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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May 20. 2024

도배박사

아니, 도배박사님.

도배를 하기로 했다.


아들이 하나둘씩 그렸던 벽화가 온 집안 벽을 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툴게 크레용을 쥐고 그린 얼굴. 그리는 아이도, 그려놓은 그림도 귀여워 하는데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곧 얼굴 옆으로 집도 생겼고, 무지개도 떴다. 눈사람과 하트도. 아파트와 고층 건물도 미로도 생겨났다. 아이가 제 이름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품 옆에 영역표시가 더 확실해졌다. 아이 손이 닿지 않는 빈 공간. 남편은 한 술 더 떠 아이 몸체만 한 크기로 아들 이름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까지 도울 일은 아니었는데...


아이의 낙서로 도배가 된 벽과 문. 문은 팔이 아프게 닦아내면 복구가 되었지만 벽은 아니었다. 애교 수준이었던 낙서가 이제는 마음의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다. 팔순 노모는 '머릿살' 어지럽다고 더 이상의 예술활동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이는 어느 틈엔가 결국 흔적을 남겨놓고 흐뭇해했다.


그래도.

때가 되었다는 말이 이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위층 인테리어 공사 공지를 보더니, 아이의 입에서 우리는 공사 아저씨들 언제 오냐고 묻기 시작했다. 우리도 집이 좀 깨끗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네 인테리어 업체와 도배장판 가게에서 견적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두 군데의 가격 차이가 백만 원이 넘었다. 인터넷으로 두어 군데 견적을 더 알아보니, 백여만 원 비쌌던 인테리어 업체보다 백만 원을 더 불렀다. 도배장판 가게보다 거의 이백만 원 비싼 셈이었다. 게다가 짐이 있는 상태에서는 삼십만 원 정도의 추가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했다. 파손의 우려로 짐에는 손을 댈 수 없으니 미리 다 치워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가격이 제일 쌌던 곳은, 전화로 나눈 가게 주인의 말투가 끌리지 않아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중이었다. 그렇다고 가격 차이가 크게 나는 곳을 선뜻 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이웃동네 구시가지 쪽 도배장판 가게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하자 서너 군데가 나왔다. 마음에 드는 상호로 전화를 걸어 견적을 물으니, 저렴했던 곳보다도 이십여만 원 낮았다.


"싼 게 비지떡이면 어떡하지? 다시 돈 들어가야 할 일이 생기면? 차라리 처음부터 인테리어 가게로 할 걸 후회하겠지. 처음엔 싸게 불렀다가 나중에 이것저것 추가 비용 요구하는 건 아닐까?"


너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믿기 힘든 가격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주인을 만나봐야겠다. 통화하며 받은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첫인상이 다가 아니긴 한데, 주인과 몇 마디 나누어보니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이 떠올랐다. 애써 꾸미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짐에 대해 보호막을 미리 치지도 않았고 계약금도 요구하지 않았다. 작업 날짜를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내 전화번호를 옆에 적어놓는 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주인장을 믿어보기로 했다.


일주일 후.

도배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유치원 등원 준비하는 아들과 마주친 도배가게 주인이,


"이 벽의 주인공이 바로 너였구나!" 하며, 아는 체를 했다. 아이는 얼떨결에 '현장범'이 되어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아저씨들의 빠른 손놀림 보며, 기다리던 공사가 시작되어 신나 보였다.


함께 온 이들 중엔 도배가게 주인아저씨를 닮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기계를 돌려 도배지에 풀을 발랐다. 일하는 손놀림이나 움직임 역시 더하거나 덜할 것 없이 야무졌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품과 기술이 더해진 것일까. 청년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흐뭇해졌다. 붓에 풀을 먹여 손으로 작업하던 것만 보아왔던 팔순 노모는 기계가 마냥 신기한 듯, 그놈 신통하다며 '발명한 이'를 칭찬했다.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시작한 도배는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끝날 예정이었다. 잠시 외출했다 들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도배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끝났다고, 그런데 안방 스위치가 고장 났다고 했다. 근처 조명가게에서 3구짜리 스위치를 사 오면, 교체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서둘러 들어오니 새집처럼 깨끗해진 벽이 먼저 반겼다. 아들과 조곤조곤 말씀 나누던 주인장은 능숙하게 스위치를 교체해 주고 점잖게 현관을 나섰다. 도배 비용 이체가 아직 끝나기도 전이었다.


도배는 구석구석 꼼꼼하게 마감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짐을 거실 창쪽으로 몰아 놓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아래쪽의 좁고 긴 부분까지도 깔끔하게 해 놓은 상태였다. 종이 남겨두면, 짐 정리하고 내가 할 터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는데도... 식탁을 앞으로 끌어서까지 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분들 진정한 도배 박사님이셨네!'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의심했던 마음이 미안해졌다. 아들이 멋지게 성장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다. 이 글을 그분들이 볼 리는 없겠지만, 주인장 다이어리에 도배주문 약속이 가득하길 소망해 본다. 두 부자(父子)가 건강하고 행복한 부자(富者)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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