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
이번 일본 여행은 1박 2일로 짧았다.
그래서인지 사건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여행에서 몇 가지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출발하는 날,
김포공항에서 아침 6시 20분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국제선이 아니라
국내선에서 아시아나 카운터를 찾아놓고는
환전할 은행 위치까지 야무지게 찾고 있었다.
안내 직원에게 길을 묻고 나서야
여기가 국내선이라는 걸 알았다.
잠깐 멍해졌다.
설명을 한 번 듣고,
또 한 번 더 듣고 나서야 상황이 이해됐다.
당황했지만
서둘러 국제선으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이 이야기는 일행에게 하지 않았다.
이미 아무 문제 없이 해결된 일이었고,
유머의 소재로 쓰기엔 내 무드가 너무 진지하다.
굳이 나에 대한 마이너스 이미지를
덧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도시락을 먹고 국내 영화 한 편을 봤다.
김다미 배우가 나온 <소울메이트>였다.
몇 장면에서는 괜히 눈물도 찔끔 나왔다.
어느덧 착륙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발밑에 둔 가방을 끌어당기고,
여권 위치도 확인했다.
그런데
오잉? 없다.
기억을 되짚다가
아~ 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경을 도시락과 함께 버린 것이다.
선견지명이었을까, 무의식의 실현이었을까.
예비 안경을 하나 더 챙겨 왔다는 사실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 안경을 쓰고 비행기에서 내려 일행을 만났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검은 테에서 하얀 테로 바뀌었는데도..ㅎㅎ
나는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이미 상황은 끝났고,
집으로 가려는 시점에
굳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 두 가지 일을 돌아보며
내가 기뻤던 이유는
'실수를 잘 넘겼다'는 데 있지 않았다.
말하지 않기를 '선택'했다는 것.
이것이 나를 더 기쁘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을 것이다.
실수를 웃음으로 넘기거나,
“나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나를 조금 낮추며 안전을 확보하곤 했다.
나는 조울증을 겪으며 오래도록
나 자신을 과하게 검열해 왔다.
혹시 튀지 않았는지,
불편하게 하진 않았는지,
문제가 될 만한 건 없는지.
그 검열은
나를 지켜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실수는 사건으로 끝났고,
내가 사건 자체가 되지 않았다.
작고 사소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예전에는
"어떡하지?"에서 멈췄다면,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요즘에는
이런 질문 하나를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미술치료사로서
오래전부터 내담자들에게 해왔던 말이 있다.
"저는 옆에서 손전등을 비춰줄 뿐,
길을 걷는 건 당신이에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제는
그 말을
나 자신에게도 해주고 있음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고,
너무 멀리 던지지도 않고,
친근한 표정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손전등은
항상 켜져 있을 필요도 없다.
필요할 때 켜고,
충분히 보았으면
잠시 내려놓아도 된다.
요즘의 나는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
나를 몰아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내 옆에 서서 함께 본다.
이번 여행은
길을 잘못 들었던 이야기나
안경을 잃어버린 사건보다,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는 기록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꽤 즐겁다.
나는 이제
나의 옆에 서 있다.
손전등을 들고.
어쩌면 당신도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며
그냥 지나쳐버린
어떤 순간을
이미 잘 건너왔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