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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Nov 28. 2022

평균적 인간

존재 안 함

“평균적 인간을 바탕으로 삼아 설계된 시스템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p27]


사교육계를 비롯해 교육 서비스 전반에 걸쳐 ‘개인 맞춤형’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But! 우리 아이들은 결국 평균치에서 얼마나 더 잘하고 있거나 멀어져 있는지로 부모님과 교육기관에 '보고' 되고 '기록' 된다. 입학 지원서, 입사지원서, 실적평가 등 ‘개인 맞춤형’ 교육과 서비스를 받은 우리들은 결국 ‘다수의 평균치’에 부응해야 한다. ‘평균치’의 아이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진도와 커리큘럼에 똑같이 반응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물론, 개인 맞춤형의 서비스는 선생님의 재량이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개인화를 시키려다 보니, 왜 맥도널드에서 수제버거를 만드려고 하느냐 했던 (어디선가 들은 듯한 영화 대사)가 이해 갈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역량 부족이 답이었던가. 어찌 되었든, 부모님과의 상담에선 아이가 가진 장점보다는 평균에 기초해 학습 수준이 어디쯤에 있고, '개인 맞춤을 최대한 높여', 평균치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공부방 운영 시절 상담의 결론이었다.


우리의 DNA


토드 로즈 Todd Rose는 교육 신경과학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이다. 하버드 교육대학원에서 지성. 두뇌교육 프로그램과 개개인학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스위스 생체 모방 공학 연구소에서 부교수로 활동하는 그가, 중학교 때  ADHD 장애 판정을 받은 뒤 성적 미달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고 한다. 그가 쓴, [THE END OF AVERAGE, 평균의 종말]에서 그는, ‘평균적인 인간이란 잘못된 과학적 상상이 빚어낸 허상이다’라고 말한다. 10년 동안 난독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20만 독자의 사랑을 받게 된 저자 정주영의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1장의 제목이 ‘평균에 속지 마라’이다. 하버드 출신의 저자와, 하버드의 인재에 관한 책에서 기존의 상식에 반하는 ‘평균치’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엄마의 발음이 어떠한 들 아이의 영어는 괜찮다고 해도 그 말이 정작 당사자에겐 잘 들리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세계의 석학이 평균은 허상이라고 말해도, 평균치를 계산해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보려고 하는 시도를 우리는 당장 멈추기 어렵다. 병원 벽에 붙어 있는 연령별 평균 신장과 몸무게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아이와 비교를 하는 것은 거의 자동반사 수준이다. 배움의 그릇을 만드는 데 있어, 성과를 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결국엔 교육도 가성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입학과 취업 시스템 속에서 재단되어야 하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 원론적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평균치 이상의 성과지향적 묵직함을 내려놓기에 우리에겐 고단하고 아픈 역사가 있다. 굴곡이 많은 국가의 역사적 아픔 속에도 이 악물고 버텨내며 ‘자식 뒷바라지’를 놓지 않았던 분들이 바로 우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셨다. 최소한 남들이 하는 데로 튀지 말고 뒤떨어지지도 말고, 중간쯤은 가면서 밥벌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 우리는 그분들의 정서와 사고가 담긴 말들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성장했다. 실패는 곧 온 가족의 삶과 직결되어 있던,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하고 성과를 보여줘야 했던 이전 세대의 힘겨웠던 기억은, 상대적으로 더 윤택해진 삶을 사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강력한 유전인자처럼 대물림되고 있다.


1997년 영어가 처음 초등학교 3학년에 도입된 이후, 영어교육은 더 큰 사교육 시장의 각개 전투장이 되었다. 공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의 아쉬움을 보충하기 위해 사교육 콘텐츠는 질적, 양적 진화를 빠르게 했다. 예전보다 쉽고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학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에서는 즉각적인 성과가 가장 중요시된다. 성과가 없다고 생각되면 다른 학원, 다른 앱으로 대체한다. 영어는, 사용자가 소통을 목표로 하는 의지와 기량을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이 그 어느 학습재료보다 중요하다. 시기와 방법은 바뀔 수 있어도, 방향과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가정에서의 영어 습득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평균' 적인 학습량과 결과치를 염두에 둔 콘텐츠를 '개별화' 해 줄 수 있는 것은, 내 아이의 특성을 가장 잘 아는 엄마 아빠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더 쉬울 수도 더 어려울 수도 있는 문제이다.


비우고 내려놓으면 담을 수 있는 것


누군가 나를 보며, 두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사람 같다는 말을 했다. (현실성 없다는 말을 돌려 말한 듯). 오랫동안 끊임없이 세상을 '배우고만' 있던 내게, 이제 그만 돌아와 한국에서 과외를 하든, 영어 학원을 해서 자리를 잡으라는 친구도 있었다. 별다른 '성과'없이 '평균치' 이상으로 오래,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내며 자리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걱정된 것임을 안다. '꿈'을 꾸고 있던 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상주의자 같은 생각으로 공부방을 하고, 상담을 하고, 아이들에게 꿈을 꾸라고 말했다. 굳이 영어공부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오늘은 그림책 한 번 읽어보라고. 그림이 너무 이쁘지 않냐고. 선생님도 영어 어지간히 못하다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시작했다고 말이다.


현실의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눈이 번쩍 뜨인 것은 불과 이 년 전이다. 아이들 중심으로 교육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꾸 시스템 중심으로 아이들을 '독려' 해야 하는 생활에 조금씩 지쳐갈 때쯤이었다. 현금이 흐르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영상에 귀가 솔깃해졌다.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친구들을 보며, 동남아 여행을 일 년에도 여러 차례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준비되지 않은 채 '고시원'이라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다. 코로나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 두 돌이 채 되기도 전의 아들이 엄마 가지 말라고 울곤 했던 2020년 겨울. 난 사기를 당했고, 고시원은 어려웠고, 고시원에 큰돈이 묶인 사이 전국에는 부동산 불장이 시작되었다. 난 사회적으로 '벼락 거지' 신분이 되었고, '현대판 소작농' 이 되어 육백만 원에 가까운 임대료 내기에 매달 피가 말랐다.


대학 동기들은 졸업을 해서 직장을 다니고, 적절한 시기에 집을 마련하고 가정을 이루며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듯 보였다.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대부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중요 간부가 되거나 교감,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고 한다. 같이 맥주 마시고 얘기 나눴던 그가, 그의 나라에서 교육부 장관급으로 일을 하면서도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담담히 채팅을 하고 있을 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늘, 너의 가능성을 믿으라고 했던 나는 내게 물었다. 너의 가능성은 무엇이냐고. 고시원에서 알콜 중독자와 두 달 동안 전쟁을 치르며 진을 빼다가 입원을 했을 때, 나는 내게 물을 기운도 없었다. 가능성 그게 뭐래.


나보다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영국인 신랑은, 고시원의 운영이나 부동산으로 인한 자산의 격차, 그로 인한 나의 피로함과 상대적 박탈감을 피부로 공감하지는 못했다. 다만, 아무것도 없던 런던에서도 그렇게 낙천적으로 열심히 살던 때와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 보였으리라. 그런 내게 신랑이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었다. 한없이 잠을 자게 만들었던 신경 안정제와는 다르게, 나는 책을 읽으며 조금씩 다시 에너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의 고질병.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서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을, 에디슨은 ‘실험’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삶을 다른 각도로 보았기에 수많은 실패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이유이고 그의 성공 노하우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KFC의 창업자 할아버지 사례 역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일화의 단골손님이다. 평균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은퇴할 나이에, 수많은 실패를 넘어선 그 용기를 배우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와닿지 않을 때가 있었다. 참으로 어둡고 긴 터널을 매일 헤매고 있을 때 빌던 소원이 있다. KFC 창업주님보다, 한 십오 년쯤 빠르게 내게도 좋은 소식 하나 달라고. 중간중간이라도 내가 견딜 수 있게 사탕같이 달달한 순간들도 내려 달라고. 그리고, 그나마 본인은 나름, 에디슨이 보낸 긴 ‘실험의 시기’,  KFC 할아버지가 견뎌온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쳐도, 그런 딸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 엄마에게도 신나는 일들 한 두 깨쯤 선물해 달라고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당시에는 선물을 받았더라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지인이 내게 말했다. 내가 가진 스펙을 그녀가 가졌다면 지금쯤 날고 있을 거라고. 평균치 이상의 스펙으로 평균치 이하의 소득도 이루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자격지심 가득했던 그때, 그 스펙으로 왜 기고 있냐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또래가 가진 자산의 '평균치'나 비슷한 연령쯤에 이루고 있는 '평균적' 연봉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평균치가 없다고 하는데도, 그 존재하지도 않는 평균치의 무게는 가볍지 않음을. 그 존재를 맘속 깊은 곳에서 제대로 부정할 수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너무도 당연한 진리라 잊고 있던 걸 다시 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나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 평균치의 허상을 버리고 나를 담기로 했다.


나는 영어를 좋아하던 사람도, 잘했던 사람도 아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영어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겨우겨우 버텼던 사람이다. 시간을 정해 높은 점수를 요구하는 시스템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난 영어가 싫었다. 그러나, 짧은 어학연수를 통해 알았다. 외국인들과 소통하는 게 재미있다는 것을. 여행을 하면서 알았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이스라엘 전역에서 히치하이킹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석사를 하면서 알았다. 학교 시절 시험 점수가 나의 진짜 영어 실력이 아니었음을.


아는 동생의 딸이 현재 다니고 있는 영어 학원에서 '낙제' 해서 유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학원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봤더니,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지금 학년 수준의 영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동생은 만족했다고 하는데, '평균치'를 염두에 두고 했을 평가가 내심 불편했다. 삼 개월만 딸내미랑 영어 글쓰기 과외를 비용 없이 해주마 제안을 했다. 자신의 딸이 학년에 맞게, '평균치' 영어 수준이라는 말에 만족하고자 하는 동생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평균치 아이도, 평균치 영어도 없다고 말이다. '낙제'와 '유급'으로 기죽어 있을 동생 딸내미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점수가 너의 진짜가 아니라고 말이다. 어쩌면, 현실성 없이 난 또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펙을 (아직까지) 수익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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