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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대 가족의 집에 초대받다

by 재원


웰컴 투 캐피탈 시티! 붐탕에서 다시 수도 팀푸로 돌아오는데 하루 반이 걸렸다. 비가 많이 와서 도로 사정이 나빠졌던 탓이다. 나야 뒷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졸다 구경하다 하는 게 전부였지만, 굴곡진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아홉 시간을 넘게 운전한 똡뗀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불평이나 힘든 내색 한 번을 안 하니 괜히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팀푸까지 왔고, 한 시간 거리의 파로가 마지막 목적지였으니 우리 모두 어려운 고비는 넘어선 셈이었다.



수도 진입 표지판



팀푸에 간 김에 한국으로 엽서를 붙이려고 우체국을 찾았다. 팀푸의 국제우체국 안에는 차량이 가득해서 우리나라의 여느 관공서 못지않았다. 낮 시간 팀푸는 열흘쯤 전에 잠깐 스쳐 간 저녁때 풍경과는 또 달라 보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게 사는 사람들의 나라에서 가장 바쁜 풍경을 본 느낌. 하지만 밥을 먹으려고 그 거리를 빠져나가니 다시 산바람 나무가 서걱거리는 고즈넉한 풍경이 찾아왔다.



수도 팀푸의 외곽 지역에서 본 풍경



우리 일행이 모처럼 팀푸로 돌아온 덕에 춘쭈르와 똡뗀도 오랜만에 집에 갈 수 있게 됐다. 똡뗀은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집에 초대했다.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20분여를 달리니 도시 외곽에 있는 한 아파트촌에 도착했다. 낮게는 4층, 높게는 6층 높이의 아파트들이 비스듬한 오르막길에 걸쳐 띄엄띄엄 놓인 한산한 동네였다.


똡뗀과 춘쭈르를 따라 그 건물로 들어갔다. 출입구의 문은 열려 있었고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질긴 가죽 느낌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걷어내고 들어가니 십수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있거나 서 있었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담? 평일 낮에 하필 거주민들이 모두 로비에서 모여 반상회라도 하는 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똡뗀이 그들과 반갑게 포옹하거나 일일이 인사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그 로비 한편에는 주방도 있고 빼꼼 열린 문틈으로는 화장실도 보였다.



이상한 가족


알고 보니 사람이 바글대는 그곳은 아파트 로비가 아니라 똡뗀네 집 안이었다. 그러므로 그 많은 사람은 전부 똡뗀의 가족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 중심의 대가족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똡뗀네 가족들도 있었지만 아내 쪽 가족들이 비슷한 규모로 같이 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거대 가족. 나는 본의 아니게 그의 장모님과 장인어른과도 인사를 나눴고 처남 부부와도 악수했다. 그들은 2층 구조의 넓고 깨끗한 아파트에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출현에 쏟아진 주목은 잠깐이었다. 그들은 나름 외국인인 데다가 똡뗀의 일과 관계된 사람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불편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들은 마치 원래 종종 집에 놀러 오던 똡뗀의 익숙한 친구가 집에 왔다는 듯 나를 대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리 내 등장에 태평한 걸까. 신기한 문화였다. 만약에 한국에서 내가 취재하다 만난 외국인을 집으로 부른다면? 일단 앙 하는 조카 애기의 울음을 신호탄으로 가족들 모두 자리를 피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타인이 갑자기 집에 와도 경계하지 않으려면 초능력 수준의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똡뗀의 가족들은 나를 거리껴하거나 경계감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손님이 왔다며 호들갑하지도 않았다. 이 사람들 원래 나를 알던 거 아냐?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럴 리 없는 상황. 자신의 공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아놓은 심리적 장벽이 문지방처럼 낮게 느껴졌다.



"얘가 똡뗀 아들이라우”


어머님과 똡뗀, 그의 아들



소파에 앉아있자니 집안의 가장 어른인 똡뗀의 어머님이 옆에 와서 앉으셨다. 아마 이 거대한 집안의 의사결정권자이자 외교사절단이 아닌가 싶은 어르신이었다. 어머님이 앉으시니 잠시 후 키가 큰 똡뗀의 아내가 길고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손에는 부탄의 전통 간식인 쌀튀김을 들고. 엄마에게 엉겨있던 똡뗀의 다섯 살 난 아들은 원숭이처럼 아빠한테 옮겨 탄 뒤 나무 타듯 놀고 있었다. 열흘 만에 아빠를 봐서 반가웠던 모양이다.


똡뗀의 어머님은 올해 86세라고 하셨는데 별다른 말 없이 은은한 미소가 묻어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봐주셨다. 생불 같은 느낌을 주는 눈빛이 맑고 깊은 어른이었다. 몇 마디 덕담을 나누고 있자니 똡뗀의 누님이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빨간 체크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갸름한 얼굴형에 흰 피부가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익숙한 인상이었다. 내게 <태양의 후예>를 정주행 했다고 밝힌 두 번째 부탄인인 누님은 송혜교의 팬이었다. 송혜교씨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나지만 어쨌든 한국인을 신기해하는 눈길을 받으니 그제야 아 내가 손님이었지 싶었다.


그렇게 앉아있자니 틈나는 사람들이 곁에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은 물론 사오십 대 어른들까지 영어가 유창하니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


벽에 걸린 나무 시계를 보니 시침이 다음 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춘쭈르가 아직 갈 길이 남았는데 언제 가겠느냐고 물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니 부엌에서 요리에 열중하던 똡뗀의 장인어른이 나왔다. 얼굴이 붉고 눈매가 투박한 그분은 영어에 익숙지는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아마 같이 먹을 거로 생각하고 요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았다. 잠시 그 눈빛을 두고 침묵하며 서 있다가 팔을 벌려 안아드렸다. 처음 느낀 부탄 사람의 체온은 따뜻했다. 하지만 내가 그 가족들에게 남길 것은 언젠가 다시 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밖에 없었다.


그 집에서 격한 환영 인사도 눈물의 배웅도 없었지만, 그저 늘 집에 오가는 친구처럼 대해주는 사람들 틈에서 오히려 내가 손님이라는 분리감이 사라졌다.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과한 언어는 필요하지 않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부탄의 수도 팀푸, 떠나는 길에 생각해보니 마지막에 받은 환대 덕에 마음이 쓸쓸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과 길 가다 만난 아이들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자 흔쾌하게 좋다는 아이



부탄에 며칠만 있어 보면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얼마나 경계감이 없는지 느끼게 된다. 신기할 만큼 그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린다. 내 세계에 착륙한 최초의 부탄인인 춘쭈르와 똡뗀, 그들과 같이 지내보면 이런 점들이 잘 보인다. 어느 공예품점에 갔을 때 그들이 한동안 사라져 뭘 하나 봤더니 장애를 가진 어느 수공업자 옆에서 수다를 떨며 나무를 깎고 있었다. 엄청 친해 보이길래 친구라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그들도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다.


물론 상대를 더 깊이 알게 된다면 모를 때보다 서로에게 덜 따뜻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과의 관계만큼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낯선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수용될 수 있는지에 따라 일상은 매우 피곤해질 수도 있고 편안해질 수도 있으니까. 모르는 타인을 친구로 느끼는 사회와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는 사회의 차이는 크다.



어떤 전체의 연약한 얼굴들


팀푸에 있을 때 민속박물관의 댄서들이 늦은 시간 도착한 나 한 명을 위해 공연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나를 데리고 간 박물관의 안내사가 그들의 친구여서 흔쾌히 응낙하기도 했겠지만, 몇 분의 공연을 보여주는 순간에도 그들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손끝과 발걸음에는 힘주어 맺고 끊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민속박물관의 댄서들



아마 그들이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서 선호되는 - 개인의 이익을 동기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무료 입장객인 나 하나를 위해 공연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효율을 위해 계산하지 않았고 이익보다는 타인에 대한 공헌을 먼저 생각했다.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란 그런 데서 나온다. 부탄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어눌하고 투박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품위를 잃지 않기 때문에 어딘지모를 내적 강함이 느껴진다. 이들에 비춰 나를 생각해보면, 겉으로는 좀 더 세련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이익을 위해 셈하고 그런 나를 감추기 위해 눈치 보느라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간의 품위를 잃게 된 것을 개인의 잘못만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 폭동을 겪은 도시, 하나 남은 식료품점에 늘어선 천 명의 사람들이 그려진다. 살기 위해 이 줄에 설 수밖에 없겠지만 줄 안에 서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기 어렵다. 게다가 힘 있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물건을 빼가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줄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만 강요되는 규칙을 우회하는데 골몰하게 된다.


이때 타인은 자신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장애물 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우리 자신이 각자 싸우며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분리된 개인이라는 세계관을 갖게 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부탄 사회를 보면서 나는 그것이 인간의 삶에 관한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전제는 아님을 깨달았다.



작은 사당을 지키는 어른에게 마을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



부탄 사람들은 자신을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속해 있고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어떤 전체의 실체는 모호하다. 그것은 가족 공동체일 수도 있고, 주변을 둘러싼 산과 들판일 수도 있으며, 현생 이후에 돌아오는 다음 생과의 끝없는 연결일 수도 있다. 그 거대한 것의 객관적 실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알 수 없는 전체의 연약한 일부 혹은 다른 얼굴들이라는 자각이었다.


그 거대한 연결의 한 시점에 우리는 피어나며 우연히 근처에 나타난 다른 생명들과 조우했다는 것. 그것이 인연이며, 보이지 않아도 그 인연들과 자신이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믿음을 부탄인들은 가지고 있다. 부탄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과 엮여 영속하는 질서를 느끼며 낙오와 소멸의 불안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무의 잎들처럼 뿌리를 공유한 채로 경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것이 내 주변의 사람들이라는 본질을 볼 수 있다면, 조금 더 따뜻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날 해 질 녘쯤 팀푸의 경계를 지나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인 파로Paro에 들어섰다. 협곡의 가장 낮은 곳을 따라 강과 함께 달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한 시간쯤 달린 후였다. 우리는 가끔 멈춰서 짙은 보랏빛 노을이 강을 따라 멀리서 낙낙하게 번져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로 강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군락을 이뤄 살고 있었다. 그들이 한가롭게 강변의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는 모습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느 문명의 한때처럼 평화롭고 신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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