갯속에서 자신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였고, 게르마니아에 있다던 아빠이기도 했으며, 또 다른 희망이기도 했다.
독일행 기차에 무임승차한 남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역무원에 이끌려 내린다. 역무원은 볼라가 4살 때 딱 2번 만난 적 있는 '엄마의 오빠'인 외삼촌을 만나게 해 준다. 외삼촌은 역무원에게 '조카들은 사생아며,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게르마니아에 아빠는 없다'라고 밝힌다. 그리고 자기 형편으로는 아이들을 맡을 수 없다고 한다. 볼라는 이 말을 몰래 엿듣지만 아빠는 게르마니아에 있다고 믿을 뿐이다. 역무원은 남매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경찰서에 맡기고 사라져 간다.
창밖에 눈이 온다. 경찰서 직원들도 모두 눈이 왔다며 환호한다. 하던 일을 손 놓고 좋아라 밖으로 뛰어 나간다. 길거리 사람들도 환호하며 지나간다. 볼라와 알렉산더는 이틈에 밖으로 나온다. 모두 정물로 변해 버린 사람들은 좋아라 하며, 남매에겐 관심도 없다. 차디찬 겨울처럼 냉정한 사회다. 세상은 흰 눈에 덮여간다. 세상에 움직이는 것이라곤 흰 눈과 볼라와 알렉산더뿐이다. 남매는 다시 역으로 향한다.
엄마는 아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엄마는 화가 나면 굉장히 무섭다. 거의 매일 화가 난 얼굴로 누나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고, 내 엉덩이를 신발로 두들겨댔다. 그러면 화가 풀릴까, 나는 매를 맞을 때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해답은 없었다. 그나마 그렇게 매 맞을 일이 생길 때나 겨우 엄마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를 맞을 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우리 엄마는 언제나 바빴다. 그러니까 누나와 나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고 엄마는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엄마 얼굴은 예뻤지만, 매일 인상을 쓰고 있어서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무섭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21쪽)
낯선 도시를 헤매는 우리에게는 충분한 돈도, 보호자도, 정확한 지도도 없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를 집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어른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북쪽을 향한 여행을 하고 있다.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힘이 되는 것은. 이제 겨우 네 살인 내 동생 알렉산더이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나와 똑같은 희망과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눈은 우리에게 최면을 걸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염없이 내린다, 먼지처럼. 바로 코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볼 수 있다. 우리가 가고 있는 목적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35쪽)
남매는 낯선 마을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울부짖는 신부를 본다. 신부는 술에 취한 신랑처럼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더는 신부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았다.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한 남자가 나타나 말 한 마리를 남매들 앞에 버려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죽어가는 말이 끌려왔지만 파티 손님들은 아랑곳없다. 알렉산더는 말을 어루만지며 입맞춤해 준다. 말은 곧 죽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신랑 신부와 그 패거리들이 거리로 나와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한 생명의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 볼라 누나는 죽어버린 말과 울고 있는 나, 그리고 춤을 추며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누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누나의 품에 달려들었다. 모든 것이 나쁜 꿈이기를 바라며, 잠에서 깨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기를 바라며. (41쪽)
영혼까지 지친 남매는 밤새도록 걸었다. 다음 날 아침까지 회색 빛 돌 투성이 산과 풀, 들꽃까지 누렇게 말라죽은 벌판을 걷고 있었다. 볼라와 알렉산 더는 이 삭막한 곳에서 청년 오레스테스를 만나 자동차를 얻어 타고 마을로 들어선다. 그는 유랑극단 배우였지만, 연습 중인 연극도 무대에 올리지 못한 채 극단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제 우리는 지쳤다. 밤새 걸어오는 동안 쓰러져 잠들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죽어가는 것,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깊이 잠드는 것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오레스테스)는 처음 보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서 있다. 마치 다른 세계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쩐지 나는 그가 우리에게 죽음이나, 깊은 잠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만들어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통스럽게 잠과 싸우며 걸을 때, 나는 잠은 곧 죽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빠져들어가는 또 다른 세계는 죽음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휴식과 평화였다. (43쪽)
유랑극단에서의 휴식도 잠시, 오누이는 낙엽처럼 날리듯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비까지 내리지만 우산도 없다. 길거리에서 겨우 얻어 탄 트럭 안은 따뜻했다. 남매는 비가 그칠 때까지 이 트럭을 타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크게 위안이 됐다. 그러나 중년의 운전기사는 조수석에 잠든 알렉산더를 두고 내리더니, 볼라를 강제로 트럭 짐칸으로 끌고 가 고통과 수치심을 안겨준다.
그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무거운 돌멩이로 짓이겨 놓은 듯 아파왔다. 손과 발, 그리고 다리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76쪽) '나는 내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바라보며 햇살보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절망과 굴욕으로부터 시작된 분노였다. (77쪽)
남매는 다시 몰래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가지만, 얼마 가지 않아 경찰들이 기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다시 기차에서 내려 도망친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에 알렉산더는 오레스테스의 오토바이를 발견한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자유로운 새처럼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것이다. 오레스테스 오토바이는 기차보다도 빨리 날아갔다.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는 우리를 경찰들로부터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87쪽)
늦은 오후, 바닷가 모래벌판엔 유랑극단 무대 의상들이 새 주인을 찾기 위해 진열되어 있다. 모든 옷이 기다란 장대 두 개를 이은 줄어 걸려, 커다란 깃발처럼 휘날렸다. 오레스테스는 창백하고 슬픈 얼굴로 진열된 의상에서 그대로 돌아서 버린다.
유랑극단은 그동안 무대를 빛나게 했던 옷까지 팔아 치우며 해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볼라와 알렉산더, 오레스테스는 함께 바닷가에 서 있다.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 푸른 물빛, 항구 저편 높은 건물들이 드러날 때까지.
별안간 헬리콥터 소리가 울리더니, 잔잔하던 바다 한가운데서 거대한 손가락 형상의 조각품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그 손은 두 번째 손가락이 잘려나가 있다. 아무것도 가리킬 수 없는 손이 헬리콥터에 달린 채 멀어져 갔다. 어딘가를 가리킬 수 없는 손이었다. 마치 볼라 남매처럼, 오레스테스처럼 갈 곳을 알 수 없는 현실처럼. 볼라 남매는 게르마니아 어디서 아빠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본 적도 없는 아빠는 존재하기나 할까? 유랑극단을 떠난 오레스테스의 다음 목적지는 어딜까? 그는 군대로 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스스로 되묻게 되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손가락이 없는 거대한 손의 형상은 마치 우리들처럼 길 잃어버린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해도 수많은 천사들 중에서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 것 인가." 그 순간 내 온몸을 때리는 듯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하늘로 잡혀 올라가는 손가락이 말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오레스테스의 팔을 잡았다. 아, 오레스테스는 울고 있었다. 그는 울면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슬픈 이야기를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해도 수많은 천사들 중에서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 것 인가." (107쪽)
볼라의 심정은 복잡하다. 오레스테스가 다른 사람과 만나면 질투가 났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와 함께 게르마니아까지 가고 싶었다. 볼라는 다시 만나지 않을 곳으로 사라져 버려도 오레스테스를 잊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이런 흔들리는 마음도 성장 통이었다. 12살 소녀는 낙엽처럼 구르며, 함부로 휘둘리면서 아프게 성장하고 있었다.
"외로운 작은 소녀야. 첫사랑이란 다 그런 거란다. 심장은 부서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첫사랑이란 다 그런 거란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116쪽) 그랬었구나. 나는 첫사랑을 한 것이었다. 오레스테스는 바로 나의 첫사랑이었다. 알렉산더는 오레스테스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나의 첫사랑이었다. (117쪽)
'국경 통과 검문을 위해 여권을 준비하라'라는 마이크 소리에 남매는 다시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다행히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기차가 천천히 움직여, 남매는 기적처럼 아무 상처도 입지 않는다. 강 건너편이 독일이다. 남매는 규칙적으로 비치는 환한 전등 불빛을 피해, 강가에 놓인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넌다. 탕탕 총소리도 들린다. 깊고 긴 밤도 아침이 오면 사라진다. '안갯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남매는 마침내 뿌연 안갯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태초에는 어둠이 있었어. 태초에는 어둠만이 있었는데,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 마침내 우리는 뿌연 안갯속에서 우리가 아닌 다를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였다. 오레스테스의 필름에서 티끌 하나를 찾아낼 수 없었지만, 우리는 믿었다. 거기,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동산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고. 나무는 외로움을 참으며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매일 기차들이 박자를 맞추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흩날리는 눈과 퍼붓는 소나기와 바람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25~126쪽)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눈과 소나기와 바람 속에서 묵묵하게 오누이를 기다려 준 것은 한 그루 나무였다. 볼라와 알렉산더는 서서히 걷히는 아침 안갯속에서 나무를 향해 달려간다.
이제 남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지나온 시간보다 더 많은 세월을 견뎌내며 성장할 것이다
[안개 속의 풍경] 책을 덮으면서 우리도 자신만의 한 그루 나무에게로 달려가게 된다. 안갯속에서 찾은 또 다른 출발을 향해!
책은 2014년 3월에 읽었고, 영화는 2020년 12월 감상했다. 책과 영화 이야기 흐름이 다르지 않다. 자연스레 책을 다시 꺼내 본다. 2014년 당시 느낌 그대로다. 지은이와 감독이 같은 사람, 태오 앙겔로폴로스 여서일까? 책이 영화처럼 흐르듯 영화도 책처럼 넘겨진다.
낙엽처럼 세상 여기저기 휘둘리며 걸어가는 볼라와 알렉산더 모습은 다시 봐도 애틋하다. 어린 남매가 목표(아빠든, 안갯속 나무 한 그루든, 또 다른 희망이든)를 향해 가는 모습이 짠하게 그려진다. 책과 영화를 함께 읽고 보면, 그 느낌은 2배+α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