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내 인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슈퍼 흙수저 출신으로 철저히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어렵고 못살던 시절, 못살던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안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어릴 적 가난과 관련해 기억나는 일은 너무도 많지만, 지면으로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아픈 기억이다. 좁은 골목 끝에 쓰러질 듯 버티고 있는 우리 집은 항상 천정에서 쥐가 들끓었고, 비가 오면 곳곳에 빗물을 받치는 양동이가 가득했으며,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임시로 받쳐놓았던 몇 개의 나무 대들보는 임시 피난시설을 연상케 했다. 겨울이면 연탄가스가 자욱해서 항상 자기 전에 다음날 깨어날 수 있을까 두려워했었다. 이렇게 가난의 기억은 내 어린 시절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 때의 가난은 실질적인 생활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나를 정서적으로도 움츠러들고 소심하게 만들어서, 매사에 자신감 없고 소심한 것이 어릴 적 내 성격이었다. 더욱이 원래부터 허약하게 태어난 몸에 가난까지 더해져 먹는 것이 부실한대다가 입까지 짧아서 어렸을 때부터 빼빼로처럼 깡마른 몸뚱아리로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지경이었다. 가난은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제대할 당시에도 아버지는 별다른 직업 없어 가정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공장이나 건물 청소 일을 다니며 집안 가장역할을 하는 전형적인 가난한 집안의 풍경이었다.
어서 빨리 내가 커서 돈을 벌고 싶었고, 우리 집안에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제대 후 3일 만에 고소득인 노가다를 첫 알바로 선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97년 사는 지역의 노가다 하루 일당이 5만원이었다. 일반 노가다 보다 육체 노동이 한 단계 위인 가정집 곰방(무거운 시멘트 등을 몸으로 나르는 것)의 경우 일당으로 7만원까지 올라가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자원했다. 25년 전의 일당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였다. 한 달을 채운 후 첫 월급으로 백만원이 넘는 큰 돈을 받았는데, 모친에게 그 절반 넘는 70만원 정도를 생활비로 드렸다. 50만원은 빳빳한 수표로 드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당시 새벽에 출근하는 건물청소 일을 하루 종일 하셨는데, 당신의 월급보다 많은 돈을 받으시고는 매우 감격해하고,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복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벌어야 했기에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내가 다녔던 이 노가다 용역회사는 사촌형의 친구가 운영하는 인력중계업체였다. 이 용역업체에 내가 소개한 지인만 해도 20명이 넘었고, 다들 막 제대한 싱싱한 젊은 혈기에 돈도 필요했기에 안성맞춤 격으로 서로 하려고 했다.
이들 중 짧게는 하루 이틀 만에 힘들어서 그만두는 사람, 한두 달까지 버티는 사람 등 천차만별이었다. 나처럼 복학까지 4개월 연속으로 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다녔다. 기억에 쉬지 않고, 14일 연속 출근한 적도 있다. 당시 체력의 정점이라 그런지 하루 일한 후 매우 피곤해도 자고 일어나면 또 어느덧 새로운 힘이 금방 충전되어 연속 일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내 생애 처음 큰 돈 번다는 뿌듯함으로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이렇게 복학까지 4개월을 일했고, 이후에도 학기 중이나 방학, 휴학 중에도 나의 이런 노가다 생활은 수년간 계속되었다.
이런 노가다 알바와 대학생활을 이어오다가 우연히 소방공무원이 된 것이었다. 내가 공무원이 된 것은 비로소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흔하디 흔한 공무원 한명 취직한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 집안을 평민 수준정도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작은 반전이었다. 그래서 집안의 경사이자 축복이었다.
공무원이 되어서도 가난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래도 부모님의 아들로써, 결혼 후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보통사람들의 안정된 삶을 흉내 낼 수는 있었다. 이정도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
31세 2천만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27살에 소방공무원이 되었던 겨울 무렵 첫 월급을 수령했을 때가 기억난다. 200만원 남짓이었는데, 2교대로 인한 시간외 수당이 많아서 적지 않은 월급이었다. 당시의 우리집안은 위태위태했다. 부모님의 불화로 모친은 따라 분가해서 서너평 정도의 허름한 산 밑의 고바위 주택에 월세 살이를 시작했다. 내가 받은 월급의 대부분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친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드렸다. 모친은 그 돈의 일부는 집안의 생활비로 썼고, 일부는 내 결혼 생활을 위해 적금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31세 결혼할 때까지 4년간 불입한 결혼자금이 2천만원 남짓이었다. 이 돈의 일부는 결혼식 등의 부대비용으로 지출하고, 와이프와 합한 결혼 초기 자산은 2천만원이 되지 않았다. 가진 자산의 규모는 한없이 초라했지만, 감사하게도 인생 처음 아파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오래된 구축의 13평 남짓한 공무원임대아파였다.
이 임대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고, 만기가 되어 나오게 되었을 때도 가진 재산은 역시 2천만원 뿐이었다. 그때까지 자녀도 없었지만 워낙 박봉이다 보니 도무지 재산은 늘지 않았다. 와이프 역시 맞벌이를 간간히 하였지만, 저축을 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의지도 없었고, 방법도 사실 몰랐다. 이 돈으로 월세든 전세든 다음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집을 구하는 첫 번째 기준은 무조건 대출금이 적게 나가는 것이었다. 당시 대출이자가 5-6프로나 되는 고금리였다. 공무원이었음에도 신용대출 이자가 10프로 넘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생활비도 부족한 판에 주거비용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해야했다.
당시 집을 보러 다닐 때 입지 좋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경비원 딸린 한 동짜리 큰 빌라가 눈에 들어왔다. 와이프와 나는 서로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 하면 이런 곳에 살 수 있을까하고 너무나 부러워서 맘속으로 부러워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진 자산이 2천만원이었는데, 그 빌라는 1억이 넘는 쳐다보지 못할 나무였던 것이다. 20년 전의 그 빌라는 내 맘속에서 마치 꿈의 궁전처럼 자리 잡아 아직도 한 번씩 추억삼아 찾아 빌라 주변 거리를 거닐곤 한다.
시내를 바라보면 아파트가 수없이 빽빽하게 많이 보이는데, 정녕 나는 왜 저들 틈에 끼어 살지 못할까? 이게 흙수저의 한계인가? 혹은 내가 뭘 잘못 판단하고 살고 있나 하는 회한이 든 적도 참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산꼭대기 고바위 빌라에서 저 아래쪽 양지 바른 평지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워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가난했지만 비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고, 회사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내고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불현듯 이렇게 사는 인생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지 바른 저 밑 평지 아파트 사는 사람은 나보다 무엇이 뛰어난 것이며, 나는 저들보다 무엇이 부족한 게 있단 말인가? 그 즈음 한창 바쁜 회사생활로 8시 출근해 10시 퇴근하는 삶이 반복되다 보니 희망이나 꿈을 그려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생활 또한 궁핍하여서 당시 카시트나 유모차 같은 유아용품도 다 중고로 쓰거나 지인에게 얻어다 썼다. 애기들 분유도 와이프는 이왕이면 영양이 풍부한 값 비싼 분유를 원했고, 나는 싼 분유를 살수 밖에 없다며 많이 싸우기도 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여전히 결혼생활의 초기는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다. 아이 두 명이 태어났기에 맞벌이는 불가능 했으며, 내가 받는 2백만원 초반의 월급으로는 생활비로도 부족했다. 이 월급에 이 생활로는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아니 퇴직할 때까지 내 자산은 늘어나는게 불가능할 것 같다는 암울함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어려운 생활 가운데 언젠가는 내 명의로 된 아파트 한번 가져 볼 기회가 인생에 한번은 오지 않을까 막연한 희망만 있었지,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와 계획이 없는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