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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May 13. 2021

[특별대담] 당신은 '식세기'를 사용하십니까?

본 대담 속 인물은 실존 인물로, 주인공 J와 엄청 연관 있음을 밝힙니다



MC: 바야흐로 로봇 시대입니다. 건조기는 젖은 빨래를 햇빛보다 뽀송하게 말려주고, 로봇 청소기는 사람이 외출하고 없을 때도 알아서 거실을 청소해줍니다. 설거지 로봇으로 볼 수 있는 ‘식기세척기(이하 식세기)’는 몇 년 전 건조기 열풍이 불 때만 해도 그 위엄이 좀 덜했습니다. 사람이 씻은 것만 하겠냐며 효과를 반신반의 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렇지만 식세기는 그 효과를 체험한 사람들의 후기가 점점 늘어나며 ‘이모님’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대중화되었는데요. 오늘 특집 대담 <당신은 식세기를 사용하십니까?>에서는 식세기 구입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 주부 J님과 그의 구매를 장려하는 지인들을 만나보았습니다. J님.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식세기 구입을 망설이시는 건가요?     


J(36세, 5인 가족):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이란 걸 알지만 이상하게 못 사겠어요. 식세기를 사기 위해 빚을 내야 할 형편도 아니고 저축해놓은 것도 있는데 말이죠. 심지어 시어머니는 당신 딸도 식세기 들이고 얼굴이 환해졌다고 너네도 꼭 사라고 돈을 보태주겠다고까지 하셨어요. 남편도 제가 “사자!” 하면 바로 최저가를 검색해볼 사람이고요.

근데 저는, 내가 이것까지 사면 너무 양심 없는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들어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건조기 있으면 됐지 식세기까진 욕심이지 하는 거죠. 솔직히 그때그때 먹은 거 설거지하면 얼마 안 되는데 미뤄서 많은 거니까 제 탓이잖아요. 부지런해지면 필요 없는 건데. 그리고 설거지마저 없으면 내가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니 정말 집에서 노는 팔자 좋은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달까요. 아니라고 해도 남편도 부모님도 애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아요. 니가, 엄마가 하는 게 뭐가 있냐고. 그렇게 저는 설거지를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거죠.


L(43세, 4인 가족): 좀 충격이네요. 설거지 하나 없어진다고 주부가 노는 사람이 되나요? 그리고 남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애 키우면서 뇌 노동은 또 얼마나 많은데. 전 만약 돈 때문이라면, 건조기를 당근마켓에 내놓고 그 돈을 보태서 식세기를 사라고 하고 싶을 정도인데요. 생각해봐요. 빨래는 매일 안 해도 되지만 밥은 맨날 먹어야 돼요. 형편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기계가 할 수 있는데 뭐하러 사람이 하나요. 전 4월에 이사하면서 12인용 식세기를 장만했요. 6인용도 충분하지 않냐고들 하시는데 보세요. 4명 곱하기 3끼는 12잖아요? 전 저녁 설거지를 돌려놓고 피아노 연습을 하기로 했어요.


J: L님이 하면 이렇게 멋져 보이는데 왜 스스로에게는 적용을 못 하겠는지. 몸에 안 맞는 사치품을 걸친 느낌이에요. 식세기로 번 시간을 반드시 더 의미있고 유용하게 써야만 할 거 같은데 그럴 수 있을까도 싶고요. 식세기까지 들이고 힘들다 힘들다 하면 양심 없다 소리 듣겠죠. 뇌 노동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티도 안 나고요.


N(36세, 3인 가족): 전 집이 좁아서 못 사고 있는데 30평대에 살면 식세기 바로 살 거 같아요. 솔직히 전 J님 손으로 설거지하는 게 더 양심에 찔려야 할 일 아닌가 싶네요. J님 설거지 좀 더럽게 하시던데. 밥풀 묻어있고 막.10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던 언니가 “설거지를 아직도 손으로 해?”라고 물으면서 절 되게 이상한 사람 취급한 적이 있어요. 마치 개울가에서 손빨래 하는 사람 보듯이. 어머니 세대야 뭐 기계 못 믿는다 할 수 있어도 이제 아니죠.

식세기의 단점은 설거지를 바로 안 해야 해서 식기를 더 많이 사야 한다는 것, 특수 세제를 사야 한다는 것, 남편이 그나마 하는 유일한 집안일을 빼앗아간다는 것 정도밖에 없는 거 같네요. 그 시간에 애랑 더 놀아주거나, 아 물론 J님은 시간 생겨도 애랑 놀아주진 않겠지만요. J님 시간 몇 분이라도 더 가져서 행복해지든가 맛있는 걸 하나 더 만들든가 하면 그게 남는 거 아닌가요?     


MC: L님과 N님은 식세기를 강력 추천하시는군요. J님이 걱정하는 부분은 오히려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신데요. 식세기를 극찬하지 않는 지인들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C(40세, 4인 가족): 좀 이상하게 보실지도 모르겠는데 전 집안일 중에 설거지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신혼 때 식세기가 있었는데 작동시간이 너무 길어지니 쓰기가 싫더라고요. 제가 기계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활용을 잘못한 탓도 있고요. 이번에 평수를 넓혀 이사했는데도 부엌 공간을 넓게 쓰고 수납도 많이 하고 싶어서 아예 식세기 설치를 안 했어요. 딱히 그렇지 않고 활용을 잘할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른 거 같아요. 덕은 분명 볼 거예요.     


S(36세, 5인 가족): 제 생각도 비슷해요. 솔직히 먹고 바로 설거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식세기가 별 필요 없어요. 전 이사오면서 집들이 선물로 받아 잘 쓰고는 있지만, 원래 미루지 못하는 성격이라 좀 벅차도 마음만 먹으면 설거지 바지런히 할 수 있거든요. 근데 J님 같은 사람들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버리니까. 식세기가 원하는 주부상이죠. 식세기를 사용하면 노동이 줄긴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아예 없어지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애벌도, 관리도 있고. 다른 할 일도 여전히 많고요.

전에 J님한테 무심코 식세기 하루에 몇 번 돌리냐고 물었는데, 자기 손이 식세기라고 대답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저랑 똑같이 애가 셋이고 마침 이사 한지도 얼마 안 됐을 때라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쉽지 않겠는데, 싶었죠.     


MC: 잘 들었습니다. 사람 성격에 따라 식세기의 필요성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J님의 경우는 사면 확실히 덕을 볼 쪽이다 라는 거군요. 결국 자신을 노는 사람으로 여기고, 설거지를 전업주부의 중요한 상징처럼 여기는 굴레에서 J님 스스로 벗어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J: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집에서 놀면서 니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어쩌고 저쩌고 놀면서, 놀면서, 놀면서... 사람들이 나보고 팔자 좋대, 팔자, 팔자, 팔자...” 하는 소리가 고약한 망령처럼 들러붙어 안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가득 쌓인 설거지를 인질로 붙잡고서, 이걸 놓아주는 순간 무슨 눈치 감옥에 떨어지는 처벌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구는 거죠. 근데 얘기를 듣다 보니 용기를 한 번 내봐도 될 거 같기도 하고. 저에겐 단순 가전의 의미 이상인 거 같아요. “너 사도 돼! 죄짓는 거 아니야!” 스스로 응원해보자 싶은 마음?     


MC: <<그렇게 초등엄마가 된다>>의 이은경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식세기는 아니지만 건조기를 사기 전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집을 부린 더 큰 이유는 돈보다는 양심이었다. 게을러 보였다. 게으른 주부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개울가에 모여 빨래판에 두드려가며 어떻게든 가족의 얼룩진 옷을 희게 만들어내지 않았던가.(중략) 그 정도는 감당할 정도의 살림살이를 꾸리고는 있는데 양심, 그놈에 양심 때문에 계속 망설였다.

J님의 의식의 흐름과 비슷하죠. 비단 한 사람만의 특수한 고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려서의 환경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몫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전업맘과 워킹맘을 편 가르고, 눈에 보이는 재화 즉 돈을 거둬들여 오지 않는 일은 생산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암묵적인 시선들. 물론 시선을 떠나, 자기 스스로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에 어떠한 가치를 매기느냐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말이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J님이 전업주부로서의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도 꽤 중요해 보입니다.

저희는 J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다음 행보를 기대하겠습니다. 패널로 나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오늘의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깝깝하다 깝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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