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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Dec 15. 2022

간헐적 전념

활주로에서만 10년

잊고 있었다. 샘플로 만들어 놓았던 책.

아이디어 전달이 목적이라, 심플 그 자체.

아이가 책장에서, 그 책을 집어 들 때 느낌이 묘했다.

조그만 손으로 도톰한 책장을 넘긴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첫 독자의 반응을.


알파벳 글자를 비슷한 모양끼리 그룹을 만들어

음각으로 파낸 유아동 교구에 가까운 책이었다.

(비용을 들여 특허등록도 해 놓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건,

이미 지불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튼.

나의 첫 독자는, 페이지마다 새겨진 큰 글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썼다.

알파벳에 꽂혀 있던 아이는,

글자 이름을 크게 외쳐대며 움푹 파진 홈으로 손가락을 넣어 일일이 따라 쓰고는

책장을 넘겨 다음 글자를 썼다.


이후에도 가끔씩, 아이는 책을 꺼내 글자를 따라 쓰고 바닥에 툭 '던져놨다'.

보란 듯이.

완독률? 이 좋았다.

어린 아이가 스스로 재방문까지.

그래, 된다니까. 이거 된다니까.

다시 해볼까.

정신 차려요.

요즘에 책들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앱으로 이미 알파벳 쓰기 다 하고 있어요.




10년 전쯤, 알파벳 퍼즐, 알파벳 테트리스, 알파벳 쓰기 책에 꽂혀 길을 가다가도

독특한 폰트의 알파벳 글자를 보면 퍼즐 조각으로 만들 궁리만 했다.


이탈리아 장난감 회사에서 일했던 디자이너 친구에게 내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그녀도 호응해 주며 글자를 컴으로 따주는 작업을 함께 했다.

습작으로 하던 동화책 원고를 보고, 일러스트레이션을 도와준 스페인 친구도,

아이디어가 좋으니 고급진 선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다.

이거 이거 대박이니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다.

우리의 알파벳 프로젝트는 이미 영국의 백화점 셀프리지 선물코너에 입점해 있었다,

우리의 맘속에서만.


역사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그러나 변화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의 헌신으로 가득하다.
헝가리 의사 이그나스 젬벨바이스는
손 씻기가 질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에 20년을 바쳤다.
<피트 데이비스. 전념, p.97>


그녀들의 시간에 대한 고마움을 매번 불고기로 때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알파벳 프로젝트는 삶의 우선순위에 밀려,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덮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퍼즐 대신 알파벳 스토리로 바꾸어 보았다.

홍대 대학생과 일러스트레이션 협업을 하여,

어느 출판사와 미팅까지 간 것이,

지금까진 제일 멀리 가 본 결과물이었다.  


세상은 A-Z의 순서로 아무 문제없이 잘 쓰고 있는데...

굳이...


오랜 세월 끝에 무언가가 이루어지면,

고집은 뚝심과 집념으로, 전념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하겠지.

오랜 세월 끝에도 이루어진 것이 없으면,

고집은 집착과 시대착오가 되어

부정적 요소로 인식되더라.


내 것은, 뚝심인지 집착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

그 어디쯤에서 꺼질 듯 꺼지지 않고 있었나 보다.

당연하지.

전념해야 할 전념을 간헐적으로 하고 있잖아.

이도 저도 아닌 상태는

간헐적 전념의 부산물.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재미있었다.

전념.

하나에 꽂혀 끊임없이 그것에 대한 생각만 하는.

새로운 발견이 있고, 문제가 해결되고. 또다시 고민하고.

전념.

한 번쯤은 제대로 해봐야지. 그럼.

그리고 성과물과 상관없이 그 경험은 소중하다고

믿었다.

가슴 뛸 일 없는 때는, 그때가 그립기까지 했다.

방 한 칸에서도 마냥 행복했었다.

전념.

그런데, 결과물이 없으면?

아닌가?

전념이란 건, 결과물이 있을 때까지 하는 게 전념인가.


아들아.

엄마 책 봐줄 만했어?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한 번 더 거부해 볼까?


그랬더니,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알파벳 책 하나 만들기를

역사까지 들먹이고,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타이어에 바람을 좀 빼.

그래야 사막을 건너지.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바람 빠진 타이어로는 달릴 수가 없어.

그동안 내 타이어에는 바람이 없었다고.

바람 없는 타이어로 활주로를 달릴 순 없어.


아.

그럼 생각을 빼.

생각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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