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함께였지만 무리하지 않았다

관계 안에서 나를 쓰는 방식의 변화

by 일상의 봄


나는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는 편이다.

여행은 생각보다 나를 많이 드러내고,

관계의 균형을 쉽게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마냥 즐거워 보여도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무리'인지

스스로에게 자주 묻게 된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이번 일본 여행은

그 기준을 조금 벗어난 선택이었다.

지인 커플과 그중 한 사람의 사촌동생,

나를 포함해서 총 네 명.


출발 전부터

'친해지자' 거나 '잘 지내야 한다'기보다

'무리하지 말자'는 생각을 먼저 했다.


뭔가를 잘해보려 하는 마음이 나의 경우,

불안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무리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회피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보내는 돌봄의 신호, [감각] 임을

인정하고 있다.

모리 미술관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영원하다. 시간의 흐름을 넘어> 전시회 작품

많이 참아온 사람은 견디는 임계치가 높아

몸이 이미 한계를 넘었을 때도

뇌는 아직 괜찮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몸이 보내오는 신호를 판단보다 앞에 두고

감각에 귀를 열고 조금씩 믿어보는 중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 생각을 끝까지 잘 지켜냈다.

앞서 나서서 분위기를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를 접어두지도 않는 것.

관계 안에서

내가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를

조용히 찾는 것.


이번 여행에서 나는

비행기표 예매와 숙소 예약만 맡았다.

일정을 쥐지 않았고

결정을 대신하지도 않았다.


잘 따라가고, 잘 반응하고,

필요할 때만 의견을 보탰다.

그게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계획대로 안 돼도 좋았고,

계획대로 흘러가도 좋았다.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시간이 낭비되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여행이었다.


음식에 진심인 분이 계셔서

내가 혼자였다면 지나쳤을 맛집에 앉아

천천히 먹고 음미하며 "맛있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만족을 자주 표현하는 사람 곁에서는

여행의 리듬도 편안해진다는 걸 알았다.



취미가 다양한 분이 있어

혼자였다면 굳이 찾아가지 않았을 장소에도

자연스럽게 가볼 수 있었다.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서울로 치면 전자상가 같은 곳에 들어가

무전기와 각종 기계들을 구경했다.

낯선 동선들을 걷는 것도 좋았다.


동네 주점 같은 곳에 앉아

거하게 취한 아저씨의 큰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 사는 곳이 비슷하구나~

옆 테이블 커플들의 웃음소리를

기분좋게 흘려듣는 시간.


신주쿠 골목과 시부야의 사거리에서,

낯선 나라, 낯선 공간에

내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생소했고, 그래서 더 신선했다.

여행 중에는 몰랐는데

돌아와서 보니

짧은 시간 동안

낯선 장소에 놓였을 때 올라왔던

그 이질감과 생경함마저

고스란히 추억이 되어 있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헤어질 땐,

면세점에서 산 작은 선물을 건넸다.


각각에게 전할 말도

마음속으로 준비해 두었는데,

그 순간엔

길게 인사할 틈이 없었다.

선물만 건네고

짧은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예전이라면

'말을 다 못 한 게 아쉽다'라고

구간반복재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선물은 전해졌고,

마음도 이미 충분히 닿았다고 느꼈다.

굳이 완벽한 장면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잘한 건

사람들을 즐겁게 한 것도,

기억에 남을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관계 안에서

나를 무리하게 쓰지 않은 것.

그리고 그 선택을

나 스스로 인정해 준 것.


돌아보면 많이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분명히,

무리하지 않는 나를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더 잘해야지'보다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말을

조금 더 쉽게 꺼낸다.


이제 나는

관계 속에서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오래 함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남겨둔다. 편안하게..


이것이

이번 여행이 남긴

가장 큰 변화다.

모리 미술관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영원하다. 시간의 흐름을 넘어> 전시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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