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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리아가 부탄에 온 이유

by 재원


전날 도착한 파로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 부탄의 8월은 변덕이 심한 아이처럼 추위와 더위 사이를 오간다. 낮엔 더워서 반소매 옷을 입어야 할 날씨였다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에는 히터를 틀지 않으면 추워서 잘 수 없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날 밤이 그랬다. 비가 많이 와서 방 안이 추웠는데 하필 히터가 고장 나서 이불을 돌돌 말고 겨우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조금 따뜻해졌길래 비가 그쳤기를 기대하며 창문을 열었다.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이자 가장 기대해 왔던 '호랑이의 둥지'에 오르는 날이다. 반드시 맑아야만 한다. 창문을 여는 순간, 다행히도 파란 비단 같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



호랑이의 둥지


부탄에 온 여행객 중 상당수가 5일 안팎으로 머물다 떠난다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 파로와 팀푸, 멀리 가더라도 푸나카까지만 둘러본다. 그렇게 짧은 일정에서도 꼭 빠지지 않는 장소가 파로의 탁상 라캉Taktsang lhakhang이다. 그러니 부탄에 온 사람들은 다들 한 번씩은 이곳에 들르는 셈이다. 부탄 고유어로 탁Tak은 호랑이라는 뜻이고, 상tsang은 둥지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이곳을 타이거스 네스트Tiger’s Nest라고 부른다.


7세기경 호랑이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구루 린포체는 3년 3개월 3일 3시간 동안 기도하고 명상하며 악귀와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를 기려 1692년에 사원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 크게 불이 났고 수행하던 승려가 죽기도 했다. 그로부터 수년간 거금을 들여 건물과 불화 등을 재생한 끝에 2005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멀리 산꼭대기쯤에 작은 점처럼 보이는 탁상 라캉



올라가기 쉽지 않은 곳이라고 전날 춘쭈르가 엄포를 놓아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올라가려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차가 도달하는 곳에서부터 해발 1000미터가량을 더 올라가면 되는데, 부탄의 평균 해발고도가 워낙 높아서 따지고 보면 백두산 중턱 정도에서 등산을 시작해 정상보다 더 높은 곳에서 마치게 되는 셈이었다. 길도 가파르다고 하니 산행에 단련돼 있지 않은 사람은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찾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꼼수가 있었다. 시작 지점에 말들이 여러 마리 묶여 있는 것을 봤다. 색색의 안장을 맞춰놓은 걸로 봐서는 누군가 타는 용도가 확실했다. 춘쭈르한테 물어보니 저 말을 타면 중간 지점까지는 태워다 준다고 했다. 아직 출발도 안 했지만 뭔가 힘든 산행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잠깐 탈까 생각했다. 하지만 춘쭈르가 안 타는 게 좋다고 해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씩씩하게 그냥 발걸음을 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탄인들은 외국인이 와서 말을 타고 탁상 라캉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편하자고 말을 고생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길이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따라 휘어 있어서 실제로는 훨씬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특히 해발 고도가 높아서 더 빨리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도 들었다. 더구나 이곳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오른다는 춘쭈르는 나와 같은 나이었음에도 몸이 가볍고 발걸음이 빨라서 그한테 맞추자니 벅찼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뒤처질 순 없어! 하는 한국식 허세를 부리다가 한번은 머리가 핑 돌면서 무릎이 꺾일 뻔했다. 떠나기 직전 똡뗀이 쥐여준 물병이 없었다면 아마 정신 못 차리고 몇 바퀴 굴렀을 것이다.



중턱까지 올라 잠시 쉬고 있는 말들


지쳐 보인다. 말의 표정을 보니 안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모든 행복의 근원임을 기억하라”


부탄 어디서든 널브러져 있는 멍멍이들… 심지어 여긴 해발 3000미터인데


호랑이의 둥지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어릴 때 말로만 들었던, 벌레를 잡아먹는 끈적이풀을 직접 봤다.


걷다가 고개를 드니 코앞에 탁상 라캉이 다가와 있었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릴 때쯤 전망이 탁 트인 쪽으로 돌아 나왔다. 아, 그 순간에 반대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왼편에는 절벽과 사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광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이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웠지만, 어떻게 저곳에 기둥을 세우고 흙을 발랐을지가 궁금해질 만큼 위태로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의 신념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복잡하고 신묘한 예술이 아닐까 싶었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 무거운 재료들을 짊어지고 수천 미터를 걸어 여기에 당도했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절벽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목숨을 걸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흙을 발랐던 수도승들에겐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 내세, 구원, 깨달음. 인간의 유한한 생이 종교적 집념을 만든다. 그 무언가를 향한 일념으로 수년에 걸쳐 이 사원을 지었을 사람들의 고된 삶을 생각하니 처마의 금장이나 외벽의 색칠 하나까지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탁상 라캉은 수행하는 승려들의 둥지라기보다는 각국의 관광객들이 훨씬 더 많이 다녀가는 여행자의 천국이 되었다. 입구에는 중국과 일본인들, 그리고 유럽과 미국 지역의 부유한 관광객들이 각국의 언어들로 떠들어 마치 바벨탑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오기 넉 달쯤 전에 영국의 윌리엄 왕자와 그보다 더 유명한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빈이 다녀간 후로 더욱 서양인 방문객들이 늘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절벽 위에 걸쳐 있다.


입구에는 이미 세계 각국의 많은 관광객이 도착해 있었다.



기묘한 지형 위에 세워진 만큼 탁상 라캉의 내부 구조도 특이했다. 좁은 방들이 굴처럼 이어져 있고 저마다 높낮이도 달라서 고개를 숙이고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부처를 모신 교당에서 별생각 없이 흙벽과 처마 틈으로 밖을 바라봤는데, 아래로 동전이라도 떨어뜨리면 한 시간 정도는 추락하겠다 싶은 아찔한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도대체 이 벽의 바깥에 짙은 갈색의 장식은 어떻게 그렸으며, 목재로 촘촘하게 짠 지붕은 어떻게 올렸을까. 목숨을 걸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가 유럽을 떠난 이유


탁상 라캉에서 한 시간쯤 내려오면 카페테리아가 하나 있다. 차도 마시고 간단히 식사도 할 수 있어서 탁상 라캉에 오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카페테리아 전망대에서는 파로 지역의 전망을 두루두루 볼 수 있어서 꼭 한 번 가 볼 만한 곳이다.


산중 식당에서 먹는 밥이 뭐 얼마나 맛있겠어? 하며 기대 없이 음식을 기다리는데 웬걸, 밑에서 먹은 웬만한 식사보다 종류도 다양하고 맛깔난 음식들이 나왔다. 땀도 뺐겠다 편한 마음으로 밥을 배불리 먹은 뒤 잠깐 산바람을 쐬며 주변을 구경했다.


춘쭈르는 또 거기서 친구를 만나(만난 건지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한참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길래 잠시 바깥쪽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어떤 눈이 큰 서양인 여성이 음식을 가져와서 바로 옆에 앉았다. 내가 앉아 있던 그 테이블은 크기도 작았는데 아마 한국 사람들 같았으면 웬만해서는 모르는 사람과 동석하지는 않을 사이즈였다.


때마침 옆에 앉기도 했으니 where are you from? 하고 가볍게 말을 던져봤다. 그리고 이 한 마디 이후에 다시 한번, 이국의 여행지에서는 모두가 친구라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했다. 우리는 부탄 곳곳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유럽을 비롯한 각국의 정치 상황과 세계 3차 대전에 대한 걱정까지 쉴새 없이 잡담을 나눴다.



마리아를 만난 탁상 카페테리아



포르투갈 사람인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로드리게즈. 치의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코임브라 대학에 있는 분이었다. 나는 포르투갈 사람이 축구하는 건 본 적이 있지만 얘기를 해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게 그 나라 사람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연신 손짓을 섞어가며 거의 연극배우 수준으로 얘기를 풀어놔서 여러 차례 박장대소를 했다. 이렇게 유쾌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본 건 오랜만이었다.


마리아는 이번에 약 20일 정도 시간을 두고 네팔과 부탄, 티베트를 여행한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보려고 일부러 네팔을 거쳐서 들어왔고, 부탄에 5일을 머문 뒤 나머지는 티베트에 있을 거라고 했다. 마리아는 부탄에 머무는 기간이 짧아 동쪽 지역에 가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는 붐탕에서 내가 본 불타는 호수와 소녀들의 수도원, 그리고 낙원 같은 붐탕의 평원과 솜씨 좋은 수공예 장인들에 관해 얘기해줬다.


지중해와 북대서양 사이에 있는 대표적인 서유럽 부국 포르투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휴식차 찾아가는 유서 깊은 나라로 알고 있는데, 그녀는 왜 굳이 8천 km를 날아 아시아의 소국에 찾아온 걸까.


마리아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있어서 여름휴가 시즌에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바글대는 사람들을 피해 좀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부탄과 티베트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아 봤자 서울만큼 발 디딜 틈 없지는 않을 텐데. 그 정도가 벅차서 탈출하는 나라의 일상이란 얼마나 여유 있는 것이었을까.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수십일 씩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부러웠다. 터키에서 공부한다는 애들 걱정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는 걸 보면 마냥 자유로운 영혼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다.



카페테리아에서 멀리 탁상 라캉이 보인다



지난여름 터키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독재를 하고 제정분리 원칙을 어겼다는 것이 군부의 명분이었다.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수백 명의 군인과 시민들이 죽었다. 당시 마리아의 딸들은 터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거리에 포연이 자욱하고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도시에서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쿠데타 이후에는 피의 숙청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한층 더 흉흉해졌고, 마리아가 아는 터키 교수들도 여러 명 죄 없이 갇혔다고 했다.* 그러면서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됐는데, 마리아는 유럽에 살면서 요즘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가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유럽 각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수십 명이 테러 때문에 죽거나 다치고 있어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앞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킬지 모르고, 주변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난민들이 수천 명씩 탈출해 들어와요. 갈수록 덩치를 키우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극우 세력도 문제예요.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곧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을 느껴요.




(*마리아는 터키 군부의 쿠데타가 대통령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벌인 자작극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터키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32%가 쿠데타 배후는 대통령이라고 답했다.)



다시 제자리로


마리아가 살아온 포르투갈은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다. 긴 제국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마카오 반환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식민모국 노릇을 했다. 그동안 내부에 축적한 자본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이 의료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사회보장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뿐 아니라 부탄에 온 외국인들은 대부분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부탄 여행 연감을 보면 관광객 중 절반가량은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 선진국 출신이다. 입국 비용이 비싸다 보니 대체로 이런 사람들만 오게 된 것이다. 넉넉하게 잘 살아온 사람들이 왜 굳이 부탄까지 찾아왔을까.


그들은 좀 더 편하게 살려고 열심히 돈을 벌고 경제를 키워왔다. 하지만 그동안 멈춤 없는 성장을 위해 배제해 왔던 소수자들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키우다 규모를 키워 돌아온 것이 바로 테러리스트와 극우파였다. 그 결과 흔히 선진국으로 불리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극우파의 발호와 테러리즘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경쟁에서 밀려났거나 애당초 차별로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이들은 직접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이렇게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은 휴식조차 쉽지 않을 만큼 불안해졌다. 그 첨예한 긴장을 피해 자신들의 사회와 가장 반대되는 모습의 나라를 찾아온 것이 마리아 같은 발전된 국가의 관광객들이었다.



부탄에는 두 종류의 자국 맥주가 있다. 그 중 하나인 드룩 라거. 약간 특이한 향이 난다.



탁상 라캉에서 내려와 파로 시내를 잠시 둘러본 뒤 호텔로 돌아왔다. 부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춘쭈르와 똡뗀과 같이 저녁을 먹었고 그들은 이슥한 밤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레스토랑에 남아 청색 라벨이 붙은 차가운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부탄에 온 후 처음 먹어보는 술이었다. 내일이면 나는 정든 두 사람과 작별하고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곳에서 다시 초현대식 빌딩 숲과 오물내 나는 빈민가가 공존하는 자연스러운 우리 세계의 풍경을 볼 것이다. 그렇게 부탄에 있는 동안 이상하다 여겼던 우리 사회의 관습에 다시 적응을 시작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여행기라도 써서 이 여름 부탄에서의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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