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 Lee Sep 09. 2023

비자발적 야식

홈메이드 피자

<The Silver Spoon for Children> 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요리책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실버 스푼>으로 번역되어 있다. 책에 실린 레시피는 9-10세 어린이들이 직접 실험해 본 것이라고 한다. 책이나 영상을 통해 요리를 보면 참으로 쉽고 간단해 보인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언어가 다른 어른 둘은 피자 반죽 하나 만들기에도 산을 하나 넘는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들은 첫 번째 피자 반죽 도전에 실패한 이후에도 피자 만들기 노래를 불렀다. 책에 실린 피자 반죽 레시피는 재료가 다 계량되어 있다면 눈 감고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쉬웠다. 문제는 언어였다. 그냥 인터넷으로 영어 레시피를 찾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따뜻한 물 150ml가 필요해요. 계량컵에 찬물 75ml를 담은 뒤 뜨거운 물 75ml를 더해요.'


남편은, 아들의 은수저 한글 번역본 요리책을 따라 하다 150ml에 75ml를 더해 225ml의 따뜻한 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다 준비되었다기에, 저녁을 다 먹고 뒤늦게 합류한 내가 준비된 재료를 모두 섞어 버렸다.


아무리 봐도 반죽이 질었다. 남편은 모든 재료를 정확히 계량했다고 자신의 결백을 미리부터 강력히 주장했다. 우리밀 밀가루가 물을 적게 먹는 걸까. 물량을 어떻게 맞추었는가로 가면서 남편의 해석에 착오가 생겨 75ml가 더 들어갔음을 찾아냈다. 잘잘못 이전에 질척거리는 반죽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대화는 반죽이 질게 된 경위로만 향했다. 논리적으로 남은 75ml의 설명이 필요했다. 남편은 거기까진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아들은 조용히 일어나, 이모 손을 잡고 한쪽으로 비켜나며 말했다.


"이모, 차라리 약과나 먹자."


그렇게 아들은 이모랑 둘이서 놀고, 남편은 방으로 들어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홀로 남겨진 나는 반죽을 하고,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담아 반죽을 발효시켰다. 한 시간 뒤에, 여전히 홀로 반죽을 밀고 토마토와 치즈를 잘라 다른 재료와 함께 토핑 준비를 했다.


오늘도 아들이 수액을 맞고 와서 저녁도 다소 늦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하고 나니 이미 시간은 밤 10시를 넘기로 있었다. 그래도 토핑은 아들의 몫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이미 관심밖으로 밀려난 피자를 다시 아들의 관심 속으로 돌려보고자 애를 쓰니, 아들은 푸드아트 하듯이 앉아 토핑을 해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포인트인지 혼란스럽다.) 


바질도 흩뿌리고 구우라고 했는데, 모양이 영 안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피자는 오븐 속으로 들어가고 그 사이 아들은 퀵 샤워를 하고, 아들 머리를 말리는 동시에 피자를 꺼내 먹었다. 때는 바야흐로 밤 10시 40분. 그래도 홈메이드 반죽에 바로 구워진 피자는 보기에 먹음직스러웠다. 남편도 이모도 갓 구워진 피자를 한 조각씩 먹으며 나쁘지 않다고 했다. 피자 노래를 부르던 다섯 살 아들은, 정작 한 입 베어 물더니 담백한 맛이 낯선지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았다.


그렇게 밤 11시까지 의도치 않은 피자를 야식으로 먹고 그 기록을 부랴부랴 남겨본다.  


정말 간단한 레시피도, 순식간에 서너 시간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모르는 아들은, 내일 홈메이드 아이스크림에 도전? 하고 있다. (물론, 도전이라 쓰고 주문이라 읽기는 하겠지만) 내일의 뒷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오늘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연의 타이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