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기억은 어떤 의미로 남는가가 중요!
영화 <더 리더>와 책 [책 읽어주는 남자]는 1950~60년대, 전후 세대인 독일 청년 미하엘의 사랑과 시대상이 그대로 맞물려 있다. 독일 전쟁 역사에 대한 배경을 생각하며 읽고 감상해야 할 책과 영화다.
책은 미하엘 1인칭 화자로 쓰여 있다. 책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펼쳐 본다.
미하엘과 한나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미하엘은 10대 청소년이었고, 30대 한나는 아우슈비츠 외곽 수용소에서 감시인 노릇을 하며 가스실 해당자 선별 작 업을 직접 했던 인물이다.
미하엘은 우연히 만난 한나와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평생 한나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산다. 36세 여인과 15세 소년의 뜨거운 사랑은 1995년 출간 당시부터 시대적 함의와 도덕적 딜레마로 논란을 일으켰다.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 장면이 섬세하게 그려진 탓에 '19금 소설', '19금 영화'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지만, 선입견을 갖고 볼 작품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끝난 전후 세대가 직면했던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다. 사랑과 화해, 아물지 않은 아픔과 고통, 전쟁이 남긴 인간의 수치심과 열등감까지 모두 담긴 걸작이다.
소년 미하엘은 30대 여인 한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책 읽기(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나란히 눕기'로 이어지는 나름의 사랑 방식을 유지한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던 한나는 어느 날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미하엘은 한나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된다. 8년 후, 법대생 미하엘은 우연히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선 한나를 보게 된다.
한나는 법정에서 자신의 약점인 문맹을 감추기 위해 차라리 범죄자(나치 치하의 여자 감시원)가 되길 선택한다. 미하엘은 그런 한나를 법정 방청석에서 지켜보면서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혼란스럽다.
한나의 열등감이 왜곡된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일까?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 자기 이미지 관리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선택이었을까?’ 미하엘은 자신이 한나의 약점(문맹)을 법정에서 밝히고 형량을 적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지, 한나 결정에 그대로 침묵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결국 침묵한다.
한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미하엘은 교도소에 있는 한나에게 책 읽은 녹음테이프를 보내면서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한나도 그 사이 문맹에서 탈출한다. 문맹에서 탈출했다고해서 평생 그녀를 따라다닌 그녀의 열등감이 사라졌을까? 한나는 미하엘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는 답장을 쓰지 못한 채, 계속 책 읽은 녹음테이프만 보낸다. 미하엘은 한나의 글씨를 들여다보면서 한나가 글을 쓰고 배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과 노고를 들였을지 짐작이 갔다. 지연되고 실패한 한나 인생이 불쌍했고, 그런 상황이 가엾게만 여겨졌다.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236쪽)라고 한, 글 속에 미하엘의 한나를 향한 안타까운 복잡한 심정이 드러난다. 제 때를 놓치고, 이미 때가 너무 늦은 삶을 살고 있는 한나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한나는 18년간 복역을 마치고 사면으로 석방된다. 석방 전 날, 미하엘은 교도소장과 통화를 끝내고, 한나와도 통화를 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희망적으로 알린다.
그러나 한나는 다음 날 아침 시체로 발견된다. 한나는 동틀 녘에 목을 맸다. 미하엘에게 남겨진 한나의 기억은 항상 그에게 긴 그림자를 그리며 따라다닌다. 미하엘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글을 통해 붙잡아두고 싶었다. 한나와의 추억(기억)을.' (272쪽)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하여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로 참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 (273쪽)
'내가 그녀의 무덤 앞에 선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74쪽)
미하엘은 이제야 한나와의 기억을 과거 그 자리에 툭 남겨 두고 온 것이 아닐까? 그는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그러나 극복은 도로 회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본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말없이 떠났던 그날 이후, 다시 본래대로 돌아갈 순 없다.
이젠 모두에게 ‘너무 늦어버린 때’가 되어 버렸다. 과거는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고스란히 남는다. 그러나 그 기억은 어떤 의미로 남는가가 더 중요하다.
주인공 미하엘(15세)과 한나(36세)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당시 황달을 앓고 있던 소년 미하엘은 한나를 만나 심리적 안정감과 학교 성적 향상과 진급을 이뤄낸다.
나는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등교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는 내가 습득한 남성다움을 남에게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괜히 으스대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힘이 넘치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꼈으며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이러한 힘과 우월감으로 대하고 싶었다. (40~41쪽)
한편, 성인이 된 미하엘은 일반적인 연애나 결혼생활 유지가 어려웠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한나를 느끼고 싶어 했다. 어쩜 ‘한나’는 미하엘에게 평생 지울 수 없던 고정된 이성상으로 남겨진 걸까?
우리가 합의해서 이혼을 했다는 사실이 그 죄책감을 반분시키지는 못했다. 나는 그 이후의 관계들을 좀 더 잘 맺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우리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여자는 약간은 한나 같은 손길과 감촉을, 약간은 한나와 같은 향내와 맛을 가져야 한다고 고백했다. (219쪽)
한나는 자신의 약점(문맹)을 노출시키기보다 차라리 범죄자 (나치 치하의 여자 감시원)가 되길 선택한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 자기 이미지 관리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선택이었을까? 사실 개인적인 열등감도 문제이지만, 히틀러, 폴포트, 스탈린 같은 사람들의 열등감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했다.
한나의 동기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왜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문맹으로서의 정체 노출을 택하지 않고 범죄자로서의 끔찍한 정체 노출을 택했는가? 아니면 그녀는 어느 쪽도 노출시키지 않고 위험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그렇게 단순할 정도로 바보스러운 여자였나?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범죄자가 될 만큼 그렇게 허영에 차 있고 사악한 여자였나? (170 쪽)
미하엘은 한나의 비밀(문맹)이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 줄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문맹은 그녀에게 평생 치유될 수 없었던 열등감이었는지. 결국 한나는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다. 미하엘은 한나가 문맹인 것을 밝혀야 했을까?
한나와 직접 이야기한다고?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그녀가 평생 동안 해온 거짓말을 내가 눈치챘다고? 그녀의 생을 멍청한 거짓말을 위해서 다 바칠 생각이냐고? 그 거짓말은 그만한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이상의 형량을 살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고? 그 후에도 그녀가 나름대로 인생을 꾸려갈 거리가 많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많든 적든 간에 그녀가 무엇으로 그녀의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가? 그녀에게 장래의 삶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그녀에게서 그녀의 평생 거짓말을 앗아버릴 수 있는가? 나는 그녀를 위한 어떤 장기적인 인생 계획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서 그녀가 지금까지 행한 행동으로 보아 그녀의 중단기 인생 계획은 형무소가 적당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그녀와 마주하고 또 그녀에게 무 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녀와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182쪽)
전쟁과 이념 대립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연대책임을 졌던 시기도 있었다. 전범국가 독일뿐 아니라, 동족상잔 비극을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도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피해를 본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연대책임을 지기도 했다. 더욱 남북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겐 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타당성을 인정 받든 인정받지 못하든 간에, 우리 학생 세대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경험적 현실이었다. 이러한 연대 책임은 제3제국 당시에 일어났던 일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묘석에 철 십자 훈장을 그려 넣은 사실, 그토록 많은 수의 옛 나치주의자들이 법원과 행정부 그리고 대학에서 출세를 한 사실, 독일 연방 공화국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사실, 전통적으로 망명과 저항이 순응하는 삶보다 덜 전승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은 비록 우리가 손가락으로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해도 우리 가슴속을 수치심으로 가득 채웠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해서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손가락질은 수치심의 수동적인 고통을 에너지와 행동과 공격 심리로 전환해 주었다. (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